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은 K리그 뿐만 아니라 아시아축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팀이다. K리그 전통의 명문이라는 명성이야 오래된 것이지만, 최근 들어 언제부터인가 100% 토종 선수로만 채워진 스쿼드, 그럼에도 K리그와 ACL을 꾸준히 호령하는 포항 축구만의 저력은 머니파워가 지배하는 현대축구의 대세에 역행하는 돈키호테처럼 보이기도 한다.

항은 순혈주의라는 색채에서 종종 어슬레틱 빌바오(스페인)와 비교되기도 한다. 하지만 빌바오와 다른 점은, 포항이 외국인 선수를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쓰지 못한다는 점이다. 황선홍 감독은 지난해 토종선수들만으로 K리그를 제패하고도 "가능했다면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고 싶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토종선수들만의 구성이 강력한 동기부여와 응집력이라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결코 스스로 원한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지난해 포항의 K리그와 FA컵 더블 달성은 순혈 선수들만으로 이룬 최초의 성과였고, 한국축구사에 큰 이정표를 세웠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부작용도 가져왔다. 바로 '비정상의 합리화'다.

2013년의 성공은 물론 포항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합심하여 일궈낸 대단한 업적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기적'에 가까웠다. 포항 구단 수뇌부의 오판은 국내 선수들만으로도 충분히 성과를 이뤄낸 것을 보면서, 별다른 노력과 변화 없이도 똑같은 기적이 재현되리라고 기대했다는 점이다. K리그도 제패했으니 ACL 우승도 가능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는 그만큼 축구를 우습게 본 것이나 다름없다.

장기적으로 투자 없이 꾸준한 성적을 거두는 팀은 없다. 맨유(잉글랜드)같은 전통의 강호들도 전력보강과 세대교체에 실패하면 한 시즌 만에도 몰락할 수 있는 것이 프로의 세계다. 물론 현실적으로 K리그 구단들이 하나같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요즘이지만, 최근 몇 년간 포항의 행보는 투자는커녕 최소한 기존 전력을 지키려는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포항은 올 시즌도 초반부터 무서운 질주를 이어가며 K리그와 FA컵, ACL에서 모두 승승장구했다. 트레블의 가능성도 꿈만은 아니었다. 데얀의 이적 이후 초반 주춤한 서울, 압도적인 선수구성에도 들쭉날쭉한 행보리를 보인 전북 등과 비교할 때, 별다른 전력 보강 없이도 여전히 강력한 포항의 폭주는 그야말로 비정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포항은 비정상도 모자라 또 다른 비정상을 더했다. 전반기가 끝나자마자 팀내 최고의 선수였던 이명주를 중동 클럽 알 아인에 팔아넘긴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K리그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성장한 이명주는 말 그대로 포항 전력의 핵심이었다. 맨유가 시즌 중반에 웨인 루니를 팔거나, 레알이 호날두를 이적시키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포항이 비록 이명주의 이적료로 50억이라는 거금을 챙겼지만, 이는 곧 우승트로피와 맞바꿀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선택이었다, 포항이 이명주의 이적료를 당장 전력보강에 유용하게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이는 포항이 '우승을 노리는 명가'와 '선수를 팔아 수익을 올리려는 셀링 클럽' 사이에서 이중적인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장면이었다. 이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팀의 승리를 위하여 헌신해왔던 황선홍 감독과 포항 선수들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이명주만이 아니다. 노병준, 신형민, 황진성 등 팀에 오랫동안 공헌했거나 지금도 충분히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는 선수들을 포항은 적극적으로 지키려 들지 않았다. 한때 아르센 벵거 감독의 유망주 육성정책으로 상종가를 달렸던 아스널이 공들여 키운 주축 선수들을 경쟁팀들에 잇달아 빼앗기고 9년 무관의 암흑기에 시달린 것은 좋은 예다.

포항은 이명주를 떠나보내고 최근 한 달 사이에 두 개의 대회에서 잇달아 탈락했다. FC 서울과의 챔피언스리그 8강전은 지금의 포항이 보여줄 수 있는 축구의 최대치이자 한계이기도 했다. 이명주를 잃은 이후 화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 포항은 수비에 무게 중심을 둔 축구로 서울에 1, 2차전 합계 단 한골로 내주지 않고 선방했으나 결국 승부차기 끝에 무릎을 끓었다.

ACL 탈락은 포항에게는 뼈아프지만 프로스포츠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합리적인 귀결이기도 했다. 포항이 운 좋게 토너먼트에서 계속 살아남는다고 해도 이는 곧 비정상의 연장을 의미할 뿐이었다. 장기적으로 오히려 포항에도 더 나쁜 전례만 되었을 수도 있다.

황선홍 감독은 뼈아픈 석패에도 구단이나 선수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탓으로 감싸 안았다. 하지만 올 시즌 가장 공들였던 ACL에서의 허무한 탈락은, 구단의 구조적인 한계에 근본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 이번 시즌만의 시행착오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포항의 올 시즌 최대목표가 정말로 ACL 우승이었다면 결과는 분명히 실패로 끝났다는게 중요하고, 이제는 그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냉정히 말해 포항은 결코 아시아 정상을 노릴 자격도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팀이었다. 이는 감독의 전술적 준비나 선수들의 노력 여부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벌써 두 개의 우승 트로피를 놓친 포항은 이제 K리그 정규리그만을 남겨놓고 있다. 현재 포항은 전북에 이어 리그 2위에 올라있다. 하지만 최근의 경기력과 분위기라면 K리그에서도 우승은커녕 다음 시즌 ACL 출전권 확보도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만일 이대로 포항이 허무하게 빈손으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면, 그것은 단지 외국인 선수의 부재나 운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현실을 핑계로 안주하면서 손쉽게 성과를 누리려던 포항 구단의 안이함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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