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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어 강이 얼어붙자 압록강은 길이 되었다. 그 길로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왔다.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1636년 12월 9일에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한양에 도달했고, 12월 16일에는 왕이 피난 가 있던 남한산성에 닿았다.

청군이 개성을 지날 때쯤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인조(仁祖)와 조정의 대신들은 14일 밤에 강화도로 피하려 했다. 그러나 청군에 의해 길목이 봉쇄되어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청나라 군대가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서 남하하는 과정에서 조선군과의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다. 그것은 청군이 워낙 기동력이 뛰어난데다 전투보다는 행군에 주력한 것도 있지만 조선의 군대가 싸우기보다는 달아나기 바빴던 탓도 있었다. 병자호란 때 실제로 공격과 전투를 거쳐서 함락된 곳은 강화도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청나라가 쳐들어 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9년 전(1627년)에도 청나라가 쳐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와서 청군에 대항했다. 바로 눈앞에 강화도를 두고도 함락시킬 수 없었던 청나라는 병자호란 때는 선발대를 먼저 보내서 인조의 강화행을 막았다. 강화도로 향하던 인조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항전했다. 하지만 섬 자체가 요새일 뿐만 아니라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강화도와는 달리 남한산성은 장기전을 대비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 

 김포 문수산에서 바라본 강화도.
 김포 문수산에서 바라본 강화도.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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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한강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서 삼국시대 때부터 주요 접전지였다.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 때는 고려 조정이 강화로 천도를 해서 39년 동안 버텼던 곳이기도 했다. 또 임진왜란 때도 왜군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했던 곳이었고,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피신을 했지만 후금군(後金軍)이 함락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강화도는 금성탕지(金城湯池)였다. 그러나 이 천혜의 요새는 병자호란 때 짓밟히고 말았다.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에서 항거하고 있는 인조와 조선의 조정을 압박하기 위해 세자빈과 대군이 있던 강화도를 쳤다. 전쟁이 난 지 한 달 보름여만인 1월 22일에 강화도가 무너지자 조선은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1월 30일에 항복했다. 임금(인조)은 오랑캐(청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이나 무릎을 꿇었다.

삼전도의 치욕보다 더한 강화도의 참혹함

우리 역사에서는 이것을 뼈아픈 치욕으로 그린다. 하지만 청군에게 도륙을 당한 강화도의 백성들이 겪은 참혹함은 그 어디에 비할 바가 없을 정도였다. 정양(鄭瀁, 1600~1668)이라는 사람이 쓴 <강화도 함락 참화 수기>라는 책에는 그때의 참상이 가감없이 그대로 담겨 있다.

청군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고 또 바다에 뛰어들지만 피할 곳은 없었다. 사람들은 자결하려고 칼로 목을 찌르고, 바위에서 뛰어내렸으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과 삼전도가 치욕의 공간이었다면 강화도는 참혹한 죽음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난리가 나자 인조는 체찰사(전시 총사령관)인 김류의 아들 김경징을 강화 검찰사(강화 경비사령관)로 임명했다. 당시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이었던 김경징에게 최후의 보루인 강화도를 지키라는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 

 김포 문수산에서 바라본 강화도 동북쪽 연미정 부근입니다. 바다 오른쪽 위로 북한도 보입니다.
 김포 문수산에서 바라본 강화도 동북쪽 연미정 부근입니다. 바다 오른쪽 위로 북한도 보입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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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를 향한 피난 대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십 리에 걸쳐 있었다.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비롯한 권문세도가의 피난 행렬 뒤에는 백성들이 따랐다. 행차는 한양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강화도 앞에 도달했다. 그러나 코앞에 강화도를 두고도 멈춰야만 했다. 강화해협이 그들의 발길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거센 물살이 흐르는 바다가 있었다. 김포와 강화 사이의 바다는 폭이 불과 600~800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물살이 거센데다 바닷가는 질퍽한 갯벌이 펼쳐지기 때문에 건너오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더구나 배를 댈 수 있는 나루터는 갑곶나루 밖에 없어서 피난민들은 바다를 앞에 두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다를 건널 배도 없었다. 아니 배는 있었지만 탈 수가 없었다. 검찰관인 김경징이 가솔(家率)들과 50여 바리나 되는 짐을 먼저 들여보내기 위해 나루터에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그 때문에 피난민들은 수십 리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심지어 세자빈조차 이틀 동안이나 추위에 떨며 기다려야 했다. 

검찰관이라면 행렬을 호위해서 건넨 후에 자기 식솔들을 건너게 해야 마땅한 일인데도 그는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분간하지 못했다. 황급하여 미처 그렇게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일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포 성동나루에서 건너편에 있는 갑곶나루를 건너다보았다. 검회색 바닷물이 흐르는 바다 너머에 손에 닿을 듯이 강화도가 있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아무 때고 강화도를 오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이곳에서 발을 멈춰야만 했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김포와 강화가 사이좋게 나란히 있습니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김포와 강화가 사이좋게 나란히 있습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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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쳐들어왔던 몽골도 이 바다 앞에서 멈췄고 정묘호란 때 후금군도 이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그들에게 강화도는 감질나는 섬이었을 것이다. 빤히 건너다보이는데도 들어갈 수 없었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겠는가. 오죽하면 몽골의 장수가 "병사들의 갑옷을 벗어 쌓아도 저 바다를 건널 수 있겠다"면서 한탄을 했겠는가. 

열녀,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키다

그렇게 철옹성 같았던 강화도였건만 병자호란 때 함락되고 말았다. <택리지>에서 "배를 댈 수 있는 동쪽의 갑곶진만 잘 지킨다면 외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던 강화도였다. 그러나 김경징은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를 믿고 방비를 소홀히 했다. 청나라 군이 집을 헐어 배를 만들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도 겨울이라 물이 얼어 배들이 다닐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며 경계를 게을리 했다. <연려실기술>은 "갑곶에서 연미정까지 몽둥이를 들고 지키는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탄했다.

전쟁이 난 지 한 달 보름여가 지난 1월 21일 밤에 청군은 배 한 척을 띄워 갑곶진의 수비상황을 염탐했다. 아무런 저항이 없자 다음 날 아침에 40여 척의 배로 강화를 쳐들어왔다. 대비를 소홀히 했던 강화도는 맥없이 무너졌고 청군의 칼날 아래 도륙을 당하고 능욕을 보게 되었다. 

조선은 유교의 성리학을 통치 사상으로 받아들여 내세웠다. 충신과 효자 그리고 열녀(한 남성을 끝까지 섬기며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자결을 하는 여성을 일러 부르는 말)를 칭송하며 백성들에게 의식화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와 의식화 교육 속에 자란 여성들은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로 여기게 되었고, 그래서 그러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열녀적 행동'을 했다. 남성들에게 충(忠)과 효(孝)가 강요된 것에 더해 여성들에게는 정절(貞節)이라는 덕목이 하나 더 추가되어서 그들의 의식을 옭죄었다.

병자호란 때 여성들의 열녀적 행동에 대해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배를 탔던 여성 3명은 적병이 엄습하자 서로 껴안고 물에 빠졌다. 토굴에 숨어있던 여인은 적병이 불을 질렀는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 죽고 말았다….'

 썰물이 들어 물이 빠지면 질퍽한 갯벌이 드러납니다.
 썰물이 들어 물이 빠지면 질퍽한 갯벌이 드러납니다.
ⓒ 문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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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이 물에 뛰어들거나 높은데서 뛰어내리거나, 또는 목을 매거나 칼로 찔러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강간을 당해 정절을 잃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욕을 당한 자신을 바라볼 사회적인 시선, 즉 윤리 도덕적인 폭력에 대한 공포가 더 컸을 것이다. 유교의 성리학에 비춰 봤을 때 '열녀 의식'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지만 정조를 잃은 여인에 대한 멸시와 손가락질은 잔인하기까지 해서 여성들은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역사 속에 부끄러운 이름, 경징이풀

사대부가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일반 여염집의 여인들조차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천민의 아내와 첩들도 자결했다. 당시 갑곶나루 앞바다에는 적에게 욕을 보지 않으려 바다에 뛰어든 여인들의 흔적인 하얀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있는 낙엽처럼 둥둥 떠내려갔다.

1906년에 강화의 한 선비가 쓴 심도기행(沁都記行)이란 기행문집에는 그 당시의 열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丁年二月一州空      정축 이월 난리 통에 모든 고을 비었으니,
烈婦爭投水火中      열부들이 다투어 물과 불에 몸 던졌네.
北虜亦驚相顧語      오랑캐도 놀라서 서로 보고 말하기를,
海東不以漢南風      조선의 풍속은 중국과는 다르구나.

여성들이 이렇게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던 것과는 달리 목숨을 구걸하며 오랑캐의 시종이 된 남자들도 있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이란 책에는 강화도에서 죽은 여인 15명의 혼령이 모여 한 맺힌 사연을 토로한다. 당시 영의정이자 체찰사(총사령관)였던 김류의 부인도 자결했는데, 그는 무능한 아들(김경징)을 강화 수비의 총책으로 맡긴 것을 한탄한다.

적에게 목숨을 구걸한 남편을 둔 여인과 오랑캐의 종이 되어 상투를 자른 남편을 둔 여인도 등장한다. 또 적을 피해 물에 빠져 죽었지만 남편이 정조를 의심한다며 토로하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마니산의 바위굴에 숨어 있다가 적을 피해 투신해서 으깨진 몰골로 원한을 토로하는 여인도 있다. 

"나라의 수치에 의(義)에 죽은 충신은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이다"라고 기생인 마지막 여인이 순절한 여인들을 찬양한다.

 물이 빠진 갯벌에 발갛게 모습을 드러낸 나문재.
 물이 빠진 갯벌에 발갛게 모습을 드러낸 나문재.
ⓒ 박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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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징은 역사 속에 부끄러운 이름을 남겼다.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나 벼슬이 한성판윤에 이르렀던 사람이었음에도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추국을 당했고 책임을 물어 평안도 강계로 귀양 보내어졌다가 끝내 사약을 받았다.

원한을 달래줄 손길이 아쉽다

부끄러운 그의 이름은 대를 이어 강화에 전해 내려온다. 갯벌에 있는 염생식물인 나문재를 강화도에서는 '경징이풀'이라고도 부른다. 미처 바다를 건너지 못해 청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죽어가던 사람들은 '경징아, 경징아' 울부짖으며 그를 원망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붉은 나문재를 보며 경징이풀이라고 불렀을까.

강화개펄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나문재를 보면 역사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일신의 안위만을 위했던 김경징에게서 백성을 도외시한 당시 지배층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해 백성들을 적군의 칼날 아래 몰아넣었던 임금과 신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뒤돌아보고 참회하기보다는 김경징이라는 한 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운 것은 아닐까. 비록 그가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해 강화도가 도륙이 되었다 할지라도 먼저 임금이 하늘과 백성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빌었어야 했다. 하지만 삼전도에서의 치욕만 강조될 뿐 백성을 사지에 몰아넣은 임금의 반성과 참회는 볼 수 없다. 

부끄럽고 참담한 역사는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평안하지가 않다. 그리움과 회한에 찬 한숨이 반세기가 넘도록 남북을 휘돌아가고 있고, 지난봄부터는 원한에 찬 울음소리가 남쪽 바다를 맴돌고 있다. 그 모든 원한과 한탄을 달래주고 풀어줄 큰 손길이 아쉽기가 한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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