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또 하나의 약속> 배우들과 실제 주인공 황상기씨
 <또 하나의 약속> 배우들과 실제 주인공 황상기씨
ⓒ 반올림

관련사진보기


서울고등법원에서 삼성백혈병 항소심에 대한 선고가 내려진 지 일 주일 남짓 흘렀다. 뉴스에서는 '삼성 백혈병 승소' '2심에서도 산재인정'이라는 헤드라인으로 법원의 판결을 알렸다. <또 하나의 약속>을 함께 했던 스태프들과 지인들이 소식을 접하고 승소를 반기는 연락을 해왔다. 나는 영화 <또하나의 약속>의 PD다.

실제 당사자도 아니고, '반올림'처럼 피해자들과 늘 함께 해왔던 것도 아닌 내가 이런 연락을 받아도 될까. 그래도 연락을 받을 때마다 고맙다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편치는 않았다. 아마도 그날 법정에서 판결이 내려지던 순간이 기억났기 때문일 것이다.

산재 불인정 판결에 터져 나온 탄식

지난 21일, 2심 법정에서는 1심 판결에 이어 고 황유미, 고 이숙영님의 업무상 산재를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 황민웅님과 송창호, 김은경님의 산재는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문을 읽어가는 판사의 목소리 너머로 작은 탄식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안면이 있는 활동가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는 1심 판결이 나던 순간, 환호와 기쁨이 법정을 뒤덮었다. 현실의 법정은 2심이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일부 승소를 하지 않았냐고, 이마저 뒤집혔다면 더 힘들어졌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1심으로부터 3년이라는 시간 동안 200명이 넘는 피해자가 제보를 했다. 많은 시민들과 사회단체들의 노력으로 더 많은 진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1심에서 함께 이기지 못했던 3명도 승소하기를, 그래서 다 함께 웃을 수 있기를 기대했던 사람으로서 이번 판결을 전적으로 기뻐할 수는 없었다.

기사를 찾아 보니 이번 판결에서 그나마 진일보한 측면도 있었다. 교대제 근무로 인한 과로·스트레스가 질병의 원인 중 하나로 고려될 수 있다는 점, 피해자들이 업무 수행 중 벤젠·삼염화에틸렌 등 유해요인들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아픈 노동자의 몸이 증거, 왜 자꾸 증거부족 얘기하나

그러나 노출 정도와 수위가 발병의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사측에서는 기밀이라고 자료조차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인 노동자가 어떻게 이를 증명한단 말인가? 여전히 노동자가 산재 입증을 해야 하는 현행 법제도의 문제점이 발목을 잡고 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최후 변론 장면. “하지만, 우리도 증거 있어요. 여기 있는 노동자들의 몸. 아픈 사람들. 이게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 증거란 말이에요?”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최후 변론 장면. “하지만, 우리도 증거 있어요. 여기 있는 노동자들의 몸. 아픈 사람들. 이게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 증거란 말이에요?”
ⓒ (주)또 하나의 약속 제작위원회

관련사진보기


애꿎은 피해자에게 자꾸만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는 법원에게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최후변론 대사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도 증거 있어요. 여기 있는 노동자들의 몸. 아픈 사람들. 이게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 증거란 말이에요?"

어떤 작업현장이 있었고, 그 현장에 일을 했던 사람들이 병들고 죽었다. 알고 보니 그 작업장에서는 인체에 해로운 유해물질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데도 부족한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을 제대로 입증을 하라니... 아프고 병든 노동자의 몸보다 더한 증거가 어디 있다고 자꾸만 증거가 부족하다고 하는가. 법에 무지한 사람이기에 상식에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법원',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피해자들이 항소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하다. 1심 판결이 유지되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여전히 국민과 노동자를 외면하는 국가기관의 일관성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현실에서 한걸음을 더 나간다는 것은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자회견을 끝내고 돌아가는 황상기 아버님의 얼굴에서, 다음 행보를 준비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반올림 식구들의 모습에서 희망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는 끝났지만, 현실은 계속 진행 중이라는 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고 함께 한다. 언젠가 진정한 한걸음을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황상기 아버님을 비롯한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반올림 사람들과 웃으며 멍게 안주에 소주 한 잔하고 싶다. 하루라도 빨리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윤기호 PD가 썼습니다. 이 기사는 <참세상>과 <레디앙>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반올린, #또하나의 약속, #삼성백혈병
댓글

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