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5일, 16일 1박2일 일정으로 강화도 동진포를 찾았다. 동진포는 고려시대부터 육지와 교동도를 이어주던 나루였다.인조 7년(1629년) 교동도에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돼 본격적으로 교동읍성이 축조된 후 관 주도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 

동진나루에서
 동진나루에서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이곳은 한양과 인천, 해주로 통하는 관문으로 중국으로 가는 하정사신이 교동으로 와서 바닷길의 일지를 살핀 후 서해로 나갔다. 사신들의 임시 숙소인 '동진원'이라는 객사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교동팔경 중 하나로 동진송객이라는 이름으로 손님을 맞고 배웅하는 광경이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엔 한양으로 향하는 조운선과 물자를 운반하던 화물선의 중간기착지로 수 많은 배들이 이용하던 항구였지만, 이제는 배들이 찾지 않아 사람들의 오감이 사라졌다.

지금은 오가는 배 한 척 없는 한적한 나루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 때까지는 배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했다던 이곳. 작은 안내 표지판이 하나 있긴 했지만 나루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닌 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시멘트로 곳곳을 개보수한 흔적이 보였지만 절반 정도만 수리했을 뿐, 썰물 때 얼굴을 드러낸 아랫부분은 조선 시대 때 쌓아 놓은 돌들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동진포 주변을 한참 거닐면서 같이 간 동료들과 사진을 찍기도 하고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돌멩이 하나하나가 정이 가는 곳이지만, 황량한 분위기가 안타까웠다. 돌아 나오는 길에 대추토마토를 파시는 아주머님을 만나 토마토를 산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대룡시장으로 이동했다. 벌써 오후 3시 30분이다. 작은 가게에 들려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먹고 서울로 버스 머리를 돌렸다.

교동도
▲ 대추토마토 교동도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길이 막힐 것을 염려해 우회로 빠져 강화읍 월곶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누정인 '연미정'으로 갔다. 고려 시대 누각인 연미정은 팔작지붕 겹처마로 10개의 기둥을 주초석위에 얹은 민도리 집이다. 꽤 운치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면적은 약 40제곱미터다. 월곶돈대 맨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개풍, 파주, 김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 옆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사실 내 눈에는 정자보다는 양쪽에 서 있는 느티나무가 더 눈에 들어왔다. 보기에도 좋고 쉬어가기에도 적당한 곳이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바람도 시원하다. 정자가 위치한 강화 월곶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이곳에서 다시 물길이 갈라져 한 줄기는 서해로, 다른 한줄기는 정자 아래를 지나 인천 쪽으로 흐른다. 그 모양이 제비 꼬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전해진다.

성곽 위에 올라서서 바깥을 보니, 한강과 임진강이 정말 좋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 당당히 서 있는 연미정의 모습이 전쟁에서 방금 이기고 돌아온 강한 조선 장수의 동상처럼 느껴진다. 이곳은 강화를 대표하는 십 경 중 하나로 주변 풍광이 절경이다. 보름날 달맞이도 최고라고 한다. 옛날에는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린 다음, 만조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썰물 때는 물이 빠져나가는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물살이 센 곳이다.

앞의 한강과 임진강 하구
▲ 연미정 앞의 한강과 임진강 하구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가을이다
▲ 코스모스 가을이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이곳은 과거에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 출입에 제한이 있었으나 2008년 민간인통제구역에서 해제되어 현재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다. 나는 연미정에서 바라본 강 하구의 모습에도 반했고, 큰 느티나무에도 반했다. 아울러 길 옆에 가을을 준비하는 양 피어있는 코스모스에도 반했다. 정말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것이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하다.

1박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재미있고 유익한 강화 여행이었다. 그러나 문화유산을 둘러보기 위한 여행이라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다. 우선 교동도 읍내리 40여 개의 비석군이다. 교동도에 선정을 펼친 관리들에 대한 비석을 모아 둔 것이다. 그러나 수십 기의 비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흡사 묘소처럼 보여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관리의 편의를 위해 모아 놓았다지만 울타리 속에서 방치된 모습이었다. 교동읍성 남문도 마찬가지. 일제 강점기에 폭풍우로 누각이 무너진 뒤 현재는 홍예만 남은 채 방치돼 있다.

연미정
▲ 강화읍 연미정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장기적으로는 읍성 전체를 복원해야겠지만, 최소한 문루 정도만이라도 복원을 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부서진 동진나루의 돌들, 안내판만 있는 연산군의 귀양지 등은 너무 아쉬운 풍경이었다. 또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인 '훈맹정음(訓盲正音)'의 창시자인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 터가 안내표시도 없이 밭과 비닐하우스로 만 남아있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강화의 천주교인들이 모여 당시 강화까지 방문, 복직투쟁을 격려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사진이나 성명서 등을 현판으로 제작해 설치하는 것도 의미 있어 보인다.


태그:#강화도, #교동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연미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