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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무개씨는 며칠 전 주식회사 국민행복기금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씨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다.

"만 원씩 96개월에 나눠 갚으세요."

300여만 원 빚의 70%를 감면해 주고 남은 빚을 96개월간 나눠 갚으라는 제안이다. 언뜻 보면 '횡재'가 분명하다. 문제는 그에게 다른 빚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빚은 어떡하죠?"라고 물으니 "채권을 확보하지 못해 어쩔 수 없다"고 대답이 날아왔다. 결국 그 수급자는 보조 받은 최저생계비로 빚을 갚아야 한다.

세금으로 빚 탕감? 은행 위한 부실채권 수익사업

정말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국민행복기금일까?
 정말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국민행복기금일까?
ⓒ 서민금융나들목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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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국민은 국민행복기금이 '세금'으로 채무자의 빚을 대신 갚아준다고 알고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행복기금은 은행이나 카드사들이 채권 회수를 포기한 뒤 대부업체에 헐값에 팔아 치운 채권으로 운영된다. 국민행복기금의 주주는 금융사들이다.

강기정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에 따르면, 행복기금은 대부업으로부터 3.4%에 채권을 매입했다. 앞선 수급자의 경우 10만 원 가량에 채권을 매입한 것이다. 그것을 감면해 주고 96개월에 걸쳐 나눠 받으면 80여만 원이 남는 장사가 된다.

강기정 의원실이 추산한 바에 따르면 행복기금은 오는 2018년까지 9000억 원 가량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이 수익은 주식회사 국민행복기금의 주주들, 즉 금융사에게 다시 돌아간다. 채무자 빚 부담 줄여주겠다던 대통령 공약은 알고 보니 금융사가 다시 채무자들을 쥐어짜 추심하는 프로그램으로 변질됐다.

기형적인 사업구조도 문제다. 공기업 캠코가 상법상 주식회사인 국민행복기금의 사업을 대행하기 때문이다. 채권단이 애초 회수를 포기하고 대부업체에 팔아치워 버린 채권을 공기업 캠코가 다시 사들이고, 추심도 대신해 주고 있다.

정작 이 사업의 제안자인 캠코는 억울해 한다. 공약을 설계할 당시 캠코의 제안은 공기업이 공적인 신용회복 프로그램을 수행함으로써 채무자로 하여금 갚을 능력 범위 내의 채무를 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이 프로젝트에 금융회사들을 참여 시켜 사실상 '비즈니스'를 할 수 있도록 탈바꿈 시켰다.

정부, 즉 금융위원회의 창조경제적 발상이다. 이제 주식회사 국민행복기금은 세금으로 최저생계비를 보조받는 수급자에게조차 추심을 한다. 앞선 사례자가 갚게 될 96만 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되는 기초생활 수급비에서 지출된다. 공기업의 돈도, 복지 예산도 주주인 금융회사로 흘러가는 어처구니없는 사업인 것이다.

서민금융진흥원? 서민약탈 진흥원!

금융위는 한발 더 나가 서민에게 '원스톱 금융서비스'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햇살론이나 미소금융 등 대출 공급과 신용회복위원회를 앞세운 채무 조정사업까지 진행하겠다고 한다. 얼핏 보면 그럴 듯하다. 햇살론이나 미소금융, 바꿔드림론 등 때마다 상황에 내몰려 즉흥적으로 기획된 상품이 여기저기 흩어져 운영되고 있어 소비자들이 자신에게 맞는 대출 상품을 찾기가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이에 서민금융진흥원이라는 한울타리 밑에서 돈도 빌려주고 오래 연체된 채권도 사서 추심하고, 채무 조정도 한다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서민금융인가?
 누구를 위한 서민금융인가?
ⓒ 서민금융나들목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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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문가들은 달리 말한다. 지난 19일 박병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 주최로 이와 관련된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 참여한 발제자와 토론자 모두 한목소리로 기형적인 서민금융진흥원의 조직형태를 지적했다. 한울타리 밑에서 성격이 다른 신용 공급과 채무 조정을 처리하는 것 또한 문제로 제기됐다. 이에 대해 금융위의 답변은 "믿어주세요"였다.

마구잡이로 빌려주고 주도면밀하게 거둔다

이는 믿음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다. 돈을 빌려주고 갚기 어려우면 다시 빚을 조정해 주는 사업. 사적인 인간관계에서야 인심 좋은 사람을 만나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금융회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재도 신용회복위원회는 조직의 명칭과 달리 채무자에게 가혹한 채무 조정을 한다. 워크아웃을 통해 법원의 파산 면책과 같이 신용상의 불이익을 최소화하면서 채무 변제를 지원하고, 정상적인 신용회복을 돕는다는 명분을 갖고 시작한 사업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금융회사들의 출자로 구성된 조직 특성상 그 명분은 이행되기가 불가능했다.

그 결과 신용회복위원회는 '사골국물 위원회'라는 불명예스런 별명도 얻었다. 가령 소득이 90만 원인 3인 가족 가장에게 소득을 부풀려 기재하게 한 뒤, 워크아웃 변제금을 50만 원으로 조정해 준다. 신용회복이 될 리가 없다.
빚 탕감? 국민 우롱하는 서민 금융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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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사람이 잘못 아니냐"는 지적은 하지 말자. 이미 돈을 빌려준 금융회사가 채무자의 신용정보를 알고도 제대로 된 평가 없이 마구잡이로 돈을 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채무자의 채무 연체를 나무랄 일이 아니라 마구 빌려주고 쉽게 포기해 채권을 헐값에 대부업체 등에 팔아치우고 있는 채권단을 비판해야 한다. 금융 소외'라는 말은 집어 치워야 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대출해 주는 사업이 아름답게 성공한 사례는 없다. 최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서민 은행 '그라민'에 대해서도 온갖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대출의 낮은 문턱이 아니라 '복지'와 '일자리'다. 금융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아무리 일해도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 취약계층이 350만 명이다. 이들에게 근로의욕을 기대할 수 있을까.


태그:#서민금융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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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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