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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고 최윤민양이 생전에 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이 사진은 윤아양의 언니 윤아씨의 페이스북 프로필에 걸려있다.
▲ 고 최윤민양과 언니 최윤아씨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고 최윤민양이 생전에 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이 사진은 윤아양의 언니 윤아씨의 페이스북 프로필에 걸려있다.
ⓒ 최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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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동생을 잃은 언니가 '그날'의 기억을 힘겹게 복기하고 있다. 분신 같았던 동생이 왜 가족의 곁을 떠나야 했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다.

단원고 2학년 3반 고 최윤민 학생의 언니 최윤아(23)씨는 지난 8일부터 자신의 페이스북에 일기 쓰듯 동생의 이야기를 꾸준히 올리고 있다. 윤아씨가 처음 진도체육관으로 내려간 4월 17일의 풍경부터, 주검이 수습되기 전날 꿈에서 만난 동생의 모습, 시신안치소에서 본 동생의 얼굴 등을 절절하게 기록했다. 일주일 동안 보살펴 준 자원봉사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시에 체계적이지 못했던 구조 작업과 과열 취재 경쟁을 벌인 기자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섞여 있다. 또 유가족이 경찰에 막혀 국회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지난 9일에는 경찰을 향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다음은 윤아씨가 남긴 글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윤아씨의 동의를 구해 그의 글 일부를 싣는다.

"별짓 다하는 기자들... 소름이 돋았다"

 '세월호 침몰사건' 이틀째인 4월 17일 오후 전남 진도군 진도체육관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 피해자 가족들이 구조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날 피해자 가족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은 "최선을 다 하도록 모든 분들에게 부탁을 했다"며 "지금 심정이 어떤 의로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깝고 애가 타고 한순간 한순간 참담하시겠지만 희망을 잃지 말고 구조 소식을 함께 기다리시기 바란다"고 위로했다.
▲ 애타게 구조 소식 기다리는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 '세월호 침몰사건' 이틀째인 4월 17일 오후 전남 진도군 진도체육관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 피해자 가족들이 구조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이날 피해자 가족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은 "최선을 다 하도록 모든 분들에게 부탁을 했다"며 "지금 심정이 어떤 의로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깝고 애가 타고 한순간 한순간 참담하시겠지만 희망을 잃지 말고 구조 소식을 함께 기다리시기 바란다"고 위로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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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9일]
"저는 진도에  4월 17일 날 내려갔습니다. 다들 예민해져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오열을 했습니다. 아마 배안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던 때, 그때 같습니다. 경찰을 붙잡고 호소하고 오열하고 윽박지르는 사람들. 기자들에게 찍지 말라고 소리치는 사람들, 애들 좀 살려달라고 외치다 쓰러지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해 뛰어 가던 사람들...

며칠간은 계속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곳에서 전 핸드폰만 꼭 쥐고 멍하니 울기만 하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한 2~3일은 사람들이 많이 실신해서 군의관이 달려가는 모습을, 사람이 실려 가는 모습, 사람이 축 늘어지는 모습을 쉴 새 없이 보았습니다. 울면서 울분에 찬 욕설을 들으며, 기자들이 2층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끼며 그렇게 멍하니 동생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며 며칠을 버텼습니다."

[8월19일]
"진도에 간 첫날 새벽인지 밤인지 모를 시간에 아빠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동안 "엄마 안 쓰러지게 잘 챙겨라"말곤 아무 말 없으시다가 밤에 피로한 얼굴로 오셔서 허리가 아프다며 제 옆에 누우셔서, 주무시라고 이야기 했더니 아빠가 그러더군요.

"아빠는 지금 못 자. 지금 자면 윤민이가 나와.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자꾸 소리쳐."

분명 눈물을 흘리시진 않았는데 목소리는 울고 계셔서.. 전 누워서 혼자 숨죽여 엉엉 울었습니다."

[8월20일]
"이번엔 기자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고 당일 날 엄마가 팽목항에 갔는데, 체육관으로 돌아오는 차가 없어서, 어찌어찌하다 앞에 나서서 난리를 쳤던 아저씨 한명에게 태워달라고 부탁을 하셨대요. 차를 태워 준 아저씨가 차에서 자꾸 말을 걸더랍니다. 그래서 엄마가 뭔가 이상해서 유가족이냐고 물으니 처음엔 삼촌 같은 거라고 말을 흐렸고, 계속 물으니 그때서야 기자라고 했답니다.

엄마 말을 듣고 그런 기자가 몇이나 있겠어, 했습니다. 근데 저한테도 그런 기자가 오더군요. 아이들 두 명이 나왔다는 소식에 앞으로 달려 나가 담당 경찰 서장에게 묻고 나오는데, 웬 젊은 여자가 다가오더군요. 저한테 울먹이며 애들 나왔냐고 물어서 당연히 유가족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친구를 통해 그 분이 밖에서 기사를 쓰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정말 소름 돋았습니다. 기자들이 기사 쓰기 위해서 별짓을 다하는구나 싶어 구역질나고 무서웠습니다. 그러고 나니 (진도체육관) 2층 관람석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사진 찍는 기자들 모두 무섭더군요.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위에서 관찰하듯 카메라로 우릴 찍고 있는데 도망칠 곳도 없고, 찍을 게 없으면 끊임없이 채찍질당해 볼거리를 제공해야하는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이 무섭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그렇게 무섭더라고요. 진도에서 올라오고 한동안 셔터 소리, 그 비슷한 소리만 나도 전 움찔하고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들이 절 지켜본다는 망상까지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날 찍는 게 아닐까? 날 보고 있는 거 아닐까?하고 혼자 노이로제 걸린 애 마냥 움찔거리며 주위를 살폈습니다."

"청와대 보고 하던 그 사람은 사복 경찰이었다"

'세월호 침몰사고' 5일째인 4월 20일 오전 전남 진도군 군내면에서 경찰이 세월호 침몰사고 피해자 가족의 행진을 저지하자, 실종자 가족들이 도로에 앉아 망연자실하고 있다.이날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의 무기력한 대응에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청와대 행진을 계획했다.
▲ 경찰 벽에 막힌 실종자 가족 '망연자실' '세월호 침몰사고' 5일째인 4월 20일 오전 전남 진도군 군내면에서 경찰이 세월호 침몰사고 피해자 가족의 행진을 저지하자, 실종자 가족들이 도로에 앉아 망연자실하고 있다.이날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의 무기력한 대응에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며 청와대 행진을 계획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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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0일]
"진도에 있을 때 가장 무서웠던 날은 부모님들이 청와대에 가시겠다고 해 경찰과 대치했던 날입니다. 그날은 언론을 더 이상 못 믿겠다고, 아이들을 위해 유가족들이 들고 일어난 날입니다. 청와대에 가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의견이 분분해 계속 시간이 흘렀고, 전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조금 걷고 있는데 전경들 움직임이 이상하더군요. 갑자기 전경들이 우르르 더 오고 촘촘히 체육관 입구 쪽에 일렬로 서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냥 이상하다하고 체육관에 돌아가 자리에 앉았는데 앉은 지 얼마 안 돼서, 웬 아줌마 한 분이 앞에 단상으로 핸드폰을 높이 든 채 뛰어가시더군요. 이 사람 이상하다고 우리가 청와대 가는 걸 왜 보고하냐고 소리를 치며 뛰어갔고, 이상하다 느낀 가족들이 핸드폰을 들고 통화해 보고 그 사람에게 가 누구시냐고 신분을 확인했습니다. 사복 경찰이었습니다.

우리가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구나. 그렇게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희망을 잃지 말라고 했던 대통령의 말은 다 허울뿐인 말이었구나, 사실 우릴 여기 가둬두려고 그랬구나. 그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나라에 버려졌다는 배신감. 그 당시 믿을 건 자원봉사자 분과 나라뿐인데 나라에서 손을 매몰차게 뿌리친 것입니다."

[8월20일]
"매일 진도에서 힘들었다, 역겨웠다, 끔찍했다는 이야기뿐인데 거기서 버틸 수 있게 해준 사람도 있습니다. 그 먼 곳까지 찾아와준 친구들이 그러했고, 무엇보다 자원 봉사자분들에게 감사했습니다.

처음에 거기 갔을 때 부모님과 저흰 밥을 먹고 싶지 않아 밥 먹으러 갈 생각도 안하고, 울며 앉아있기만 했습니다. 그때 자원봉사 아주머니들이 음식을 들고 체육관 안까지 들어와서 먹어야 한다고 엄마 먹이라고 그렇게 말하셔서 밥을 먹은 기억이 납니다.

처음엔 그게 고마운지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 보이더군요. 거기서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 감사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 제대로 표현도 못한 것 같습니다. 많이 늦었고, 또 보실지 모르겠지만,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

[8월20일]

"진도에 있을 때 하도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많아 같은 유가족 사이에도 불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름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저흰 그걸 차고 유가족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반별로 모여 부모님들이 단합하기 시작한 때가.

학부모란 특성 덕분에 부모님들은 반별로 대표를 뽑고, 의견을 정리해 또 다 같이 의견을 합의하는 체계를 빠르게 잡았고, 그때부터 정체 모를 난동이 확 줄었습니다. 일반인이 이 정도로 체계를 잡을 동안 그 어느 곳보다 '체계적'인 나라에서 '체계적'이지 못해 아이들을 허망하게 보내고, 저희를 '체계적'으로 케어 못했다니... 전 이해가 잘 안됩니다. 정말 못 한 겁니까, 아니면 안 한 겁니까..?"

[8월21일]
"어느 날 밤, 저는 체육관에 있다가 답답해서 그 정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뉴스를 보다 갑자기 든 생각에 무서워 전 사람이 꽤 많았던 그 장소에서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윤민이가 마지막으로 나오면 어떡하지?' 윤민이는 그로부터 5일 정도 후에 저희 가족을 찾아와 주었습니다.)

지금 그곳엔 제가 두려워했던 그 일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무서워한 대로, 다른 가족도 떠나고, 자원봉사자분들도 거의 떠난 그곳에서, 이젠 언론의 관심마저 거의 떠난 그곳에서, 실종자 10명의 가족 분들이 힘겹게 하루하루 버티고 계십니다. 부디 그분들의 힘이 되어주세요."

[8월22일]
"저흰 아직 왜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희 곁을 떠나야만했는지, 그렇게 고통스럽게 아프게 가야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잊으라, 그만하라, 하지 말아주세요. 저희는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고 최윤민 양의 언니 최윤아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에서의 기억, 그리고 동생을 납골당에 안치한 이후의 일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2일에 윤아씨가 남긴 글을 갈무리한 것이다.
▲ 최윤아씨의 페이스북 갈무리 2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고 최윤민 양의 언니 최윤아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에서의 기억, 그리고 동생을 납골당에 안치한 이후의 일상 등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2일에 윤아씨가 남긴 글을 갈무리한 것이다.
ⓒ 최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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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2일]
"4월 22일 이날은 날짜도 기억이 나네요. 22일 아침 전 꿈을 꿨습니다. 꿈속에서 전 오락실에서 동생이랑 게임을 했습니다. 윤민이가 좋아하는 고기를 먹으며 우린 대화를 나눴습니다. '네가 돌아와서 다행이야. 네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언니 회사도 그만두고 그냥 집에만 있으려고 그랬어. 돌아와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자 동생은 아무 말 없이 씁쓸하게 웃더군요... 그리고 깼습니다.

깨니 현실이 보이더군요. 전 진도 체육관에 있고, 아직도 윤민이의 생사도 모른 채 기다리고 있는 그 현실이.. 전 일어나자마자 그 끔찍한 현실에 한참을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제 동생은 착하게도 23일 아침 7시 반쯤 캄캄한 어둠속에서 나와 주었습니다."

[8월23일]

"저번에 이어 말하기 힘든 이야기를 할까합니다. 4월 23일 아침, 아이들이 많이 돌아오던 시기라 그날 아침도 여러 건의 인양정보가 떴습니다. 그 땐 남자아이들이 거의 다라 실망을 하고 그냥 기대도 안하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133번 인양정보, 최윤민(97.09.10), 10시30분 팽목항 도착예정' 화면에 뜬 그 글을 보자마자 전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윤민아!!!' 그리고 아직 비몽사몽한 동생을 깨우며 윤민이라고, 윤민이 나왔다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다 짐을 싸야한단 생각에 미친 듯이 짐을 싸기 시작했고, 동생은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옆에 있던 유민이 아주머니가 이거 가져가서 어머니 드리라고 쥐어주셔서 한손엔 청심환을 든 채, 동생이랑 달려 나가 차량 좀 지원해달라고 119구조대에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동생이랑 저는 계속 울면서 다짐했습니다."

"소리 내서 울지 말자.. 소리 내서 울면 안 돼.. 엄마아빠 앞에서 소리 내서 울지 말자..."

신원 미상으로 처리될 뻔한 동생, 기가 막혔다

[8월24일]
"4월23일 팽목항. 팽목항에 도착해 울면서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는 우릴 보고 119대원 아저씨들이 가야할 곳을 알려주셔서 정신없이 갔습니다. 동생은 여성천막 안에 혼자 누워 있었습니다. 근데 너무 성숙한 여자 같고, 키도 훨씬 커보여서 처음에 윤민이 아닌가봐.. 어떡해..가족끼리 그렇게 주춤주춤 다가갔고, 얼굴을 본 아빠가 '우리 윤민이 맞아'하고 외치며 오열을 시작하신 걸 신호로 모든 가족이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의 다리를 토닥여주고, 조금 쭈글꾸글해진 손과 발을 쓰다듬어주고 부서질까 조심조심 꼭 쥐어주었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 발생 8일째인 4월 23일 오후 사고 해역에서 수습된 희생자들의 시신이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 마련된 임시 안치소로 운구되고 있다. 정부와 실종자 가족들은 합의하에 180구 규모의 임시 시신안치소를 설치했다.
▲ 팽목항에 마련된 임시 시신안치소 세월호 침몰 사고 발생 8일째인 4월 23일 오후 사고 해역에서 수습된 희생자들의 시신이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 마련된 임시 안치소로 운구되고 있다. 정부와 실종자 가족들은 합의하에 180구 규모의 임시 시신안치소를 설치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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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5일]
"4월23일 팽목항. 저희 가족은 윤민이를 따라 냉동 창고 앞까지 갔습니다. 데려가고 싶다고, 우리 애가 맞다고 말하니, 검시인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못 데려간다고 해서 기다렸습니다.그런데 검시하시는 분들이 갑자기 검시를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왜 안하냐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유가족이 회의 중이라 안한다고 하더군요.

빨리 동생을 저 추운 곳에서 데려오고 싶은데, 멀뚱멀뚱 서있는 사람들이 정말 너무 싫었습니다. 그러자 그때서야 다시 일을 하더군요... 그런데 분명 제 동생차례인데 제 동생이 기다리는 쪽으로 가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 동생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물으니 그러더군요.

"저긴 신원불명의 시신들만 있는 곳입니다."
"왜 신원불명이에요? 제가 아는데! 저기 있는데!! 이게 무슨 소리에요?!!! 신원 확인을 하고 저기 갔는데!!"
"거기에요? 그럴 리가.."
"제가 확인을 했다고요!!!!"

화가나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검시를 받았습니다. 우리 윤민이는 냉동 창고에 갇혀 신원미상으로 있을 뻔 했습니다. 이 나라 일처리가 그랬습니다."



태그:#세월호 참사, #구조, #진도, #팽목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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