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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한 국회의원이 '고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친북적이고 좌파적으로 기술됐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보수진영은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을 비판하며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켜왔다.

2008년에는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모여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를 펴냈다. 그들은 머리말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태어나는 역사적 과정에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고 말했다.

2013년에는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와 비슷한 역사인식을 담은 한국사 교과서(교학사)가 교육부 검정을 통과해 논쟁이 절정에 이르렀다. 10여 년 동안 교과서 문제로 수세에 몰렸던 진보진영은 반격에 나섰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친일·독재를 미화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언론이 논란을 더욱 부추기고, 정치권이 가세하여 '교과서 정국'이 형성됐다. 결국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학교현장에서 외면을 받았다.

이에 보수진영과 정부․여당은 한국사 교과서를 다시 국정으로 발행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정부·여당의 생뚱맞은 주장에 여론의 반응이 차갑자, 보수진영은 때 아닌 '유관순 카드'를 들고 나왔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4종이 3·1운동의 상징 유관순을 서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중앙일간지의 칼럼은 이것을 민중사관과 친북적 역사인식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교과서는 백과사전이 아니다

3·1운동에서 유관순의 활약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도 모든 교과서에 유관순의 활약이 서술됐으면 좋겠다. 18살의 나이로 민족운동의 전면에 나선 그의 활약은 교육적 의미가 크다. 유관순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냉정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해서 모든 역사교과서에 실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것은 교과서 저자와 편집부가 판단할 문제다. 3·1운동에서 유관순을 반드시 실어야 한다면,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박준채도 반드시 실어야 한다.

4·19혁명에서는 김주열도 반드시 실어야 한다. 1987년 6월 항쟁에서는 박종철, 이한열도 실어야 한다. 이러다 보면 교과서는 백과사전, 전화번호부가 될 것이다. 인물사 중심인 초등학교 교과서와 달리 '사건'과 '제도' 중심인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3·1운동 서술에 유관순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면 반드시 서술해야 할 인물이 있다. 32살 청년 '정재용'이다. 이른바 '민족대표'들이 당초 약속을 어기고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읽고 있을 때,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의 불을 붙인 인물이 정재용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군중은 집으로 그냥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3·1운동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는 유관순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한국사 교과서에 정재용을 반드시 넣어야 하는가? 

결국 보수진영은 '유관순 카드'를 지렛대로 이용해 국정교과서 부활의 불씨를 당기려 한다. '유관순 노래'를 부르며 성장한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엄밀히 말해 이런 행태는 유관순의 명예에도 흠집을 내는 일이다. 2014년 한국의 시민들이 이 정도의 바람몰이에 휘말릴 만큼 수준이 낮다고 보지 않는다.

국정교과서의 폐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지적이 있어 왔다. 여기에 나는 한 가지만 더한다. 국정교과서를 옹호하는 주장에는 '관존민비(官尊民卑)'의 관념이 들어있다. 민간 출판사보다 국가가 직접 발행하면 교과서가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이다.

교과서의 제작과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검정교과서 제도에서는 검정을 통과하기 위해, 다른 출판사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자와 편집부가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1년 동안 주말, 휴일, 방학을 반납하고 매달려야 한다. 그것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그러나 국정교과서 제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일단 써 놓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옛 국정교과서와 현행 검인정 교과서를 비교해 보면 내용의 풍부함, 문장의 완성도, 편집의 짜임새 등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국정교과서 논쟁은 국격(國格)에 관한 문제다. 소모적이고, 부끄러운 논쟁을 이제 그만 끝내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태영 시민기자는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태그:#유관순,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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