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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 소도시에 머무를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살던 기숙사를 나오게 되어 룸메이트와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

처음에 중개인은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서는 좀 부유한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를 권해줬는데 인상적인 건 다들 애완견을 한 마리씩 끌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애완견을 키우는 건 부자라는 뜻이에요."

도대체 왜일까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대형마트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시 11위안 정도의 애완견 간식은 허름한 식당의 밥값보다 비쌌다.

그렇게 구경하게 된 아파트는 매우 넓고 깨끗했다. 방이 총 두 개가 있고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한국TV프로그램도 나왔다. 가격은 1600위안. 지금의 환율로 한화 26만4000원에 럭셔리한 아파트에서 지낼 수도 있었으나 고민 끝에 계약하지 않기로 했다. 그 이유는 당시 우리가 봤던 아파트는 새로 지어진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집들이 비어있었는데 이는 앞으로 공사가 진행될 집이 많다는 걸 의미했다. 층간소음도 무시무시한데 공사소음이라니. 게다가 대로변으로 나가려면 공사장 옆 도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으슥하고 인적이 별로 없었다. 결국 우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 본 집은 기울어진 천장이 인상적인 6층짜리 빌라였다. 내부는 깨끗했고 가격도 1400위안이라 적당하다고 생각했으나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6층까지 계단을 오를 생각을 하니 진땀이 났다.

그렇게 몇 개의 아파트를 더 보고난 뒤 사정상 혼자 집을 구하게 되었다. 당시 원룸가격은 1000위안에서 1300위안 정도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집의 내부구조.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인테리어와 한국인이 선호하는 인테리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특히 마룻바닥이 깔린 쾌적한 원룸은 매물자체가 별로 없었다. 만약 북경처럼 대도시였다면 한국인 유학생 커뮤니티에서 구할 수도 있을 텐데 한국이 별로 없는 소도시라 중국인 중개인을 끼고 발품을 팔수밖에 없었다.

"1000위안짜리 집이 나왔어. 가볼래?"

위치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대로변과 가깝고 창고도 딸려있다고 했다. 기대에 부풀어 이번만은 계약을 해야지 했는데 막상 가보니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야진(보증금)을 내면 가구를 채워주겠노라 했지만 매서운 인상과 너무나도 빠른 말투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나에게는 집주인 역시 고려해야 할 조건 중에 하나였다. 주변의 많은 학생들이 귀국할 때 야진을 많이 떼인 걸 보았기 때문에 신중해야 했다. 야진은 주로 한 달 치 월세를 내는데 주인이 잠적을 해 아예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청소비로 대부분의 돈을 떼어가는 경우도 봤다. 심지어는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귀국하는 건데도 다음 사람을 구해줘야지만 야진을 돌려준다는 주인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내 마음에 드는 집 찾기는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대학교수가 내놓은 빌라와 한국인 유학생이 내놓은 럭셔리한 원룸 등 모두 다녀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내 집은 없었다. 맨 마지막에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 원룸은 계약직전에 조건이 바뀌었다.

"주인할머니가 계약기간을 2개월 늘릴 거래."

결국 여름 내내 집을 보러 다녔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기숙사에서 중국생활을 마쳐야 했다.

'더 이상 집을 구할 일은 없겠지?'

한국에 돌아오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이게 웬걸 이듬해 다시 캐나다로 출국하게 되었고 운명의 장난인지 또 다시 집을 구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내 방 한 칸이 이렇게 소중할 수가
 내 방 한 칸이 이렇게 소중할 수가
ⓒ 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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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금자리는 홈스테이였는데 주인과의 불화와 금전적인 문제로 이사를 결심했다. 이미 나간다고 노티스(통보)를 한 달 전에 주었기 때문에 집을 한시라도 빨리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여기는 그래도 한국인이 많으니까 괜찮겠지."

하지만 캐나다에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은 대신에 그 다음 세입자가 집 안의 가구를 이어받는 조건으로 내는 테이크오버(Take Over)비용이 있었다. 집 마다 천차만별이라 평균을 내긴 어렵지만 대충 적게는 200달러에서 700달러까지 심지어는 1100달러짜리도 보았다. 테이크오버가 처음 생기게 된 이유는 집주인이 세를 놀 때는 아무것도 없는 빈 집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사서 채워 넣은 가구의 가격을 그 다음 세입자에게 받는 것인데 이게 꽤 부담스러웠다.

결국 나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웬만하면 테이크오버가 없는 집을 구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Craigslist라는 사이트를 샅샅이 뒤졌는데 좋은 집은 전화를 걸면 이미 나가고 없었다.

세상에 집이 이렇게 많은데 내 집은 어디에?
 세상에 집이 이렇게 많은데 내 집은 어디에?
ⓒ 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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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건을 조금 완화하기로 했다. 테이크오버가 조금 저렴하고 룸메이트와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알아보기로 한 것. 그리고 조건에 맞는 집을 찾았다. 다운타운에 위치해 먼슬리패스(교통패스)를 구입할 필요가 없어 절약도 할 수 있고 두 명이 한 집을 나눠써서 월세도 저렴했다. 테이크오버 비용은 600달러.

'좀 비싸지만 교통비 절약하는 걸로 퉁 치자.'

하지만 막상 가보니 테이크오버 비용이 700달러라고 했다.

"내가 사이트에서 봤는데? 600달러였어."
"아니야. 너가 잘 못 본거야."

고작 100달러차이인데도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사이트에 접속해보니 떡 하니 600달러라고 써져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메일을 보냈지만 답은 없었고 그렇게 또 기회가 날아갔다.

발만 뻗을 수 있는 데부터 거실을 여러 명과 나눠 써야 하는 집 그리고 나중에는 시내에서 거리가 먼 2존까지 확대해봤지만 마음에 드는 곳은 없었다. 이제 딱 거리에 나앉을 판인데 내 눈에 들어온 글 하나.

'중국인 유학생이 방 한 칸을 세놓습니다.'

주소를 확인해보니 홈스테이에서 불과 10여 분 거리. 가격도 375달러로 저렴했고 테이크오버 비용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 날 찾아가 바로 계약을 했다. 집이 약간 지저분하긴 했지만 더 이상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디파짓(보증금)을 내고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두 발 뻗고 맘 편히 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집도 완벽하지만은 않았다.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 무용지물이었고 주인이 외출하면 빨래를 할 수 없어 코인런드리를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나에게 빌려준 이불도 중간에 가져가고 침낭을 건네주질 않나 내 방에 자신의 짐을 쌓아놓아 청소하기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쭉 그 집에서 살았다.

외국에서 집을 구하면서 느낀 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세입자의 설움이다. 외국에서 내 방 한 칸 없다는 게 이렇게 절박하게 다가오다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는 집이 참 많지만 내 집은 찾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역시 내 가족이 사는 나의 집이 최고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글입니다



태그:#세입자, #집,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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