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혹시 이상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가? 고기를 파는 가게의 간판이나 전단지를 보면 소·닭·돼지가 항상 웃고 있다. 고기는 동물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웃고 있는 동물이라니, 모순이 아닌가?

동물을 이렇게 의인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연상호 감독의 블랙코미디 애니메이션 <사랑은 단백질>(2008)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식을 튀겨 파는 아버지의 슬픔

어느 여름 밤, 세 명의 자취생 재호, 경순, 홍찬이 치킨을 시켜 먹기로 한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그들은 돼지 저금통을 털어 비용을 마련한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리고, 열린 문 앞에는 중년의 돼지가 서있다. 족발집 사장인 돼지는 "치킨집에 사정이 생겨 대신 배달을 왔다"고 말한다. 치킨을 건네받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구석에 숨어있던 치킨집 사장이 "할 말이 있다"며 집 안으로 들어온다.

프라이드치킨이 된 '닭돌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닭 사장. <사랑은 단백질>의 한 장면.
 프라이드치킨이 된 '닭돌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닭 사장. <사랑은 단백질>의 한 장면.
ⓒ 스튜디오 다다쇼

관련사진보기


"이름은 닭돌이, 나이는 여덟 살. 유난히 눈이 맑고 이 못난 애비를 끔찍이도 따르던 착하디 착한 아이랍니다. 부디, 부디 그것을 알고 먹어 주시오."

세 자취생에게 배달된 치킨은 닭 사장의 아들 '닭돌이'다. 닭 사장은 생계를 위해 자식을 튀겨 파는 현실에 통곡하며 닭돌이와 행복했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이를 지켜보는 세 자취생의 반응은 저마다 다르다. 경순은 식욕을 잃은 채 닭 사장과 함께 흐느끼고, 홍찬은 닭돌이에 대한 연민과 식욕 사이에서 갈등한다.

<사랑은 단백질>의 한 장면.
 <사랑은 단백질>의 한 장면.
ⓒ 스튜디오 다다쇼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재호는 아무 거리낌 없이 닭돌이를 먹는다. 상자 안의 치킨이 한 때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꿨던 병아리였다는 사실은, 재호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에게 닭돌이는 '맛 좋은 치킨'일 뿐이다.

"야, 이 친구야! 청승 좀 그만 떨어! 닭돌이만 닭이야? 장사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그동안 튀겨다 판 건 닭 아니야?"

돼지 사장은 오열하는 닭 사장에게 면박을 주며 식구들을 생각해서 정신 차리라고 말한다. "그동안 튀겨다 판 건 닭 아니냐"고,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 있냐"고 따진다면 닭 사장도 딱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돼지 사장의 말은 개인의 비참한 현실을 당사자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화법을 닮았다.

생계 때문에 자식을 죽이는 것이 어쩔 수 없다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을 희생 시키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때문일까? 돼지 사장은 재호가 지불한 치킨값에서 100원이 모자라다며, 배를 부여잡고 신음하는 돼지 저금통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사랑은 단백질>의 한 장면.
 <사랑은 단백질>의 한 장면.
ⓒ 스튜디오 다다쇼

관련사진보기


세 남자의 자취방에서 구걸로 생을 연명해온 돼지 저금통은 방금 전 치킨을 주문한 재호에 의해 배가 칼로 찢기고 돈을 빼앗기는 수난을 당했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100원을 더 받아내려는 돼지 사장에게 저금통은 동전을 집어던지며 외친다.

"옛다. 그래, 니네 다 처먹어라! 그지 똥구멍에 콩나물 빼먹을 놈의 새끼들! 이 더러운 놈의 세상, 아이구!"

먹고 살기 위해 자식까지 희생시키는 닭 사장은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약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재호, 경순, 홍찬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다. 그들은 치킨을 주문하기 위해 저금통을 뜯어야 했다.

닭 사장을 따라 흐느끼는 경순, 갈등하다가 결국 닭돌이를 먹는 홍찬, 전혀 개의치 않는 재호. 이 세 남자의 모습은 약자들이 다른 약자의 슬픔을 대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돈을 모두 빼앗겨 괴로워하는 동족으로부터 남은 동전 한 닢까지 털어가는 돼지 사장의 모습은 타자의 고통 앞에서 어느 정도까지 뻔뻔해질 수 있는가를 묻는 것 같다.

기사 서두에 제기한, 고기집의 소·돼지·닭이 웃고 있는 이유에 대한 답은 이 작품의 관람후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넷의 후기를 보면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치킨을 먹기 힘들 것 같다'는 소감들이 눈에 띈다. 이에 반해 '먹는 것에 감정이입을 해서 불쾌하다'는 소감들도 보인다. 공감과 반감 모두, 이 작품의 등장인물이 고기집 간판의 동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의인화됐기 때문에 생겨난 감정이다.

'치느님'이라는 말, 그 불편함에 대하여

우리 사회에서 치킨은 의인화를 넘어 신격화되기에 이르렀다. 요즘 '치느님'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치킨'과 '하느님'을 조합한 이 말은 '치맥'이라는 말과 더불어 치킨 소비를 늘리는 데 일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신격화된 닭들에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고 있을까?

현실은 정반대이다. 오늘날 고기용 닭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사육·도축되는지는 '공장식 축산'이라는 키워드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닭은 역사상 유례없이 잔인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도 많은 닭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공장식 축산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조류독감이 발생하면 닭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농장에서 전염병이 발생하면 병에 걸린 닭은 물론 일정 반경 내의 닭들이 전부 몰살을 당한다.

'치느님'은 내가 먹는 치킨이 고통과 죽음의 결과물이라는 진실을 은폐한다. 생명을 빼앗는 것을 '숭배'로 둔갑시킨 이 기괴한 단어에서 공감과 연민은 찾아볼 수 없다. '치느님'에는 희화화된 죽음과 기계적이고 무감각한 소비만이 있다. 인류를 넘어 다른 종의 고통까지 공감하는 유일종이라는 인간에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이러한 언어 사용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에서 '생명존중'은 공허한 관념일 뿐이다.

끓는 가마솥에서 닭이 웃고 있는 그림은 자연스럽지 않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 복날의 삼계탕 끓는 가마솥에서 닭이 웃고 있는 그림은 자연스럽지 않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 조세형

관련사진보기


닭도 공감할 줄 아는데, 우리 인간은?

지난 2008년 4월 24일자 영국왕립학회보에는 암탉이 자신의 병아리들이 느끼는 고통에 공감한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영국 브리스톨 대학 수의학과의 조 에드가 교수는 암탉과 병아리들에게 공기 퍼프로 털이 날리게 하는 자극을 준 다음, 암탉이 지켜보는 동안 병아리들을 같은 자극에 노출 시켰다. 그러자 암탉은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안구 온도가 낮아지는 한편, 병아리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울음소리를 내는 등 스트레스 반응을 보였다.

에드가 교수에 따르면 인간의 고유한 자질로 간주됐던 공감능력이 닭에게서도 발견됐다는 것이다. 이는 인류가 농장동물과 실험동물을 어떻게 대우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농장과 실험실에서 상시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 닭들에게 동료의 고통은 그 자신의 고통과 더불어 크나큰 스트레스일 것이다.

'새대가리'라고 무시당하는 닭도 공감할 줄 안다. 그런데 지구상의 동물 가운데 최고의 공감 능력을 지녔다는 사람이 다른 이의 '인간적인 고통'을 모욕하고 짓밟는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부심이 무너진다. 우리는 과연 닭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태그:#사랑은 단백질, #블랙코미디, #치킨, #치느님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