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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 명 가량 남은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는 상봉 때마다 반짝 관심을 받다가 금방 잊히기를 수년째 반복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종전 이후 완전히 가족과 헤어지게 된 수백만 명의 사연은 지난 60년간 대부분 사망하며 소리 없이 묻혀 갔고, 남은 이들도 매년 수천 명씩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있다.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기억. 그 중 한 가족의 이야기를 5편 연속 내러티브 형식으로 생생히 되살려 본다. 대부분의 이산가족처럼 일제강점기, 남북분단,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이 가족의 사연도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기록으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 기자의 말

[첫 기사: "아빠, 이제 평양에서 제사음식 맛나게 드세요" ]
[둘째 기사: "이웃에게 빌린 그 돈, 평생 후회로 남았다"]
[셋째 기사: "부엉이가 울면 어머니는 잠들지 못했다"]
[넷째 기사: "주님과 장군님 오간 상봉장... "그래도 다행이다"]

2014년 2월 북한 금강산

이틀에 걸친 10시간의 만남. 할머니, 엄마, 아빠, 두 오빠를 거쳐 순옥씨에게로 내려온 수 많은 사연들을 풀어 놓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 90세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수덕씨 가슴에 쌓여온 한을 풀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

"어떻게 지냈어?"

이 한마디로 길고 긴 70년의 한 서린 사연을 서로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두 사람 다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가슴 속에 간직해 온 수백, 수천 개의 질문은 조용히 묻은 채, "고모들이 평양에 오시면 후하게 대접하겠다"는 수덕씨 아들의 너스레를 들으며 웃고,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음식을 떠먹여주고 서로 미소를 지었다. 절망과 한탄으로 보내기엔 주어진 10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그리고 2월 25일 9시, 마지막 1시간의 만남. 둥근 테이블 앞에 앉은 수덕씨는 아들이 가져온 종이가방에서 종이묶음 하나를 주섬주섬 꺼냈다.

"나중에 읽어 봐라."

수덕씨가 남긴 에세이
 수덕씨가 남긴 에세이
ⓒ 정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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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옥씨는 36장의 종이묶음을 손가락으로 차라락 넘겨본다. 단풍이 만개한 사진이 붙어 있는 맨 앞장에 오빠의 호적상 이름인 "김휘영"과 "동생들과 자식들에게"라고 쓰여 있다. 첫 페이지 "오늘은 2011년 추석날이다"로 시작되는 오빠의 글.

"아마 지금쯤이면 저 멀리 남녘땅, 내 고향에 있는 사랑하는 나의 동생들과 조카애들도 조상의 묘소를 찾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집안의 장손이라고 떠받들려 자란 나는 부모님 생전에 술 한 잔, 밥 한 그릇 대접은커녕 묘소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이 가슴이 미어지는 상 싶다."

"이제는 나이 탓인지 기억력도 낮아지고 혀가 굳어져 말을 잘 번지기가 힘들어 지나온 한 생을 돌이켜 보며 자식들에게 훗날이라도 친지들을 서로 잊지 말라고 변변치 못한 글을 여기에 몇 자 적어 놓는다."

가족의 기억, 고향의 기억이 사라질까 두려워 빼곡히 적어놓은 오빠의 90년 삶이 이 안에 있다. 순옥씨는 책자 맨 뒤에 붙어있는 수덕씨의 젊은 시절 사진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수덕씨 얼굴 옆 배경에는 '고향의 봄' 가사가 깨알같이 적혀 있다.  

이윽고 "북측 가족들 일어나셔서 밖에 있는 차량에 탑승하십시오"고 안내방송이 나오자 테이블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높아진다. 오빠는 천천히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다.

"…우리는 웃으면서 헤어지자"고 나직이 말하는 수덕씨의 눈이 온통 새빨갛다. 순옥씨가 눈가에 가져댄 손수건은 흠뻑 젖어 있다.

"괜찮아... 다음에 또 볼 날을 기다리며 우리 웃고 살자."

오빠는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며 세 여동생의 손을 일일이 꼭 잡아본다. 그리고 천천히 호텔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호텔 앞길에 쌓인 하얀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막내 순조씨는 눈이 부신지 얼굴을 찡그리다가는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말이 가족이지 사실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이라 자기를 반겨줄까, 상봉에 나오기 전에는 내심 뻘쭘했었다. "난 안 갈 거야, 오빠가 '저 사람은 누군고?'하면 어떡해?"하고 농을 하곤 했는데, 그런 막내가 막 버스에 오르려는 오빠의 손을 마지막으로 끌어당긴다.

"오빠, 100살까지 문제 없어. 걱정하지 마."

당부인지 바람인지 모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2014년 2월 25일. 마지막으로 손을 잡는 수덕씨와 순옥씨.
 2014년 2월 25일. 마지막으로 손을 잡는 수덕씨와 순옥씨.
ⓒ 김순옥 할머니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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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가족들은 버스에 타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고 가족들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남한 가족들은 너도나도 버스 옆에 매달려 창을 향해 손을 한껏 내뻗는다. 수덕씨가 버스 창가에 앉자마자 순옥씨도 팔을 한껏 뻗어 오빠의 손을 잡는다.

"오빠, 다음에 만날 때까지 꼭 살아있어야 돼."

오빠는 잘 움직이지 않는 왼쪽 입술을 씰룩쌜룩 움직여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창 너머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오빠의 입술이 "울지 마라…"하고 말하는 것 같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오빠의 힘없는 손은 이내 순옥씨의 손을 놓친다.

검은 구름 덩어리처럼 버스를 둘러싸고 통곡하는 사람들 속에서, 가족의 손을 기어이 놓친 백발의 할아버지가 하늘을 바라보며 "이건 정말 아니지!"하고 고함을 지른다. 버스가 점점 속도를 내고 시야에서 사라져 가면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통곡 소리가 눈 쌓인 계곡에 울려 퍼진다.

두 동생의 부축을 받고 휘청거리며 서 있는 순옥씨 눈에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버스 뒤를 향해 손을 살짝 흔들어 본다.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려 볼을 적시고, 그녀는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여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본다. 안녕. 우리는 웃으며 헤어지자.

2014년 4월 경북 영주

순옥씨와 두 자매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TV와 뉴스를 본 지인들에게서 쏟아지던 전화도 이제는 좀 잠잠해졌다. 북한 땅을 밟았다고 궁금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금강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오빠와의 시간이 현실이었는지 꿈이었는지 실감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이제 오빠는 더 이상 가족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유령이 아니다.

서울 종로 광장시장 한 귀퉁이의 의상실. 주인 순조씨는 옷감이 널려 있는 옷 가게 구석의 소파에 걸터앉아 오빠의 책을 또 펴 본다. 10부를 복사해서 가족들끼리 나눠 가진 이 책을 막내 순조씨는 수없이 읽어보았다. 평생 본 적도 없고 추억 하나도 없는지라 가족이랍시고 만나기도 뻘쭘했던 큰오빠인데, 이제는 큰언니 순옥씨가 어떤 마음으로 70년을 기다렸는지 알 것도 같다.

"내 나이 팔십이 훨씬 넘어 이제는 구십 살의 문턱에 있다. 흘러간 세월과 더불어 지나온 한 생을 돌이켜보며 형제들과 만나 하고 싶은 많고 많은 사연의 이야기. 한마디도 못하고 인생을 마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의구심으로 하여 마음이 불안하고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내 대에 형제들을 만나지 못하면, 나를 대신하여 자손들이라도 남남이 되지 말기를 바라는 이 늙은이의 소망을 담아 몇 자 남긴다."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전화통화라도 됐으면 좋겠는데…" 순조씨는 페이지를 넘기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수덕씨가 남긴 글을 읽는 순옥씨
 수덕씨가 남긴 글을 읽는 순옥씨
ⓒ 정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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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경북 영주, 순옥씨도 집에 홀로 앉아 똑같은 책을 펴본다. 노안 탓에 글이 잘 들어오지 않지만, 안경을 쓰고 몇 자 힘겹게 읽어 내려가 본다.

"…죽어서도 고향에 가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으면 네 어머니와 같이 있도록 하였다가, 조국이 통일되면 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묻힌 고향 땅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눈이 점점 어두워져 글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을 덮고 오빠의 사진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다가 사진 속 오빠의 주름진 얼굴을 어루만져 본다.

수덕씨와 순옥씨는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만일 순옥씨가 죽으면 둘째 찬수씨가, 둘째가 죽으면 막내 순조씨가 이 가족의 소망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막내 순조씨도 가고 나면? 그들의 자식들이 이 아픔을 이해할까? 얼굴도 본 적 없고 공유하는 추억 하나 없는 자식들의 북한의 사촌들과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 순옥씨의 대학생 손녀, 중학생 손자가 그럴 수 있을까? 잘린 손가락의 환상통 같은 그 그리움을 그 아이들이 이해할까?

상실의 기억이 없는 아이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유령처럼 홀연히 찾아와 잘려나간 손마디 끝을 꾹꾹 쑤시는 그 통증을 그 아이들이 이해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순옥씨의 세대는 이렇게 소리 없이 저물고 전쟁과 상실의 경험이 없는 어린 세대들은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의 숙원을 이어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 해맑은 아이들의 가슴 속에는 수덕씨와 순옥씨가 가졌던 한 맺힌 간절함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가슴이 문득 답답하다. 영차, 순옥씨는 몸을 일으켜 집 현관문을 연다. 4월 중순의 햇살이 눈부시게 따스하다. 꼭 요맘때쯤이었다. 72년 전 오빠가 고향을 떠난 것이. 오빠는 70년간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아직도 보지 못한다. 아마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상봉 만남에서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씁쓸한 현실을, 아마 오빠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초록색 철제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돌담 옆 흰 매화와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담장 앞 장꽃도 진홍색 꽃을 터뜨렸지만 담장 너머, 마을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소백산 정상은 아직도 하얗게 눈에 덮여 있다.

"언제나 저 눈이 녹으려는가..."

순옥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백산을 바라보다 집 앞 길을 천천히 건너 담장 하나 없이 환히 열려있는 안정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휘휘 걸어 들어갔다. 햇살이 쏟아지는 손바닥만한 운동장을 산책 삼아 천천히 걷는다.

수업이 끝났는지, 8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학생들 한 무리가 앞다투어 학교 건물을 뛰쳐나온다. 지저귀는 새처럼 까르르 대는 아이들이 할머니 옆을 뜀박질쳐 지나간다. 순옥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4월의 눈부신 햇살이 순옥씨의 하얀 머리와 아이들의 동그랗고 까만 정수리 위에서 반짝거린다. 그들을 조용히 내려다보는 소백산의 정상도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저기 쌓인 저 눈도 이제 곧 녹을 것처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난 4월부터 기자가 김순옥씨와 가족을 인터뷰한 내용, 그리고 김순옥씨의 오빠 김수덕 할아버지의 에세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산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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