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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이 29일, '한수진의 SBS 전망대'와의 인터뷰에서 윤 일병 사건의 핵심 목격자로 알려진 김 일병이 해당 내용을 신고하지 않은 게 잘못이라고 언급했다.

김 일병은 천식으로 치료를 받던 중 윤 일병이 폭행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윤 일병이 끝내 숨지고 이 내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핵심 내용을 증언하였다. 그리고 윤 일병은 천식  등의 제병으로 의병 제대를 했다.

군이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김민석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잘못된 일이 있으면 신고하는 것입니다. 그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

맞는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잘못된 일이 있으면 신고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은 맞는 말이다. 이를 건강한 시민 의식이라 하고 민주주의의 주체적 행동 양태로 보아야한다고 듣고 배웠다. 차라리 이런 이야기를 듣고 또 학습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김 일병은 현재 이 사건을 막지 못한 미안함에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라 알려졌다.

군대는 민주주의의 원리가 통용되는 조직인가

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의기구 또는 투표를 통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자주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이를 반영하는 사상이나 정치사회 체제를 말한다. 이런 일반적인 이해의 틀 속에서 군을 얘기할 때는 특수조직으로 분류할 때가 많다.

이때 군의 특수한 조직 속에서 개인이 가진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전제가 내포되기 쉽다. 이 전제가 내포하는 별도의, 예외의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한 군대는 민주주의 원리가 통용되는 조직이 아니다.

어느 사회든 개인의 행동을 규정하는 약속이 있다. 사회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규정해 놓은 것이 법이고 거의 모든 조직은 나름의 규율을 만들고 지킨다. 또 이 법과 규율보다일반 시민 사회의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정한 관례와 도덕이 있다.

그러나 김민석 대변인이 대한민국 사병에게 민주주의 사회의 의무를 요구하려면 바로 군도 이 민주주의 원리가 통용되는 조직이 되어 있어야 한다. 병영민주화를 군이 부르짖은 것도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병영은 아직 이 민주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 군대가 군율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사람에 의해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군대에도 군율이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선임자의 후임에 대한 폭력은 군율로 금지되어 있다.

문제는 이 군율이 있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군을 개혁하는 모든 문제의 출발이 여기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효율적인 통제를 위하여 사단장은 대대장에게, 중대장에게, 소대장에게 또 분대장에게 통제와 제제를 맡기고 있는 이 시스템이야말로 군 개혁의 제 1 대상이 되어야 한다.

훈련은 정해진 교범과 교육 메뉴얼에 따라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정해진 근무 이외의 생활에 대한 통제와 제제는 군율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도록 변해야 한다. 군 당국이 이미 군은 이런 조직이 되어 있다고 믿고 있고 기왕에 발생한 사건은 일부 예외적인 일탈일 뿐이라고 믿는다면 더 이상의 군대 내 민주주의의 진보는 없다.

30년 전에도 훈련과 근무보다 병영 생활이 더 힘들었다. 군인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군율이 나를 통제하고 있지 않고 선임과 간부들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는 군대 생활은 하루가 3년 같은 지옥일 수 밖에 없다.

통제된 민주주의의 학습 장소로서 병영

'군대에 다녀오니 사람됐다'라는 말이 자주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한편으로 이 말은 군대생활을 통해 스스로 인생에 대해 더 멀리 또 깊게 생각하게 되고 가족에게 더 책임감을 갖는 구성원으로 복귀하였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경우에라도 '시킨 것은 다 한다'라는 복종의 미덕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할 때도 많았다. 어떤 조직에서 상사가 지시한 내용에 반대하거나 불복하게 되면 '쟤 군대 안 갔다 왔지?'라고 묻기도 했다.

폭력에 대한 정당한 저항을 할 수 없는 군대는 개인의 민주의식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어떤 경우엔 개인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 조직과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묵시적으로 통제될 수도 있다는 인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방어기제로 내면화될 수도 있다. 전역후 수십 년 동안 남자들의 의식 속에서 군대가 절대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찍혀 있다면 이 방어기제는 위축된 개인의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다.

군대가 변해야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등병과 일병 때 받은 폭력이 내면화되었다가 상병, 병장 때 후임병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된 윤 일병 사건의 가해병사들 또한 이 과정을 보여준다.

가해병사들도 한 가정의 기대 속에 태어나고 각자 이 나라의 교육 과정을 통해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교육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 입대 후 스스로 고백하듯 일상화된 폭력에 노출되었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나 마침내 자신이 폭력의 집행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만일, 이번과 같은 사고를 겪지 않고 그들이 전역하였다면 이 과정은 그대로 각자의 내부에서 적당한 합리화를 통해 보전되었을지도 모른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사회가 건강할 수 없듯이 군율보다 주먹이 가까운 군대도 건강하지 않다. 이렇게 보전된 그들의 의식이 어느 순간 사회에서 폭발하게 되었다면 군대는 이 폭력을 예비한 조직이 될 수 밖에 없다.

특이한 성정을 지닌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조직의 일탈로 이 사건을 대한다면 제 2, 제 3 의 피해병사는 계속 나올 수 밖에 없다.

너무 한심한 국방부 대변인의 문제의식

김 일병을 민주사회의 소양도 갖지 못한 개인으로 인식하는 국방부 대변인의 인식은 이 사태를 대하는 군의 입장을 드러낸다. 국방부 대변인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사건의 진상규명과 동일한 사건의 재발방지는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피해 병사인 윤 일병을 바라보는 김 일병 또한 윤 일병과 다르지 않은 과정을 겪었을 수도 있다. 군이 아닌 우리 일반 사회도 내부고발자를 보호하지 못한다. 조직 내에서 내부고발자는 변절자로 따돌림당하고 각자 핑계를 대서 조직에서 축출하고 외면한다.

일반 사회도 보호하지 못하는 내부 고발자를 하물며 군대에서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사회 전체의 시민 의식이 내부고발자를 사회발전의 주요한 동력으로 따뜻히 안을 필요가 여기에 있다.

김민석 대변인의 김 일병 책임론은 분명 또 다른 엄중한 폭력이다. 그렇지 않아도 윤 일병을 지키지 못한 죄의식을 지닌 김 일병에 가해진 무식한 언어폭력이다. 사과해라.


태그:#윤일병 사건,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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