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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노무현이 대통령 되면 분명 많은 게 바뀔 거예요."
"정말 그럴까?"
"그렇다니까요. 한 번 두고 보세요."
"잘은 모르겠다만, 아마 별다른 게 없을 게야."

2002년 16대 대선 전야였다. 아버지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그즈음 난 '노랑 풍선'에 푹 빠져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가져올 새 바람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다. 나는 아버지를 어떤 의무감을 갖고 설득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아버지께서는 노 후보에게 표를 던지셨다.

애초 투표 따위 뭣하러 하느냐는 식이셨다. 무엇보다 몸이 안 좋으셨다.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깨달으신 것도 있으셨으리라. 세상은 변하기 힘들다는. 그런 상황에서도 노 후보를 찍으셨다. 내 노력은 일단 성공이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아버지는 결코 변하지 않으셨다. 뉴스를 보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 보도가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저거 봐라, 그럴 줄 알았다" 하시며 혀를 차곤 하셨다.

사람 생각이 바뀌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굳어진 생각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과 말을 섞고, 생각을 바꾸게 해 설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 문화의 부재도 한 몫 한다. 우리나라에서 대화와 토론으로 지칭되는 의사소통 현장을 떠올려 보시라. 자신의 논리만 설파하는 일방적인 웅변장일 때가 많다. 타협과 양보는 없다. 생각의 변화는 난망한 일이다.

생각의 변화, 로메로 주교에게서 보다

그렇다고 생각의 변화가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른바 '극적' 경험을 할 때다. 나는 이즈즘 읽은 책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아래 '<파파 프란치스코>')에서 그 생생한 사례를 만났다.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1917~1980) 대주교를 들어봤으리라. "교회는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면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던 분이셨다. 지난 2013년 4월, 파파 프란치스코가 숱한 정치적 우려를 무릅쓰고 시성(諡聖; 성스럽고 존경할 만한 천주교 신자가 죽은 후, 교황청이 그를 성인품으로 올리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공경하도록 선언함) 절차를 재개해 다시 한 번 전 세계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순교 성인'이다.

로메로 대주교는 엘살바도르 내전이 한창이던 1980년 3월 24일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던 중 극우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평소 그는 군부독재 정권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이면, 나는 다시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서 솟아오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메로 대주교는 원래 보수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가톨릭 개혁의 단초였다. 저자는 로메로 대주교가 이 공의회의 개혁적인 방침들을 염려하는 전통주의자였다고 해석한다.

로메로 대주교는 1968년 메데인 주교회의에서 선언한 '민중의 교회로 가자'는 슬로건에 반대했다. 그에게 해방신학은 '증오에 찬 그리스도론'일 뿐이었다. <파파 프란치스코>의 저자는 로메로 대주교의 착좌식(주교가 교구장에 취임하는 의식)이 엘살바도르 민중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으로, 독재정권과 부자들에게는 '평화의 도래'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3주 뒤, 로메로 대주교에게 '극적'인 사건이 터졌다.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아길라레스 성당에 미사를 봉헌하러 가다가 암살단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란데 신부는 로메로 대주교와 생각이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오랜 시간 서로 우정을 나눠 온 사이였다.

그날 밤 10시, 로메로 대주교는 그란데 신부의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수백 명의 아길라레스 농민들이 침묵했다. 그들의 눈길은 일제히 로메로 신부를 향했다.

이들이 침묵 속에 던진 질문은 "그란데 신부처럼 당신도 우리 편에 서 주실 건가요?"였다. 이날 밤 로메로 대주교는 친구인 그란데 신부가 목숨을 바친 농민들의 얼굴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았다. … 산살바도르에서 장례 미사가 열리는 날에는 교구에서 단 한 대의 미사만 봉헌되었고, 로메로는 모든 교구민을 초대하여 탄압 위기에 놓인 모든 사제들을 도와주겠다고 공표했다. "이 사제 가운데 한 명이라도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119~120쪽)

그 뒤 로메로 대주교의 친구 그란데 신부가 암살당한 아길라레스 성당은 군용 막사가 되었다. 1980년부터 1981년 중반까지 게릴라 소탕 명분으로 군부 독재가 학살한 사람은 2만 5천여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로메로 대주교는 자신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군부독재로부터 고문과 살해, 투옥을 당하는 모든 이들의 고통을 말씀으로 증언했다.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민중과 함께하는 해방신학을 '증오의 그리스도론'으로 몰아붙였던 강경 보수주의자는 그 민중을 위해 순교하는 '예언자'가 되었다.

로메로 대주교의 변화 배경에 벗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경험만 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에게는 고통받고 압제에 시달리는 당대 민중들을 넓게 품을 줄 알았던 품성과 자질 등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의문이다. 왜 그런 품성이나 자질이 친구인 그란데 신부의 암살 사건 이전에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일까.

로메로 대주교의 사례는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예기치 못한 '극적' 경험이 있어야 우리의 굳어진 생각이 바뀐다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 바뀔 가능성은 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며칠 전 들은 한 강연에서 홍세화 선생님이, 그 대다수가 새누리당 후보들에게 표를 던졌을 것으로 규정하며 안타까워하는 밀양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반박 논리가 선뜻 떠오르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밀양의 김 할머니는 박근혜를 찍었을까

두어 달 전쯤, <밀양을 살다>(밀양구술프로젝트팀 지음)라는 책을 읽었다. 대도시의 '전기 식민지'가 된 밀양 주민들과 나눈 구술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서 올해 연세가 86세인 김말해(86) 할머니를 만났다. 100여미터나 되는 '괴물' 송전탑이 들어서는 밀양의 여러 마을 중 한 곳에 사시는 분이다.

김 할머니는 일본 시대와 대동아 전쟁, 빨갱이 시대 등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거치셨다. 그런데 그 일들은 지금 김 할머니가 겪고 있는 송전탑 싸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송전탑에 맞서는 반대 운동이 김 할머니에게 '제일 큰 전쟁'이 됐기 때문이다.

지금 김 할머니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대놓고 "박근혜 가시나, 더러븐 놈의 가시나"라고 욕을 하신다. 2012년에는 달랐다. 그 당시 김 할머니는 박 대통령에 대한 심정적인 지지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박 대통령을 떠올리며 "지 애미 지 애비 그래 죽었다고 불쌍타코 한 번 돼야 될 낀데" 하는 바람을 가슴 한켠에 품고 계셨다. 그해 대선 투표에서 김 할머니는 당신 표를 박 대통령에게 던지지 않았을까.

쌍용자동차 사태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펼칠 수 있다. 25명이나 되는 비극적인 죽음을 불러온 쌍용차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언젠가 우연히 읽은 글 한 대목이 떠오른다. 그 글에서 필자는, 이제는 해고를 당해 생존의 나락에 빠진 쌍용차 노동자들이 지난날에는 평택 시내에서 '중산층' 대접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상했다. 솔직히 말해 보자. 당시 쌍용차노동자들이 과연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겼을까. 난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본다. 잔업과 특근을 밥 먹듯이 하며 힘겨운 노동 조건 아래서 살아가는데 웬 난데없는 중산층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렇게 볼 수는 없을까. 적어도 '중산층'이라는 말이, 그렇게 열악한 조건에서 벌어들인 단순 월급액만을 근거로 일반인의 삿된 관심을 통해 생겨났을 것임을 전제로 조심스럽게 말해 본다면, 이들 중 일부의 가슴에 '나는 중산층'이라는 의식이 가끔은 떠오르기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의 결과로 새누리당과 같은 보수 정당에 표를 던진 이들도 없지 않았으리라. 최소한 부당한 강제 해고의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주변에서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이들을 무수히 만난다. 많은 노동자가, 노동을 불온시하고, 심지어 자신들을 억압하는 보수 정당에 표를 준다. 상당수의 국민들이, 말썽을 일으키거나 문제를 저지른 삼성을 일관되게 관대한 눈으로 바라본다. 삼성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면서 말이다.

정작 삼성 자신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쓰러져 간 노동자들 문제가 불거진 지 오래다. 하지만 이들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들의 절규는 삼성에게는 들리지 않는 메아리일 뿐이다. 그들 눈에 한없이 관대하기만 한 국민들은 우습기만 하다.

삼성뿐이랴.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행사나 고아원 봉사활동은 제쳐 두자. 대신 가난한 이들이나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재벌 회사는 얼마나 될까. 예의 강연에서 홍 선생님은 신자유주의의 불합리한 모토를 '이익의 사유화, 손해의 사회화'로 규정했다. 그 구조적 모순을 성찰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우리 사회의 '상위 20퍼센트'가 있기는 할까.

단언컨대, 존재가 의식을 배반하는 '하위 80퍼센트'가 변하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 미래는 없다. 불행한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그런 변화의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변화를 위한 성찰을 하기에는 모두들 너무 여유가 없다. 생존을 위한 하루하루의 삶이 너무나 버겁다. 우리에겐 정녕 가망성이 없는가.

다행히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닥칠 수 있는 예의 '극적' 경험의 확률이 그 근거다. 돌아보자. 박 대통령을 철석같이 믿은 김 할머니는 지금 '제일 큰 전쟁'을 치르고 있다. 박 대통령이 불쌍하다며 동정하던 분이셨는데 말이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은 어떤가. 설레기만 했던 평범한 수학 여행은 허구의 영화 속 장면보다 더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국가의 행태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순종하기만 한 '착한' 아이들이었는데 말이다.

백주에 참혹한 시신이 돼버린 윤 일병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가 죽은 곳은 다른 곳도 아니고 공평무사한 규율이 강물처럼 흘러야 하는 군대였다. 그는 적군인 북한 인민군 손에 죽음을 당한 게 아니었다. 유사시 전장에서 적군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할, 목숨보다 소중한 전우로부터 죽음을 당했다.

'밀양'은 밀양에만 있지 않다. 청도에도 있다. '세월호'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 있던 '세월호'는 어느새 서울 잠실과 군산 새만금에도 출몰했다. '육군 28사단' 또한 속초에만 있겠는가. 우리는 새누리당의 '대선 잠룡' 남경필 경기도지사 아들이 근무한 부대에서조차 '육군 28사단'을 본다.

우리는 변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 변해야 한다. 아니 변했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 대한민국 곳곳이 '밀양'이자 '세월호'이며 '육군 28사단'이다. 그 모든 곳에서 날마다 터지는 '극적'인 경험을, 우리는 이미 할 만큼 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4.16 세월호 참사, #육군 28사단, #밀양 송전탑 싸움, #로메로 대주교, #생각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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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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