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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에 태어난 아들은 요즘 한창 바쁘다.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멈춤'이란 없다. 오로지 '진격'뿐이다. 아내의 꽁무니를 쫓아 화장실 문앞까지 서성이고 아내와 내가 말을 하면 그걸 주워 듣고 따라하느라 입은 쉴 틈이 없다.

혼자서 잘 놀고 있나 싶으면 종이책을 박박 찢고 있거나 진공청소기를 애마인양 끌고 다니고 보행기가 아이거 북벽이라도 되는 양 기어 오르느라 낑낑대고 있다. 밥 먹을 때도 얌전한 법이 없어서 밥 숟가락을 입에 물고서도 티브이 광고에서 눈을 떼지 않고 몇 술 순하게 받아 먹어서 안심할라치면 벌떡 일어나 저 좋아하는 물건을 찾아 방과 거실을 휘젓고 돌아다닌다.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운동량이라 아들을 챙기다 보면 금세 체력이 바닥난다. 게다가 의사소통은 어렵고 늘상 시끄럽고 시도 때도 없이 똥을 싸지르는 아들 돌보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요즘 주말도 반납하고 밖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들의 미래를 위한 선택인지 나의 쉼을 위한 꼼수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럼에도 아들과 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누가 봐도 중노동인데 행복이라 하니 나의 분별력은 한참 떨어진 게 분명하다. 어디 분별력뿐이랴. 아들의 일이라면 도덕이나 양심도 쉽게 저버릴 수 있다. 얼마 전의 일이다.

뒤바뀐 수첩... 천천히 정독했고, 분노했다

우리 아이와 같은 반, 다른 아이의 수첩이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이다. 그 기분을 아실지 모르겠다. 남의 비밀일기가 완벽하게 타인의 실수로 내 손에 들어왔을 때의 두근거림.
 우리 아이와 같은 반, 다른 아이의 수첩이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이다. 그 기분을 아실지 모르겠다. 남의 비밀일기가 완벽하게 타인의 실수로 내 손에 들어왔을 때의 두근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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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낮 시간에 집 근처 어린이집에서 생활한다. 하원은 오후 7시 30분까지 가능하다. 그게 규정이다. 하지만 그 시각까지 아이를 마음 편히 맡기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린 자식을 떼놓는다는 불안감과 측은함도 크지만 어린이집의 눈치가 빤하다.

대부분의 원아들이 5시 전에 하원을 한다니 늦게 남는 아이가 귀한 존재일 리 없다. 이건 인지상정이다. 이 애가 집에 가야 내가 퇴근할 수 있다면 애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고울 리 없다.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엄연히 월급받는 직장인인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늦게 데려간다고 해서 애한테 해코지야 하겠는가마는 어떻게든 제 자식이 눈칫밥 먹지는 않게 하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어떻게든 가장 늦게 하원하는 꼴찌는 안 되게 하려고 무던히도 액셀을 밟았다.

그날도 과속에 끼어들기를 적절히 섞어가며 어린이집에 도착하고 보니 오후 6시 30분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다. 칭찬받을 것을 예상하는 학생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어린이집의 문을 두드렸고 애와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집에서 아내와 함께 어린이집 가방에서 짐을 꺼내면서다.

"여보, 수첩이 바뀌었어."

우리는 담임 선생님과 매일 수첩에 대고 가정 통신문을 주고 받는다. 우리는 보통 먹이지 말아야 할 음식과 투약의뢰서, 간단한 문의사항 등을 적고 선생님은 아이의 건강상태와 수면시간, 요청사항 등을 적어 보내준다.

그런데 평소보다 일찍 하원을 하는 통에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아이와 같은 반, 다른 아이의 수첩이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이다. 그 기분을 아실지 모르겠다. 남의 비밀일기가 완벽하게 타인의 실수로 내 손에 들어왔을 때의 두근거림. 이것은 숫제 설렘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남의 수첩을 보지 않는 게 교양있는 어른의 자세일 터. 그러나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살포시 들춰봤다. 그러다 찬찬히 정독했고 분노했다.

선생님은 수첩의 주인이 우리 아들을 자꾸 때린다고 적고 있었다. 그것도 남한테 맞고 나서 분풀이로 우리 아들을 때린다고 했다. 자주 있는 일인지 그 까닭을 묻고 답하는 내용이 꽤 여러 번 보였다.

"야, 너 맞고 살아? 너도 때려야지!"

말 못하고 영문 모르는 아들은 아비의 괜한 외침에 눈만 껌벅거린다. 이유불문 자식이 맞는다는데 기분 좋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거기에 우리가 철렁했던 이런 상황을 낱낱이 알려주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끝맺음 글이었다.

'보내주신 과일은 잘 먹었습니다. 저희 선생님들 간식은 ** 어머님이 다 챙겨주시네요.'

'일진의 어머니를 두둔하는 교사. 뇌물에 매수당한 교활한 공직자'. 일순간 내 머릿속에 흘러가던 영상이다.

지나친 상상이다. 두 돌도 안 된 애들이 뭘 알겠으며 선생님도 무슨 의도한 바 있었을까. 선생님은 그저 직분에 충실하게 사실을 설명하고 작은 선물에 글로 사례한 것에 불과하다. 이걸 두고 마치 우리 아들이 불의하게 홀대라도 당한 것처럼 굴 것까지는 없다.

아이를 남에게 맡기는 일

하지만 난 이미 분별력을 잃은 나약한 부모다. 교양? 도덕? 체면? 그게 다 뭐란 말인가. 우리가 교양있고 분별있게 행동하고 살면, 어린이집 선생님이 우리 아들을 더 살갑게 챙겨 준다던가? 오히려 체면과 교양 챙기느라 얌전히만 있으면 우리 애가 누구를 때리면 혼이 나고 우리 애가 맞으면 모른척 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걸 선생님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 순간 우리집 식탁에서는 긴장과 분노로 상기된 30줄의 두 어른 사이에서 어린이집에 무얼 가져다 주면 가장 반응이 좋을지 짧지만 심각한 논쟁이 오갔다. 갖다 줄지 말지는 이미 결정이 났다. 음식 잘 먹었다는 담임 선생님의 살뜰한 감사 표현은 우리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이기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토마토를 가져 가기로 했다. 장모님이 아픈 몸을 움직여서 귀한 손자 먹이신다고 애써 가꾸신 유기농 토마토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실한 놈만 골랐다. 고르는 내내 아내는 왜 이렇게 온전한 게 없냐며 투덜댔다.

"무농약이고 유기농이라고 수첩에다 꼭 적어."

이렇게 말참견을 한 나는 아들을 앉혀 놓고 팔을 크게 휘두르라는 둥 팔꿈치로 때리라는 둥 팔을 붙잡고 공격 자세를 가르치고 앉았다. 길 한쪽에서 담배 피우는 중학생과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종종걸음을 치는 소심한 인사가 말이다.

이것이 팔불출 둘이 벌인 여름밤의 촌극 전말이다. 멀리서 보면 코미디겠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 촌극을 연출하는 내내 영화 <대부>의 묵직한 메인 테마 음악이라도 깔아주면 어울렸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였다.

아이를 남에게 맡기는 일은 그 사람을 믿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어린이집 선생님을 믿는다. 내가 입은 조끼를 보고 우리 어머니께 자기 것도 만들어오라고 시키거나 촌지를 걷으러 동네 골목길을 순시하던 내 초등학교 선생님들과는 사명감이 남다를 것이라 믿는다. 다만 선생님을 믿는 마음보다 내 아이가 어디서든 사랑받고, 이왕이면 더 귀여움 받으며 자라기를 바라는 욕심이 더 큰 탓에 다른 집과 비교하고 남을 따라했다.

그래서 나는 또 의심한다. 토마토 잘 먹었다는 선생님의 답신을 받고도 전의 그 아이 수첩에 적혀 있던 살가움과는 그 무게가 다르지 않나? 이 분별없는 마음, 필시 무간지옥의 현신이라는 학부모의 번민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으로 십수 년은 남의 손에 아이를 맡겨야 할 터. 부디 내 아이가 분별없는 부모와 달리 둥글둥글 제 사람들과 좋은 인연으로 만남을 이어가길 빌고 또 빌어 본다.

덧붙이는 글 | 아날로그캠핑 블러그에도 올렸습니다.



태그:#육아, #어린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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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기업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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