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개봉한 <족구왕>은 톡톡 튀는 젊은 감성이 매력적인 독특한 청춘영화다. 일본의 학원물을 연상시키지만, 한국적 상스러움(?)이 교묘하게 흐르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족구처럼 촌스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마력의 이 작품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관객들을 단번에 매료시켰다.

<족구왕>은 저예산 독립영화로는 드물게 60여 개 상영관에서 개봉해 개봉 첫 주 8천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캠퍼스영화의 의미있는 복원

 조용한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족구왕> 포스터.

조용한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족구왕> 포스터. ⓒ 광화문 시네마

이제 막 제대한 24살 복학생 홍만섭(안재홍 분)은 청춘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연애가 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족구가 좋다. 이유는 없다. 그저 족구가 재밌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캠퍼스에 족구하는 대학생은 없다.

기숙사 선배 형국(박호산 분)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라고 충고하지만, 만섭은 아랑곳없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알바'로 동분서주하면서도 족구에 대한 만섭의 불타는 열정은 꺼질 줄 모른다.

하지만 교정에는 족구장조차 사라졌다. 대학 본부는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엄밀히 말하면 학생들의 요청으로) 족구장을 테니스장으로 바꿨다. 만섭은 '총장과의 대화'에서 족구장을 만들어달라고 건의하지만 만섭의 족구 같은 건의는 학생들의 조롱거리만 될 뿐이다.

그러나 초현실적 낙관주의로 무장한 만섭은 이에 굴하지 않고 친구 창호(강봉성 분), 의사의 권유로 체중 감량을 위해 족구하려는 과선배 미래(황미영 분)와 함께 족구장 건립을 위한 서명운동에 돌입한다. 하지만 마치 시간을 거슬러 1980년대에서 막 돌아온 듯한 (만섭은 영화도 <백 투 더 퓨처>를 좋아한다) 시대착오적인 복학생 만섭의 족구 같은 저항은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한다.

한편, 만섭은 영문학 수업시간에 대학홍보모델이며 '캠퍼스 여신'인 안나(황승언 분)에게 반한다. 하지만 안나는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의 이른바 '킹카' 강민(정우석 분)의 연인이다.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두고 방황하고 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강민은 만섭의 적수가 아니다. 외모는 물론 모든 면에서 만섭은 강민과 비교될 수도 없다. 그래도 만섭은 전혀 기죽지 않고 특유의 낙천성으로 안나에게 영문학 과제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구애(?)한다.

그리고 안나는 강민을 자극하기 위해 만섭의 구애를 흔쾌히 승낙한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강민은 만섭에게 족구시합을 제안하고 만섭은 강민과 1대1 족구대결에서 보기 좋게 승리한다. 족구처럼 구질구질한 복학생 만섭의 작은 혁명은 SNS를 통해 대학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고 이 사건을 계기로 교정에 때 아닌 족구열풍이 불어 닥친다. 그리고 마침내 체육대회가 시작된다.

 만섭은 '총장과의 대화'에서 족구장을 만들어 달라고 건의한다

만섭은 '총장과의 대화'에서 족구장을 만들어 달라고 건의한다 ⓒ 광화문 시네마


<족구왕>은 오랜만에 등장하는 '캠퍼스영화'다. 캠퍼스영화는 청춘영화의 하위 장르로 오랫동안 한국 영화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1970년대에는 하길종 감독의 전설적인 걸작 <바보들의 행진>이 있었고, 1980년대에는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이 그 계보를 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인 7월 개봉한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그해 흥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캠퍼스영화의 전통은 맥이 끊겼다. 방송에서는 <우리들의 천국>, <카이스트>, <마지막 승부>와 같은 캠퍼스 드라마나 <남자 셋 여자 셋>과 같은 캠퍼스 시트콤이 큰 인기를 끌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영화계는 대학생들에게 냉담했다. 200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엽기적인 그녀>가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캠퍼스 영화라기보다는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다.

<족구왕>은 근 20여 년 만에 다시 등장한 정통 캠퍼스 영화다. 명맥이 끊긴 캠퍼스 영화의 전통을 되살려 낸 것만으로도 <족구왕>은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 우문기 감독은 단지 장르의 복원에 그치지 않고 캠퍼스 영화의 정신까지 되살려냈다. <바보들의 행진>만큼 치열하지는 않지만,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재기발랄한 비판의식과 무모한 저항정신은 한국 캠퍼스 영화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

<족구왕>은 꿈이 사라져 버린 신자유주의 시대의 삭막한 대학 사회를 유쾌하게 비판한다. 우문기 감독은 단지 "복학생이 족구하면 왠지 재밌을 것 같아서 <족구왕>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의 시선에는 신자유주의 말기에 취업학원으로 전락해 버린 대학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자연스럽게 침전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 그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실주의는 의식되는 것이 아니라 포착되는 것이다.

만화책에서 막 튀어나온 듯 독특한 배역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럽고 매력적이다. 특히 안재홍의 능청스러운 코믹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안재홍은 빼어난 연기력으로 돈키호테처럼 시대착오적인 만화적 인물에 현실적 생기를 불어 넣었다. '제2의 조정석을 발견했다'는 찬사는 결코 과하지 않다.

<족구왕>은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의 미끈한 작법에 길든 관객에겐 마치 설익은 풋사과처럼 떨떠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예산영화의 숙명과도 같은 완성도의 결함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칠고 투박한 만듦새는 오히려 영화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청춘이란 원래 거칠고 설익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 족구 하는 것은 고래 잡기보다 어려워

유신독재가 비극적 종말로 치닫던 1975년 개봉한 <바보들의 행진>에서 영철(하재영 분)은 질식할 듯 숨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래(꿈)를 잡으러 동해로 떠난다. 그로부터 30년 이후 만섭은 그저 족구를 하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학생에게 족구 하는 것은 고래를 잡기보다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학은 군사독재 시대의 대학보다 더 암울한지도 모른다. <바보들의 행진>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철은 자전거를 타고 동해의 절벽으로 추락한다. 반면 만섭은 벤츠를 타고 동해의 해안도로를 질주한다. 하지만 만섭의 질주는 영철의 추락보다 더 절망적이다. 만섭에게는 추락할 자유조차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학에서는 고래사냥보다 족구가 더 어렵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학에서는 고래사냥보다 족구가 더 어렵다. ⓒ 광화문 시네마


아무튼, 적어도 1997년까지, 즉 IMF사태 직전까지 대학에는 꿈과 낭만, 이상이 있었다.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는 마치 대학생들만의 특권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대학 사회를 동경했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대학은 하나의 거대한 취업학원으로 재건축됐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모두 취업대학 토익학과의 동문들이다. 전공과 상관없이 거의 모든 대학생들은 '공무원'이 되려고 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시대에 가장 효율적인 생존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액 등록금과 청년실업의 공포는 대학생들의 꿈을 앗아가 버렸다. 그리고 캠퍼스의 낭만도 질식사했다.

더 이상 대학 사회는 '진리의 상아탑'도, '지성의 전당'도 아니다. 그곳에도 오직 생존경쟁의 법칙이 지배할 뿐이다. 1980년대에는 대학을 '우골탑'이라고도 했지만, 지금 대학은 '꿈의 무덤'이 되었다. 대학에서 족구가 시들해진 것도 대체로 이 무렵이다. 족구 같은 시답지 않은 취미생활로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대학생의 삶은 너무나 각박해졌다.

2008년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84%에 이르렀다.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후 다소 감소했지만 2013년에도 70.7%에 달했다. 한국은 머지않아 전 국민의 70% 이상이 대학교육을 받은 '초학벌 사회'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교육수준만큼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이 높아졌을까? 아마도 대학 진학률과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이 비례한다고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더 이상 대학에서는 진리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학교에서 단지 취업의 기술, 생존의 방법을 배울 뿐이다. (안타깝지만 그조차도 신통치는 않다)

어쨌건 '입시지옥'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물론 진학률과 반비례로 명문대, 이른바 'SKY'에 오르기 위한 투쟁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이제 누구나 가고 싶으면(물론 돈은 있어야 한다) 대학에 갈 수 있다. 대학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입시전쟁'은 '취업전쟁'으로 확전됐다. 학업능력과 상관없이 대학 졸업자의 절반 이상이 실업자나 비정규직이 되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필사적으로 '스펙'에 매달린다.

반면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인문계열의 경우 최소 300만 원, 의과계열은 1000만 원이 넘는 곳도 있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할 때는 등록금과 입학금을 포함해 80만 원 대였다) 전액 학자금 대출로 졸업하면 최소 2000만 원에서 최대 8000만 원 이상의 빚을 떠 안게 된다. 게다가 등록금은 대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다른 지역의 '유학생'이라면 그 비용은 배로 증가한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알바'와 학업을 병행한다. 과거에는 대학생들을 '예비노동자'라고 했지만, 지금은 '반노동자'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런 대학생들에게 연애와 족구는 사치일 뿐이다. 물론 학생운동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1980, 90년대 선배들처럼 혁명을 꿈꿀 시간조차 없다. 최근 학생운동이 시들해진 것도 요즘 대학생들은 개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혁명을 꿈꿀 수 있는 여유조차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단지 족구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키팅의 '카르페 디엠'은 당시 대학생들에게 복음과도 같았다.

키팅의 '카르페 디엠'은 당시 대학생들에게 복음과도 같았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얼마 전 타계한 로빈 윌리엄스는 한국의 30, 40대에게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으로 기억된다.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현재에 충실하라)을 가르쳤다. 막 입시지옥을 탈출한 당시 대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은 마치 복음과도 같았다. 그리고 키팅의 가르침대로 많은 대학생들이 현재를 마음껏 즐겼다.

하지만 지금 대학생들에게는 즐길 수 있는 현재가 없다. 그들의 현재는 불안한 미래에 저당 잡혔다.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야만성은 젊은이들의 일자리뿐만 아니라 그들의 꿈까지 약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혹은 꿈을 꿀 수 없는) 사회의 미래는 없다.

혹자는 꿈을 빼앗긴 젊은이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말한다. 꿈을 잃은 청춘들의 귀가 솔깃할 만한 조언이다. 꿈을 잃은 청춘들은 아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어른들은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청춘이라서 아픈 게 아니라 어른들의 탐욕이 청춘을 아프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청춘이 아픈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과 같은 아름다운 시절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인생의 황금기를 꿈조차 꾸지 못하고 아파하며 소비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차라리 족구를 해라. 그대들에게 더 이상 변혁이니, 혁명이니 하는 거창한 것들을 바라지 않는다.

지금은 단지 족구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이 커다란 변화의 시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혁명은 작은 저항 속에 잉태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silchun615 에 중복 게재됩니다.
족구왕 우문기 안태홍 황승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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