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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 다람살라, 맥그로드 간즈 전경
 북인도 다람살라, 맥그로드 간즈 전경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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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오후 5시 30분에 출발하는 북인도 맥그로드 간즈(아래 맥간)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맥간으로 향하는 버스는 생각보다 아주 편했다. 좌석을 뒤로 눕힐 수 있었고 담요까지 있었다.

버스 의자에 허리를 깊숙이 파묻고 인도에 온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맥간으로 가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맥간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단순했다.

'기차표 예매하기가 번거로워 그저 여행길에서 만난 동료들을 따라 나선 것.'

원고쓰기에 참고가 될 만한 굵직한 여행 설명서를 챙겨 왔지만 인도에 와서 단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글자가 작아서 보기도 만만치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여행서에 의지해 길 찾아 나서는 것이 영 마뜩찮았다. 길을 헤매다가 정 모르면 참고 삼아 들춰 보면 될 것이었다. 미리 뭔가를 다 알고 찾아가면 김빠진 맥주 맛이 날 것 같았다.

델리에서 맥간까지 장장 12시간 거리.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눈을 붙이다가 서늘한 기운에 눈을 떴다. 얼마나 달려온 것일까, 빗줄기가 차창을 후려치고 있었다. 마른 번개가 밤하늘을 쩍쩍 갈랐고 천둥이 몰아쳤다. 그 어떤 숨통 조이는 현실의 문을 열어 제치고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델리에서 12시간 이동하여 고산지대 맥간 도착

열두 시간 걸쳐 더위와 마른 번개와 빗줄기를 뚫고 맥간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다섯 시. 우리가 타고 온 버스 한 대가 전부인 허름한 주차장에는 여전히 어둠이 깔려 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추위가 몰려왔다. 델리에서 출발할 때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등줄기로 땀이 흐를 정도였는데 12시간 만에 추위를 느끼는 고산지대 맥간(1770m)으로 이동한 것이다.

주차장 주변에는 걸인들이 얇은 담요를 칭칭 감고 잠들어 있었고 간간히 정전이 발생했지만, 모두가 태연했다. 버스에서 내릴 무렵 터미널 매점이 막 문을 열고 있었다. 첫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춘 모양이다. 우리는 인도인들이 즐겨마시는 뜨겁고 달콤한 짜이로 추위를 녹였다.

짜이 한 잔으로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고마웠다. 그 고마움 끝에 터미널 바닥에서 담요 한 장에 의지해 한뎃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아프게 가슴에 꽂혀왔다.

날이 밝기 시작하자 게스트하우스를 알선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찾아와 명함을 내밀었다. 대부분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한 티베트 사람들이었다. 인도 유학생 유주상씨는 그 중 한 사람과 영어도 아닌 힌디어를 주고받았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배낭은 동료들에게 맡겨놓고 주상씨와 함께 티베트 사내를 따라 나섰다. 그가 소개한 게스트하우스의 시설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지만, 전망이 썩 좋지 않았다. 배란다도 없었다. 앞산이 높다랗게 너무 바싹 다가와 있었다.

다시 빗길을 뚫고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주상씨가 자신의 커다란 넷 북을 펼쳐 인터넷 검색을 했다. 카쌍이라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전화를 걸더니 방 가격이 괜찮다고 한다. 다들 배낭을 챙겨 게스트하우스 카쌍을 찾아 갔다. 주상씨가 없었다면 내내 게스트하우스 주변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었다.

게스트하우스 카쌍은 낡은 건물이었다. 계단도 숨 가쁘게 가파랗다. 하지만 숙소 지배인이 소개하는 방 앞에는 너른 베란다가 있었다. 베란다에 서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산자락에 기대어 촘촘히 들어서 있는 맥간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저만치 높은 산자락 뒤편에 설산이 보였다. 히말라야다. 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히말라야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히말라야다. 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맥간 게스트 하우스에서 바라다 보이는 히말라야 설산
 맥간 게스트 하우스에서 바라다 보이는 히말라야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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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산에 가려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는 설산은 칸첸중가로 이어지는 히말라야 줄기라고 한다. 여기다 싶었다. 거기다가 싱글 룸이 150루피, 침대가 두 개 놓여진 더블 룸은 450루피에 불과하다. 방 가격이며 빼어난 절경, 신선한 공기, 델리에 비하면 천국이다.

더블 룸은 화장실과 샤워 시설이 딸려 있었지만, 원룸은 아주 작다. 화장실과 샤워 시설을 공동으로 쓰고 딱딱한 침대에 얇은 매트리스 하나 달랑 놓여 있다. 그 허름하고 비좁은 원룸은 내가 쓰기로 했다.

인도에 오기 전에 다락방이나 두 평도 채 안 돼는 방에서 지내왔고 본래 땀 흘려 농사짓지 않는 시기에는 샤워는 물론이고 세면도 자주 하지 않는 체질이기에 나를 위한 방인 듯싶었다.

때마침 싱글 룸 하나와 더블 룸 두 개가 나왔다. 델리에서처럼 더블 룸 하나를 세 명의 여자들이 함께 쓰고 주상씨와 이준씨가 다른 더블 룸을 함께 쓰기로 했다. 다들 제 방으로 들어가 샤워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내 베란다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버스에서 비몽사몽 선잠을 잤지만, 눈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풍경에 피로감이 싹 가셨다.

앞 산자락에 가려 어설피 뵈는 설산이긴 했지만, 인간의 손때 묻지 않은 순수한 결정체 히말라야 설산이 내 눈 앞에 있었다. 그 설산과 마주 대하는 순간, 깊은 고통의 터널 속에 한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야 인도에 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온갖 비바람이 몰아쳐도 변함없는 설산, 인도 어딘가에서 저 설산을 닮은 흔들리지 않는 맑은 마음자리를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았다. 여기저기 붉은 승복을 입은 티베트 라마승들과 마주쳤다. 인도에 와서 처음 대하는 라마승들이다.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저들의 뒷모습에서 티베트 승려가 된 동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배시시 웃으며 뒤돌아 볼 것만 같았다. 그렇게 뭔지 모르게 맥간의 낯선 거리가 친근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맥간에서는 티베트 라마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맥간에서는 티베트 라마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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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간 거리에서 만난 티베트의 자유를 외치는 포스터.
 맥간 거리에서 만난 티베트의 자유를 외치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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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간에는 인도 사람들 보다 티베트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우리가 짐을 푼 게스트하우스 주인도 티베트 사람이다. 후에 알게 된 것인데 티베트인들의 정착촌이라 할 수 있는 이곳 맥간은 티베트 임시 정부가 자리한 다람살라에 속해 있다. 다람살라가 티베트 망명 정부의 중심지라면 맥간은 다람살라에 딸린 읍이나 면 단위의 지역이었다.

우리의 얼굴 생김새와 닮은 티베트 사람들, 중국에 나라를 빼앗기고 인도 땅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사람들. 주먹을 불끈 치켜 올린 길거리 포스터, '프리 티베트'가 피를 끓게 한다. 그 옛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나라 잃은 한을 삭이며 중국에서 떠돌이 삶을 살아내야 했던 조선인들. 그들이 내 눈 앞에 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열 아홉 살에서 흰 수염이 덥수룩한 오십 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묘한 조합을 이루며 우르르 몰려다녔다. 아침 식사를 위해 일행 중에 누군가가 인도 여행 안내서에서 찾아낸 '모모'라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모모는 만두였다. 나는 모모 식당에 앉자마자 나름 일행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물었다.

"'모모는 방랑자'라는 노래 아는 사람?"

다들 '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시나?' 그런 표정들이다. 나는 거기다가 한술 더 떴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 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예전에 이런 모모는 방랑자라는 노래가 있었는디... 여기가 모모 식당이잖어, 우리는 방랑자구.... 감이 안 오나? 어이구 썰렁해... 그만둬야 겠다."

다들 아무런 반응도 없이 썰렁해 하는 표정에 결국 내가 시작하고 내가 마무리를 지었다. 세대 차이였다. 비로소 나는 동료에게 아버지 뻘인 내 나이를 가늠했다. 동료들이 고마웠다. 내치지 않고 어딜 가든 함께 가자며 끼워준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인연들인가. 다들 나와 함께 여행하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그래도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모모가 방랑자와는 전혀 상관 없는 만두라는 것을 알아가듯 티베트 음식을 하나 둘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인도 음식과는 달리 티베트 음식들 중에는 모모를 비롯해 우리의 수제비와 비슷한 '뗀뚝(thenthuk)', 야채튀김 '파코다' 등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꽤 많았다.

나는 티베트 음식뿐만 아니라 인도 음식들을 먹을 때마다 그 이름을 머리에 새기곤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일행들과 똑같은 것을 주문했다. "같은 걸루 시켜" 아니면 "왜 그때 먹은 거 있지, 국물 있는 거"라는 식이었다.

여행 동료들은 다들 인도에 대한 정보를 준비해 왔지만 그에 비하면 나는 인도에 대해 깡통이었다. 우리 일행의 막내 '순이'가 자신이 준비해온 인도에 관련된 정보를 펼쳐보고 있다.
 여행 동료들은 다들 인도에 대한 정보를 준비해 왔지만 그에 비하면 나는 인도에 대해 깡통이었다. 우리 일행의 막내 '순이'가 자신이 준비해온 인도에 관련된 정보를 펼쳐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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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데 인도 현지인처럼 생겨먹은 나는 인도 문화에 대해 깡통이었다. 하지만 전혀 현지인처럼 생기지 않은 동료들은 인도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을 지니고 있었다. 영어 실력도 열 아홉 순이가 나보다 훨씬 더 나았다. 입시공부 대신 인도 여행서를 독파했다는 순이는 인도 여행지나 그 지역의 맛 집은 물론이고 "아차, 아차(오케이)", "찰로 찰로(레츠고)" 등 몇 가지 힌두 말까지 구사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썰렁한 농담을 던졌다.

"뭐라 그라는 겨? 순이야 너 또 나 한티 욕했지? 욕하지 말라니께."

순이보다 나이 많은 다른 동료들은 또 얼마나 더 순발력이 있겠는가. 이준씨가 연극 배우답게 재치 넘치는 분위기 메이커라면 190cm가 넘는 키에 아주 선하게 잘생긴 주상씨는 우리들에게 더 없이 좋은 여행 가이드였다. 어리버리한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다.

델리에서 구입한 샌들이 발가락 사이를 압박해 운동화를 구입해야 했는데 그는 앞장서서 맥간에 있는 신발 가게를 이 잡듯이 찾아다니며 일일이 가격을 묻고 흥정을 해줬다. 그뿐 아니었다. 입에 맞는 음식에서부터 길 찾기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불편함 없이 인도여행을 편하게 해 주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큼직한 넷북을 펼쳐놓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상세하게 알려 줬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파이프 배관을 설치하는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했다는 그는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크리스천이었지만,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앞뒤 꽉 막힌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다른 종교를 존중할 줄 알았다.

착한 사람이 어디 주상씨뿐이겠는가. 비록 소비 공동체지만, 자신을 내세워 돌출 행동을 하지 않고 다들 공동체에 뭔가 도움이 되고자 하는 친구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배려할 줄 아는 착한 친구들이었다.

우리들의 공통점은 다들 직장이 없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른 고민거리가 될 수 있지만, 그만큼 메인 데 없이 자유롭다. 다들 인도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영화 <김종욱 찾기>처럼 가슴 아린 첫사랑을 찾고자 하는 젊은 청춘이 있을 것이고 또한 늘 반복되는 일상에 억눌린 자유를 찾기 위해 온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혹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유명 관광지와 먹거리를 찾아다니며 낯선 사람들, 낯선 세계를 경험하고자 온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인도여행 통해 자신을 되돌아볼 것

우리들의 여행 가이드 역할을 했던 인도 유학생, 친절한 유주상씨.
 우리들의 여행 가이드 역할을 했던 인도 유학생, 친절한 유주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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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음식만 먹다가 우리 입맛에 맞는 만두를 먹고 모모 식당에서 나오는 발걸음들이 가벼웠다. 다들 얼굴 표정들이 밝았다. 장시간 버스여행에서 오는 힘겨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구속됨 없는 즐거운 자유 속에는 아이들 엄마와의 불화를 어떻게 좀 풀어 보겠노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처럼 다들 고민거리들이 있을 것이었다.

친절한 주상씨는 1년 남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나면 어딘가 번듯한 일자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나름 고민이 많을 것이었다. 늘 웃는 얼굴인 이준씨는 연극배우로서의 열정이 넘쳐나지만, 연극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 거기다가 무대 설 자리가 그리 많지 않은 무명배우의 아픔이 있을 것이었다.

학교를 휴학한 지희나 졸업생인 현정이에게는 취업 걱정이 많을 것이었다. 천방지축 순이 역시 대학 대신 자유로운 길을 선택했다지만, 그 자유에 따른 책임감이 보이지 않게 자신을 압박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모두들 즐거움 뒤에 숨겨진 불편한 사연들을 인도여행을 통해 풀어내며 자신을 되돌아볼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더러는 맥간 거리로 나서고, 더러는 숙소로 들어와 휴식시간을 가졌다. 그 휴식은 달콤했다. 고행 길을 택한 내가 이렇게 편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른한 행복감이 몰려왔다. 영어도 깡통이고 거기다가 나이 값도 못하는 어리버리한 나를 선생이라 불러주는 고마운 젊은이들까지 든든하게 곁에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나는 맥간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들처럼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맥간 하늘을 날고 있는 독수리
 맥간 하늘을 날고 있는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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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향해 끝없이 날아가는 독수리를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큰아들 인효 녀석이 배시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녀석에게 문자를 날렸다. 문자는 순식간에 시공을 초월하듯 날아갔다.

"별일 없지, 여기 맥간이라는 곳인데 너무 좋다 ^^"
"살판났구먼 ㅋㅋㅋ"
"나중에 함께 오자"
"그려, 건강 조심 하시구."

나의 인도 여행길, 그 중심에 송인효 녀석이 있었다. 세상 아픔을 사람들과 더불어 노래할 수 있는 뮤지션을 꿈꾸는 녀석,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세미 앨범을 내면서 제 길을 찾아 나섰다. 만약, 녀석이 대학을 가겠다고 했다면 나는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었다. 녀석은 개갈 안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영양가 없는 공부에 죽어라 매달려야 했을 것이고 나는 녀석의 학비를 벌기 위해 머리통 쥐어 짜며 돈벌이에 매달려야 했을 것이었다.

힌두어는 말할 것도 없고 영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수염발 허연 내가 대책 없이 인도 배낭 여행길에 오른 것처럼 모든 생명은 어떤 경우든 스스로 설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 믿음을 녀석과 공유했다.

나는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찾아 나가기를 바랐고, 녀석은 좌충우돌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아 나갔다. 내가 녀석에게 입시 공부에 대한 압박 대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듯이 녀석 또한 내게 돈벌이 대신 자유로운 인도 여행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자유를 주었다. 녀석이 어릴 때부터 어지간한 일을 스스로 해결하기 바랐다. 녀석이 원하지 않은 공부를 권유는 했을망정 단 한 번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 결실이 녀석은 기타를 쳐가며 노래를 만들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나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때 묻지 않은 저 히말라야 설산 앞에 설수 있는 자유로 얻었던 것이다.

녀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감정이 복받쳐 깜박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나는 녀석을 떠올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고맙다. 송인효."


태그:#다람살라 맥글로간지, #히말라야 설산, #티벳 프리, #여행동료,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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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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