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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다. '세 사람이면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말인데, <한비자>의 '내저설(內儲說)'에 나오는 사자성어다. 의역하면 '거짓말도 여러 번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는 뜻이다. 위나라 혜왕(惠王)에게 방총(龐葱)이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간질하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는 당부를 했지만, 결국 혜왕은 여러 간신들의 거짓말에 넘어가 방충을 내쳤다.

'성지(聖地)'는 있을까? 없을까? 있다. '성지'의 뜻이 '종교의 발상지' 혹은 '종교와 관련된 유적이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성지는 있다. 하지만 없다. '성지'의 뜻이 '성스러운 땅'이라면 성지는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종교들이 후자를 믿고 싶어하는 신화에 붙잡혀 있다.

유일신 세 종교 '예루살렘 도그마'에 갇혀 있어

<예루살렘의 광기,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표지
 <예루살렘의 광기,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표지
ⓒ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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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 때문에 예루살렘이란 도시가 불행하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서로 도그마화(독단적 교리주의)한 성지로 예루살렘을 보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늘 전쟁 중이다.

물론 자신들의 종교 발상지나 문화유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결코 그런 싸움이 아니다. '거룩하고 숭고한 땅'을 지키려는 전쟁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광기(狂氣)'에 휩싸여 있다.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논의를 깊이 있게 다룬 책이 있다. 제임스 케럴의 <예루살렘 광기>(동녘 펴냄)가 그것이다.

저자는 이 책이 "성스러운 폭력의 여러 갈래 길을 통과하는 일종의 순례 여정"이라며 "서구세계에서 그 모든 길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 바로 예루살렘"이라고 말한다.

군사 용어에 '주동의 위치에 서다' 또는 '주도권을 잡는다'는 표현이 있다. 유일신 세 종교가 예루살렘을 놓고 벌이는 전쟁은 바로 이런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치인이불치어인(致人而不致於人)'이란 말을 썼다. 전쟁에 임하여 '이미 준비된 상태에서 준비되지 않은 자를 상대함으로 적을 조종하되 적에 의해 내가 조종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하면 주도권을 잡고 상대를 맘대로 조종하겠다는 건데, 세 종교가 바로 예루살렘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그리도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적을 나의 뜻대로 움직이는 용병술에나 써먹을 법한 일이 세 종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지금도 이런 용병술이 참으로 떳떳하게 자행되고 있어 예루살렘은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세 종교는 그들의 긴 역사 속에서 이미 여러 번 반복된 예루살렘이 성지라는 '삼인성호(三人成虎)'에 넘어갔다. 저자는 "지상의 예루살렘 위에 천년왕국에 대한 강렬한 환상을 투사할 수 있을 때 역사가 완성되리라"는 신념이 예루살렘을 열병 속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세 종교의 예루살렘 성지 신화를 아래 글이 잘 보여준다.

"유대인은 항상 내년이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고 토라를 연구하고 모세 율법을 지키며 상상으로 성소를 빚었다. (중략) 기독교인들의 신앙에서 확실한 사실은 예수는 가고 없으며 (중략)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었듯이 당신도 그곳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경건한 신앙의 중심지로 남게 된다. (중략)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무함마드가 죽은 뒤 5년이 지난 637년이었다. (중략) 헌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 예루살렘의 돌에 찍힌 선지자의 발자국은 암송으로만 신을 모셨던 이들에게 특별히 성스러운 상징으로 다가 온 것이다."(14~16쪽)

종교폭력의 정당화가 예루살렘 미치게 해

대의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아주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종교의 폭력화를 정당화하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지하드('성전'으로 번역되는 이슬람의 신앙적 투쟁)'는 그렇게 촉발된다.

1차대전 독일군 영웅 롬멜(Rommel) 장군이 1944년 장교교육을 위해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병사들에게는 자신감을 주기 위해서 새로운 정당성을 끊임없이 인식시켜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병사들의 자신감은 곧 사라져버린다. 병사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해야 하며 굳은 신념을 가지고 명령에 따라 싸워야 한다."(<손자병법> 책세상 펴냄, 73쪽)

코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의 주님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말한 것 하나로 부당하게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이 있노라 만일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불신자들이 지배한 수도원도 교회들도 유대교회당들도 하나님을 염원하는 사원들도 파괴되었을 것이라 실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돕는 자를 승리하게 하시니 하나님은 강하심과 능력으로 충만하심이라"(22:40)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수기 13:30)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전쟁을 독려하고 고무하는 자세가 거의 흡사하다.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예루살렘이 앉아있다. 종교와 폭력, 특히 예루살렘과 종교폭력, 이는 뗄 수 없는 관계다. 저자는 "예루살렘은 논쟁으로 규정되는 도시"라며, 논쟁의 기원을 베들레헴의 바실리카(예수 탄생교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세 종교의 성지 예루살렘은 "초월적 감상의 무수한 부스러기"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이 폭력의 현장이 된 것은 피를 흘리는 '희생적 제의'가 기원이다. 유대인의 번제, 기독교인의 예수의 십자가 피 흘림 등이 그렇게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로마의 예루살렘 공격인 십자군 원정이나 유대인의 포로기 이후 성전재건 등이 모두 하느님의 '조종석 리더십'에 의한 것이다.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폭력적 사디즘은 또한 기독교의 묵시묵학적 새 예루살렘의 현실적 건설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전쟁들이 처음에는 상대방을 개종시키려는 성전(聖戰)이었던 것이 차차 영토, 교역로 확보, 약탈 등으로 변질되었다.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 이후 지금은 패권국가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예루살렘 귀환의 환상과 폭력이 진행되고 있다.

"예루살렘을 연구해 혼 사드라 드코번 에즈라히는 '예루살렘의 은유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 지정학적 면적은 줄어든다. 그리고 그 신성한 도시의 경계가 확장될수록 그 행정적 도시의 경계는 폐쇄적으로 변한다' 그러니 결론은 전쟁이다. 지난 2000년간, 예루살렘의 지배세력은 11차례나 거듭 전복됐고, 거의 모든 경우 극단적 폭력을 수반했으며 그 전면에는 늘 종교가 있었다."(13,14쪽)

필자가 예루살렘에 가서 기독교 유적지를 살피고 적잖이 실망한 적이 있다. 예수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예수의 흔적으로 포장된 교회나 돌멩이들만 즐비했다. 그때 '성지(聖地)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경의 진리를 따라 예수 정신으로 산다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땅이 성지다. 예루살렘은 성지가 아니다. 종교들이 예루살렘을 두고 벌이는 '성전'이란 이름의 폭력은 더할 나위 없이 무의미하다.

덧붙이는 글 | <예루살렘광기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제임스 캐럴 지음/ 박경선 옮김/ 2014. 8./ 동녘 펴냄/ 660쪽/ 2만 5천원)



예루살렘 광기 -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제임스 캐럴 지음, 박경선 옮김, 동녘(2014)


태그:#예루살렘광기, #제임스 캐럴, #박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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