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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한 요즘 교무실은 9월 수시모집을 앞둔 고3 담임의 아이들 상담으로 분주하기까지 하다. 매년 고3 담임을 연임하면서 아이들의 자기소개서와 추천서를 수정해주고, 써주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웠는데 올해는 담임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 점심시간이었다. 한 여학생이 음료수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그런데 그 여학생의 손에는 생활기록부 복사본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추천서 양식이었다.

"선생님, 1학년 때 저와 한 약속 잊지 않으셨죠?"
"무슨 약속?"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처음에는 그 아이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건네준 생활기록부를 훑어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3학년 1학기 때까지의 모든 영어교과목 성적에 빨간색 색깔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눈에 잘 띄게 하려는 듯 별표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 아이와의 약속이 무엇인지 불현듯 떠올랐다.

문득 지원자를 처음 만난 1학년 때의 영어 시간이 생각났다. 영어 시간 내내 눈치를 살피며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그 아이를 발견했다. 영어 시간에 수학문제를 푸는 그 아이의 행동에 은근히 화가 났다. 그래서 그 벌로 배우고 있는 본문 내용 스무 번을 써오게 했다.

다음 날 아침. 그 아이는 숙제를 한 노트를 들고 교무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숙제를 하느냐 피곤했는지 그 아이의 눈이 많이 풀려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아이가 해온 숙제를 끝까지 검토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본문 내용을 정성 들여 써왔으며 본문 내용을 다 쓴 뒤 맨 뒷장에는 반성문까지 적혀져 있었다. 그 아이의 진심 어린 반성문에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 알았지?"
"…."

그 아이는 대답 대신 연신 멋쩍은 미소만 지어보였다. 행여 영어 공부를 포기하지 않을까 그 아이와 작은 약속을 했다.

"영어공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하렴.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렴. 선생님이 도와주마. 그리고 힘들겠지만, 영어 성적이 상위 4%(1등급) 안에 들면 재학 중 네가 원하는 것 하나를 꼭 들어주마."
"네, 선생님."

그제야 그 아이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 매시간 최선을 다하는 그 아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2학년 때는 가르치지 않았지만, 가끔 마주치는 그 아이의 손에는 영어단어장이 쥐어져 있었다. 3학년 때 다시 만난 지원자는 1학년 때 가르쳤던 그 어떤 아이들보다 영어 실력이 많이 향상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아이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과목보다 영어공부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했다. 그 결과, 3학년 1학기까지의 모든 영어 교과목 성적이 상위 4%(1등급)에 이르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리고 대학 또한 영어와 관련된 학과를 지원하겠단다.

이 모든 것은 1학년 때 영어 선생님인 나 때문이라며 추천서를 써 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하였다. 순간,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한 그 아이가 대견스러워 보였다. 한편 이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입시에서 그 아이가 꼭 합격하기를 기도해 본다.

덧붙이는 글 | 한교닷컴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수시모집, #추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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