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전쟁영화는 볼만한 영화들이다. 전투장면이 멋있어서 영화적 재미를 주든, 전쟁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애로 감동을 주든, 나름 다 진지하게 공들여 만든 영화들이다. 하지만 나에게 전쟁영화는 피하고 싶은 장르 중 하나이다.

'전쟁'을 묘사한 영화이기 때문에 전투 장면은 필연적으로 들어간다. 영화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전투는 더욱 실감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먹을수록 작아지는 내 가슴은 점점 더 생생해지는 잔인함과 비참함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그런 내가 <명량>의 흥행 소식을 접했을 때 그래도 '혹'하게 되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믿고 보는 배우 최민식이 이순신으로 분했다는 사실과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해상전투 장면이 멋있게 연출되었다는 호평이었다.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전쟁영화를 '찜'했다.

하지만 개봉 후 여기저기서 조금씩 실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만 관객 최단 시간 돌파 기록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들도 나타났다. <명량>에 대한 나의 관심도 덩달아 사그라졌고, 그렇게 <명량>은 내가 보지 않은 천만 영화 중 하나가 될 뻔 했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우연히' 보게 된 명량, 눈물 콧물 쏙 뺐다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우연히 <명량>을 보게 됐다. 별 기대도 없었다. 토요일을 맞아 면을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동네 단골 국수집에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날따라 국수집이 문을 열지 않았다. 최근 충무로에 있는 한 냉면집이 맛있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내친김에 전철을 타고 충무로로 향했다. 냉면을 먹고 가게를 나서는데 영화를 사랑하는 남편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날 리 없듯'이, <명량>을 보고 가자며 조르기 시작했다.

한 주의 피로가 쌓여있던 나는, 전쟁영화로 피로감을 더하기 싫어 완강히 거부했지만, 결국 남편에게 양보하고 영화표를 사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왕 보게 된 것, 스펙터클한 해상전투장면을 기대하며 상영관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명량>이 이토록 슬픈 영화일 줄이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눈물과 콧물이 지진해일처럼 쏟아져 나왔다. 늘 가지고 다니는 가디건 소매자락으로 간신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영화가 모두 끝나고 대성통곡을 하고 싶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나 외에는 아무도 우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꾹꾹 누르며 상영관을 나왔다. 이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남편도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고 한다.

흥행열풍만큼이나 이 영화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SNS상에서 만만치 않게 확산되고 있다. 이순신의 리더십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최민식의 연기가 별로였다 등의 평가들도 있지만, 크게 비판받는 부분은 두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영화관에서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 <명량>을 관람하기 위해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과 배우 안성기씨와 함께 입장하며 영화 포스터를 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영화관에서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그린 영화 <명량>을 관람하기 위해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과 배우 안성기씨와 함께 입장하며 영화 포스터를 보고 있다. ⓒ 청와대


<명량>을 위한 변명, '졸작'은 결코 아니다

첫 번째는 영화에 허구적 요소가 많다는 지적이다. 이 영화는 교육영화가 아니고 상업영화다. 상업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명량'의 고증은 꽤나 충실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 영화 속에 명량해전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모두 녹아있을 정도로 고증이 철저하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보충 자료로서의 가치는 크다. <명량>을 '국뽕'(국가 + 히로뽕의 신조어로 애국주의를 조롱하는 비속어)영화라며 야유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조선을 침략했던 왜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데 방점을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영화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못난 국왕과 장수들을 보여주며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교육의 관건은 얼마나 역사를 생동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그려내느냐에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명량'의 고증은 비난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개연성이다. <명량>의 등장인물들이 연기하는 행동이나 사건의 인과가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분명 개연성 부분은 <명량>의 평점을 낮추는 요인이다. 하지만 이 마이너스 요인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큰 플러스 요인이 있기 때문에, 졸작이라는 일부의 평은 지나치게 야박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영화의 개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명량>은 두 말 할 필요 없이 장대한 해상전투 장면으로 블랙홀처럼 관객을 끌어당긴다. 최민식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묵직한 연기도 영화를 단단하게 뭉치게 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명량>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이 정도의 관객수를 동원할 정도로 흥행하는 것은 나도 의외라고 생각한다. <명량>이 관객들을 끄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국가에 충성했던 장년층을 위로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이순신과 같은 '영웅'을 그리워하는 심리를 이유로 분석하는 이도 있다. 스크린 수 독과점의 결과라고 냉소하는 이도 있다.

<명량>은 단순한 이야기 구조, 가볍지 않은 주인공, 장대하되 놀이기구 타는 것처럼 눈이 빙빙 돌거나 속을 매스껍게 하는 장면이 없는 전투장면 등으로 채워졌다. 할리우드 영화나 할리우드 영화처럼 되어가는 국산 블록버스터가 아니다. 근래에 보기 드물게 어른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한국형 스펙터클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도 흥행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만으로 내가 받은 감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사십대 초반이지만 국가에 충성하며 산업화를 이룬 세대보다는 한참 어리다. 이순신과 같은 영웅을 기다릴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할리우드 영화의 화려한 CG를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토록 큰 슬픔에 빠졌던 걸까?

 '유가족의 요구를 수용하는 세월호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대학생들이 25일 오후 서울대와 경희대를 각각 출발해 도보행진으로 광화문 단식 농성장에 도착 하고 있다.

'유가족의 요구를 수용하는 세월호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대학생들이 지난 25일 오후 서울대와 경희대를 각각 출발해 도보행진으로 광화문 단식 농성장에 도착 하고 있다. ⓒ 이희훈


<명량>이 나에게 준 슬픔, '세월호' 때문이었다

세월호 시국이 내 슬픔을 설명해 준다. 이 견해가 정말로 대다수의 관객에게 적용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적어도 나는 세월호 때문에 울었다.

만약 세월호 사건 전에 이 영화를 보았다면 영화관을 나오며 권력층을 냉소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세월호 참사 이후 평소부터 지니고 있던 권력자에 대한 냉소는 깊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죽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전장으로 나가는 이순신 장군에게 감정이입이 됐다. 도망칠 곳도 물러설 곳도 없이 무심한 사람들로 가득 찬 대한민국에 갇혀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하려드는 나약한 개인,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다소 주제 넘는 일이리라. 내가 단식으로 쓰러진 유민이 아버지도 아니고 동조 단식하다 쓰러진 가수 김장훈도 아닌데 말이다. 유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 사람들의 헌신이야말로 이순신 장군이 백성을 향해 보였던 충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격군이나 백성에 가깝다. 세월호 직후 꽤 오랫동안 깊은 슬픔으로 무기력에 빠져있었다. 노란 리본만 보면 눈물이 쏟아져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광화문 근처에 살기 때문에 가끔 지나치게 되는 유족 농성장도 피해가고는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은 두려움으로까지 변했다. 마치 <명량>의 등장 인물들 사이로 퍼져나간 두려움처럼 말이다. 하지만 <명량>은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영화다. 시간의 도움을 얻어 최근 들어 절망적 슬픔을 조금씩 추스르던 나였기에 <명량>의 감동은 배가 됐다. 대규모 시위에 참가해 열심히 구호도 따라 외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을 차리게 됐다. '불가'해 보이는 싸움에 어떻게 해서든 동참하고픈 마음이다. 이 마음이 온갖 악조건을 무릅쓰고 싸우는 이순신 장군에 공감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현재 우리에게 이순신 같은 영웅은 없다. 영웅을 열망하는 심리는 때로 영웅이 아닌 이를 영웅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일을 그르친다. 우리는 최근에도 일부 사람들이 그런 상상에 빠져 무능한 이를 중요한 자리로 추대하는 것을 목격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거의 '백병전'을 치러야 하는 형국이다.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시기다.

무능한 야당 정치인들을, 정권의 선거 전략에 흔들리는 표심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너무도 무심한 이웃들을 더 이상 탓할 수 없다. 나 스스로 싸우지 않는다면, 청와대와 모든 국가권력은 이 가혹한 코미디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모든 생명은 계속 위험에 빠질 것이다. 우리의 모든 슬픔과 절망을 극단적 희망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 <명량>처럼 천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불가'해 보이지만 나도 이제 그만 울고 미약하나마 나의 힘을 보태야겠다. 어서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어 더 이상의 희생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명량 세월호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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