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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한 교실은 유난히 떠들썩하다. 수업 분위기도, 자습하는 모습도 들떠있는 듯 어수선하다. 아이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예년의 경험으로 미루어 일주일 정도의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이럴 땐 흐트러진 분위기 다잡는다고 무작정 진도를 나가서는 되레 역효과만 난다. 지난 방학 때 겪었던 일을 자유롭게 발표하도록 하는 게 훨씬 더 교육적이다.

대다수 아이들은 집과 학원, 독서실을 '순례'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었다며, 방학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건 없다고 말했다. 굳이 찾자면, 학교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줄고, 대신 그만큼 학원에서 보내게 된다는 점뿐이란다. 한 아이는 이럴 바에야 '방학'이라는 말을 없애자고 했다. '배움을 쉰다'는 의미가 이미 무색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며 짐짓 으스댔다. 수능을 코앞에 둔 고등학생과 그 가족이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건,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는 무척 드물고 낯선 일이다. 주위로부터 곧바로 '너, 대학 포기했니?'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지만, 그 경험담을 듣는 또래 아이들 대부분의 얼굴에는 부러움이 가득하다.

고등학생이 일본에서 본 충격적인 장면 셋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라마다 역사 서술은 자국중심주의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라마다 역사 서술은 자국중심주의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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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일본 나가사키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놀란 게 세 가지 있어요. 하나는 주름치마와 흰 양말과 검정 가방 등 또래 아이들의 교복 차림이었고요. 또 하나는, 지금도 삐걱거리는 조그만 낡은 전차가 도심을 질주하고 있다는 거예요. 과거와 현재가 도로 위에서 마구 섞여있는 느낌이랄까. 무척 신기했어요.

그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경험은 그곳에서 만난 일본 학생들이 받는 역사 수업 장면이었어요.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멀리 도쿄에서 온 학생 단체 관광객들이었는데, 히로시마와 기타큐슈 등지에 있는 전쟁 유적을 답사하는 중이라 하더라고요. 그런데, 일본인 인솔자가 아이들에게 줄곧 원폭으로 인한 일본의 피해만 설명할 뿐, 평화공원이 조성된 계기와 당시의 역사 등 정작 가르쳐야 할 내용은 언급조차 없다고 발끈하셨어요.

'세계 최초의 원폭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만 가르치고 있다면서, 하마터면 말다툼이 벌어질 뻔 했다니까요. 그걸 지켜보면서 일본은 후세 아이들에게 공원의 이름처럼 평화의 가치를 강조하기보다 자기 나라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가르치려드는구나 싶었어요. 하긴 일본 국민들 대다수는 자기네가 태평양 전쟁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여긴다더라고요. 제대로 된 역사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남의 나라에 가서 배워온 셈이에요."

그 말에 아이들은 하나같이 '××이 같은 일본×들'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지만, 아이들은 되레 일본을 편들지 말라며 나무랐다. 현 정부 들어 더욱 최악으로 치닫는 한일 관계를 해결하자면, 미래세대인 학생들끼리의 역사와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는 것이 근본적이고 유일한 대안이라고 수업 때마다 줄곧 강조해왔는데, 지금 당장은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모양새다.

아이들은 국가 간 상호 교류에 앞서 제대로 된 역사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고서는 서로 만남이 이어질수록 다툼만 격해질 뿐이라는 거다. 말하자면, 생체실험을 한 731 부대는커녕 수십 만 명을 살육한 난징 대학살도 모르고,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오로지 원폭으로만 기억하는 그들과 애초 무슨 대화가 되겠냐는 식이다.

베트남 전쟁 실상 모르는 아이들... 문제는 교과서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교육은 어떨까. 그가 나가사키 여행길에서 본 모습을 반면교사 삼기 위해서는 우리의 '들보'도 살펴보는 게 도리다. 스스로를 전쟁의 최대 피해자로 규정하며, 전범자들을 애국자인 양 떠받들고 추모하는 그들의 뻔뻔함을 욕하기 전에, 우리 역사 속에서 그들과 '닮은 점'을 찾아 성찰하는 것이 우선일 수 있다. 남을 비판하자면 우리 스스로 떳떳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라마다 역사 서술은 자국중심주의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역사적 사실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이 역사학의 고갱이일지라도, 누구 말마따나, '역사에는 국경이 없어도, 역사학자에게는 조국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다분히 선동적인 언사인 '자학사관'은 순수한 의미에서 결코 있을 수 없다.

일례로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우리 역사 교과서의 서술을 들여다보자. 주지하다시피, 불과 반세기 전에 벌어진 사건으로, 국내외 사료의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관련 증언도 많이 남아 있어 기록하는 데 있어 문제될 건 거의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들어는 봤다 하면서도, 베트남 전쟁의 실상에 대해 제대로 아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역사 교과서의 기록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이다. 수능에서 거의 출제되지 않는 부분인 데다, 마치 부록처럼 교과서의 맨 뒤 단원에 적혀 있어서 아예 수업시간에 다루지 못한 채 학기가 끝나기 일쑤다. 아래는 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실린 우리나라와 관련된 베트남 전쟁 서술 내용이다. 모르긴 해도, 8종의 다른 교과서들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전투 부대를 파병했으며, 국군의 전력 증강과 경제 개발에 필요한 기술 및 차관 제공을 약속받았다. 베트남 전쟁의 참전으로 우리나라의 많은 장병이 희생되었으나, 이로 인해 건설 업체의 해외 진출과 인력 수출 등이 활발해져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시중의 백과사전과 인터넷 포털의 서술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의 요청에 의한 우리나라의 베트남 전투병 파병은 군사 및 경제개발과 관련한 조치였으며, 우리나라 군대의 현대화와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가져왔다.' 그 어디서든 '주어'는 모두 '우리나라'이며, 결론은 전가의 보도처럼 '경제 성장'이다.

우리로 인해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당해야 했던 베트남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과 반성조차 느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은 우리에게 그 어떤 피해도 입힌 적이 없고, 교류를 통해 그 흔한 이권 다툼조차 하지 않았던 나라다. 오로지 '우방국 미국의 요청과 외화 벌이 목적'이라는 이유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부끄러운 '가해'의 역사였다.

부끄러웠던 역사도 결국은 우리의 역사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취임 뒤 국사교과서 국정 전환이 급속하게 추진되고 있는 모양새다. 사진은 8월 7일 인사청문회 때 모습.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취임 뒤 국사교과서 국정 전환이 급속하게 추진되고 있는 모양새다. 사진은 8월 7일 인사청문회 때 모습.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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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요,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는 낯 뜨거운 '클리셰'를 위해, 애써 모른 채 하고 있는 역사가 어디 베트남 전쟁뿐이겠는가. 숨기고 감춘다고 그대로 덮어질까마는, 국가가 앞장서 기억하고 성찰하며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다.

우리가 지금 일본에게 요구하는 것도 이것 아니겠는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한 세기가 다 지나도록 반성할 줄 모르는 그들을 진정 '회개'시킬 수 있는 건, '원숭이'라는 조롱도, 외교관 불러다 꾸짖는 정부의 공식적인 항의도, 광장에서 일장기 불태우는 퍼포먼스도 아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역사교육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생뚱맞게 국정교과서 추진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지난해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채택이 불발된 후 예정됐던 수순이라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로 정국의 파행과 사회적 갈등이 극심한 가운데 튀어나온 것이어서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뉴라이트 교과서 불발에 따른 몽니라는 이야기부터 전교조에 대한 불신의 표출이라는 해석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역사교육에 대한 우리 정부의 국정교과서 추진 방침은 국제적 물의를 빚고 있는 최근 일본 정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각 나라의 극우파들은 서로 욕하면서 닮아간다더니, 양국 정부는 역사교육에 관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절차를 밟고 있다. 시초랄 수 있는, 보수정권이 수립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학사관'이 득세하는 것부터 닮았다.

일본의 경우, 몇 해 전 후소샤판 교과서의 채택률이 미미하자, 정권을 잡은 우익세력이 차선책으로 교과서의 집필기준인 '학습지도요령'과 '검정기준'을 강화시켰다.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정권의 통제 아래에 두겠다는 발상이다. 위안부 문제 등에 무책임한 자세로 일관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평화헌법을 수정하려는 움직임도 같은 맥락인 셈이다.

교과서 서술에 정부 개입? 일본과 똑같지 않은가

우리는 어떤가. 몇 해 전 내놓은 대안교과서가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하자, 뉴라이트는 교학사 교과서 필진으로 대거 참여했다. 그러나 교학사 교과서가 '함량 미달'이라는 조롱을 받으며 채택하는 학교가 거의 없자 느닷없이 정부는 한국사 편수조직을 꾸리겠다고 밝히기에 이른다. 역사 교과서 서술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겠다는 의미다. 일본 정부와 똑같지 않은가.

그도 모자라 정부는 아예 국정교과서 체제로 바꾸자고 하니, 일본 내 극우파보다 '한 수 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역사 인식에 관한 한, 박근혜 정부와 아베 정부는 '적대적 동지' 관계라는 세간의 평가가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파시즘적 사회는 획일적인 국가주의적 역사교육에 기반을 둔다. 정부의 느닷없는 국정교과서 추진 방침이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로 향해 가는 뚜렷한 징후로 여겨지는 이유다.

수십 년 전에 이미 파기된 국정교과서 체제로의 회귀를 두고, 일본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는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모든 학생들이 역사를 국정교과서로만 배워야 한다면,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만난 외눈박이 일본 학생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잖아요. 설마 정부의 대책이라는 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가요?"


태그:#국정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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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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