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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닐 때 방학과제물인 '탐구생활'을 받는 날은 설렘과 부담감이 공존하는 날이었다. 방학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펑펑 놀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탐구생활'에 빼곡히 담긴 과제물들은 책을 열어 보기가 무섭게 어깨를 짓누르곤 했다. 개학을 일 주일 혹은 이틀 남기고 어머니에게 회초리 맞아가며 한 달 치 일기를 쓰고, 그림 그리고, 탐구생활 문제 풀다가 곯아떨어진 때가 떠오른다. 물론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말이다.

그 때는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아니, 우리 형제만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우리 반에서 공부 1등하던 반장도, 예쁘고 새초롬한 부반장 여자아이도 벼락치기 이었단다. 그만큼 긴 방학이란 것이 사람의 긴장감을 무장 해제시켜 버리는 데에는 탁월했던 것 같다.

오늘 저녁,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과거의 나와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똑바로 쓰라고! 이거 몰라?"
"……. 이렇게…… 요?"

"아까 했던 거잖아, 또 알려줘?"
"……."

회초리가 올라간다 싶더니 아이가 화들짝 놀라 뒤로 피한다. 아내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해봐, 이거 보구."

아이는 엄마 눈치를 보며 공책에 연필을 꾹꾹 눌러 글씨를 쓴다. 나도 거들었다.

"서동아, 거기는 띄워 써야지. 받침에 'ㄱ' 이 들어가야 하는 거 몰라?"

아들 입장에서는 엄마의 불같은 눈길에서 구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큰 소리로 한 마디 거드는 아빠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ㅎㅎ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개학이 이틀 남은 걸. 다른 친구들은 다 해 오는 숙제를 우리 아들만 빠뜨리면 안 되지 않는가?

초등학교 1학년 방학 숙제는?
▶ 일주일에 3일 이상 그림일기 쓰기  ▶ 체험활동 작성하기  ▶ EBS 청취하고 과제 풀기  ▶ 견학활동 그림 그리기 2점 ▶ 시 받아쓰기 ▶ 독후감 쓰기 등등.

우리 어릴 적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만 초등학교 1학년에게는 좀 부담이 되지 않나 싶다. 매일 매일 조금씩 해 나갔으면 부담이 없는 것을 일주 일만에 몰아치려니 가족 모두에게 짐이 되긴 한다.

그림일기, EBS 청취하고 숙제하기, 체험활동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 받아쓰기, 독후감 쓰기 등. 역시 방학 숙제는 몰아치기가 제맛이다.
▲ 방학숙제하는 아들 그림일기, EBS 청취하고 숙제하기, 체험활동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 받아쓰기, 독후감 쓰기 등. 역시 방학 숙제는 몰아치기가 제맛이다.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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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아이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한글 익힘이나 수학 이해도가 좀 부족한 편이라 일일이 단어 불러주고 받침 글자 확인하고, 덧셈 뺄셈도 다시 설명해줘야 하고. 아이 숙제가 아니라 부모 숙제라는 말이 딱이다.

그림일기는 날짜를 소급해가며 작성했다. 그래도 당일 날씨와 함께 그림과 일기 내용은 사실에 근거하였으니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시 받아쓰기도 하루 만에 몰아쳤다. 독후감 쓰기도 내가 하루 휴가를 내서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썼다. 견학활동하고 그림 그리기는 독후감을 다 쓰고 함께 작성했다.

EBS 청취하고 과제 풀기! 이게 난관이었다. 결국 아이엄마가 '다시 듣기'를 통해 아이와 같이 청취하고 메모해 놓은 다음, 그걸 보며 어렵게 어렵게 풀었다. 회초리 앞에 놓고 아이 눈물 쏙 빼놓은 채 말이다. 이제 체험활동 작성하기만 남겨 놓고 있다.

개학은 이틀 후다. 마지막 체험활동 작성은 토요일 정도에 하면 된다. 그래도 방학 동안에 여러 군데 돌아다녀서 주제 잡기는 어렵지 않다. 거의 일주일 동안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아이 엄마가 퇴근하고 저녁만 되면 아이 숙제에 매달렸다. 도대체 누구 숙제인지, 누가 학생인지 모르겠다. 어떤 때는, 아내나 내가 마치 도망갈 구석으로 쥐를 몰고 가는 고양이 같다. 방학 숙제하려 책상에만 앉으면 위축되는 우리 아들. 방학숙제에는 관심도 없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는 눈치다. 아직 1학년이라 반드시 해야한다는 의무감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거겠지?

나도 학생시절에 매번 방학이 시작될 때마다 굳은 다짐을 했었다.

'이번엔 탐구생활 초반에 다 풀어버려야지'

해 놓고는 하루 이틀 지나다 보면,

'어휴, 내일 하지 뭐'

혹은,

'외가댁에 다녀와서 해야지' 등등의 핑계 거리를 찾는다.

결국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또다시 일주일 남겨놓고 나의 심각한 가슴앓이가 시작된다. 정작 숙제는 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엔 병이 도진다. 달력에 표시된 개학일은 마치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처럼 초조하게 다가온다.

이 두려움과 공포감은 개학 전 날 최고조에 이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난 모든 걸 포기하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초월한 성인군자로 탈바꿈된다. 그리고 개학 후, 종아리 몇 대 맞고 자리에 앉으면 그렇게 마음이 시원하고 가벼울 수가 없다. 세상 모든 것이 내 것이고, 하늘은 그렇게 푸르고 바람은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행복했다.

사람의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며, 또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시간안에서 변모할 때 잘 드러나는 것 같다. 아는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을 본 적 있니?"
"뭔데요?"

"고속도로에서 였단다. 기름이 떨어져서 경고등에 불이 들어 온 후에도 휴게소가 나오지 않아 20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다. 똥 싸기 직전의 심정으로 들어가 휴게소에서 기름을 가득 넣고 나오며 바라본 보름달이 가장 아름답더라."

맞는 말이다.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이런 이치로 본다면 행복이나 슬픔이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거나 일희일비하게 하는 잣대는 아닐 것이다. 이는 비단 학생들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이 겪는 고민과 갈등은 사회인이 되면서 그대로 확장되고 더 넓은 외연을 가질 뿐이다.

대한민국 학생들의 방학이 끝나간다. 방학 숙제나 성적으로 인해 바싹 타 들어가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방학을 알차게 보내 가벼운 마음으로 개학을 맞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이여! 개학을 두려워 말자. 행복은 바로 그 후에 온다.


태그:#방학숙제, #초등학교 방학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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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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