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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중 한 장면. 가깝고도 먼 것이 시댁 식구 아닐까.
 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중 한 장면. 가깝고도 먼 것이 시댁 식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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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죄송합니다만 전 그럴 수 없어요. 대윤이는 제가 키웁니다. 아직 어린 대윤이를 놔두고 일할 순 없어요."

시어머니는 호통을 치며 말씀하신다.

"니는 시어메가 뭐로 보이냐? 나가 서울 올라가믄 잘 키워준당께. 느그들은 돈이나 벌먼 쓰지 않것냐."
"아니에요.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입니다. 제가 잘 키울 수 있어요."
"시어메 말은 안 들키냐? 그럼 대윤 아범이랑 한번 잘 살그라. 난 느그들 꼴도 보기 싫은께!"

꿈을 꿨다. 정말 너무나도 생생하게 시어머니와 말다툼을 하는 꿈이었다. 2004년, 결혼한 지 3년쯤 됐을 때. 아들 대윤이는 세 살이었고 추석이 다가올 때쯤이었다. 눈물까지 흘리고서야 일어났다. 추석에 시댁을 가야 하는데 정말 꿈에서처럼 말씀하시면 어떡하나 두려움이 생겼다. 사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산다는 것은 내게 버거운 일이었다. 시부모님은 연세도 많으시고 너무 어려웠다.

추석 연휴를 보내러 시댁으로 내려갔다. 시댁 마루에 않아 시부모님과 형님, 아주버님이 있는 자리에서 송편을 빚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정말 어머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대윤 어메야, 어멈은 일 안 할 낀가? 시방 어메들은 다덜 일한당께. 아그들은 시애미한티 마낀당께. 니 아그는 나가 서울서 봐줄 텐께."

그 말씀에 가슴이 철렁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어머님 전 대윤이 돌볼게요. 일은 대윤이가 크면 할게요."

잠시 적막감마저 들 정도로 가족들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어머님이 호통을 치셨다.

"어디 눈을 동그랗게 뜬당가? 니는 우리 모시기 싫으냐? 나가 아그 봐준다는디, 어디 말대답을 따박따박 하는겨!"

난 서러워서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어머님은 제가 내려올 때마다 저를 힘들게 하세요."

어머니는 내가 빚던 송편을 팽개치시더니 화를 내셨다.

"넌 송편 맨들지 마! 어서 놔! 놓고 가!"

손이 덜덜 떨리고 무서웠다. 어머님의 날벼락 같은 한마디 때문에 속이 상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난 정말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가지고 시댁을 나와버렸다. 남편은 내가 뛰쳐나가는걸 보고 따라 나와서 나보고 집에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터미널로 가서 버스에 올라타는데 창문 너머로 시댁 식구들이 나를 찾아 헤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창문 커텐으로 얼굴을 가렸고 버스는 출발했다.

무섭고 어렵기만 했던 시어머니, 10년이 지난 지금은...

송편을 빚다가 시어머님의 불호령을 들었다
 송편을 빚다가 시어머님의 불호령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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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랗게 질려버린 얼굴로 친정에 갔다. 친정엄마는 놀라셨고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추석날 가족들이랑 잘 지내다 오지, 니가 그런 말이랑 행동을 한 건 잘한 게 아니야! 속상하지만 니가 말을 잘했어야지, 대윤 엄마야!"

친정엄마의 말을 듣고 참았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엄마 무서워. 우리 시어머니 힘들어!"

엄마는 날 이해하며 안아주셨다.

"대윤 엄마가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도 시댁에서 올라오지 마."

추석 연휴를 다 보내고 남편이 왔다.

"너는 왜 그렇게밖에 말을 못해? 우리 엄마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냐?"

내게 다그치는 남편도 나 없는 동안 시골에서 잔소리를 꽤나 들은 것 같았다. 시댁 편만 드는 남편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님과 다툰 사건은 일단 그렇게 마무리됐다. 서울에 올라와 대윤이를 봐줄 테니 나보고 일을 하러 나가라는 시어머니 말씀은 결국 듣지 않았다.

얼마 뒤, 시어머니 칠순이 있었다. 어머님은 서울로 올라오셨다. 난 지난 일은 다 잊은 것처럼 애써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했다. 꽃게장, 굴미역국, 물김치, 불고기, 어리굴젓, 잡채 등 여러 가지 음식을 해서 한 상 부끄럽지 않게 차려드렸다. 그리고 어머님께 살갑게 대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어머님은 마지못해 웃으시는 것 같았다.

그 뒤로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어머님은 여든이 되셨다. 어머님의 예전 성격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유해지신 걸 느낀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가고 얼굴엔 깊은 주름과 검버섯이 늘어가는 어머님을 뵐 때마다, 난 부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시길 바란다. 어머님은 우리가 시댁에 내려가면 직접 만드신 김치며 매실즙이며 쌀이며 우리 차에 바리바리 싸넣어 주신다.

"대윤 엄마야 내가 맹드는 찬거리 잘 먹그랭. 내뿌리지 말고 맛나게 먹그랭. 쌀 부족하믄 전화해라."

시댁을 떠나 서울로 올라올 때, 문 밖에 나와 손을 흔들며 배웅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180° 달라지신 어머님. 이제는 어머님을 너무 어려워했던 나 자신도 달라졌다. 안부전화로 시부모님을 걱정하는 며느리가 됐다. 여든의 나이에도 혈압 약을 드셔가며 고추농사, 쌀농사를 지으신다는 말씀에 안쓰러워진다.

"어머님 부디 건강하시고 대윤이 대학 가고 장가갈 때까지 오래오래 사세요. 사랑합니다."


태그:#송편, #시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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