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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의 고구저수지는 상당히 크고 넓었다. 버스를 잠시 세우니, 정거장 앞에 지역 특산품인 새우젓과 고구마 전분, 녹두 등을 파는 노점이 있어 물건을 사기도 하고 구경도 했다. 그 사이 다른 일행들은 저수지의 유래와 쓰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척지가 많은 곳이고, 강이 크게 없는 지형이라 생각보다 저수지가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40개 정도가 몰려 있다
▲ 교동도 비석군 40개 정도가 몰려 있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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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버스는 다시 교동 읍내리에 있는 작은 작은 비구니 사찰인 '화개사(華蓋寺)'로 이동했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교동도 지역에서 발견된 비석 40여개를 모아둔 비석군이 있었다. 문화재 유실이 많은 시대라 그런지 한 곳에 모아둔 것이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갈 곳 없는 문화재의 슬픈 현실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화개사는 고려 때 창건되었으며, 목은 이색이 이 절에 잠시 머물며 독서를 즐겼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정운 스님이 다시 불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건물로는 작은 법당이 있고, 유물로는 옛 절터에 팔각원당형 부도 1기가 있다.     

작은 비구니 사찰
▲ 화개사 작은 비구니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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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크지는 않았지만, 소나무 등 조경수가 이쁘고, 절에서 많이 보이는 상사화 등이 곳곳에 피어 있었다. 특히 본당 앞에서 바라다 보는 풍경은 바다를 한 눈에 잡을 듯이 좋았다. 멀리까지 바다와 섬들이 눈 앞으로 성큼 들어오는 듯 했다.     

길이 좋다
▲ 화개사 가는 길 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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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에도 도보로 걷는 길이 많이 생겼는지, 절 입구에서부터 오솔길에 좋고 꽃과 나무가 많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나는 내려오는 길에 작은 버섯들을 발견하고는 이리저리 만져보고 냄새도 맡아 보았다. 먹을 수 있는 버섯인 것 같았지만, 자신이 없어 만지고 구경만 하고는 돌아셨다.     

흉내만 내다
▲ 버섯 따기 흉내만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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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등선을 넘어 조금 더 가니 '교동향교(喬桐鄕校)'다. 향교의 좌측 입구에 작은 '성전약수터'가 있어 바가지에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워낙 수량이 적고 천천히 물이 나와 불편하기는 했지만, 향교의 대성전 아래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고,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하여 기다려 조금 마시면서 한 숨을 돌렸다.     

교동향교
▲ 우물 교동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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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어진 향교로, 고려 충렬왕 때 12년(1286) 원나라를 다녀오던 길에 문성공 안향 선생이 공자상을 들여와 직접 문묘를 세우고 봉안한 전통있는 향교라고 한다.     

기념 촬영
▲ 교동향교 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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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로는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제기고 ·주방 등이 있다. 대성전 안에는 5성·송조2현 및 우리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 중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80년 복원되었다.     
대성전
▲ 교동향교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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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있을 것은 전부 있고, 특히 약수터가 좋아서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어 우리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는 면사무소 인근에 있는 '대룡시장'으로 갔다.

이발소
▲ 대룡시장 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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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500m도 되지 않는 아주 좁은 골목을 끼고 미장원, 세탁소, 떡방앗간, 신발가게, 이발소, 시계수리점, 잡화점, 지물포, 약방, 주점, 다방, 식당 등 없는 것 없이 다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곳이다.   

다방에 가다. 김금호 사무국장이랑 같이
▲ 대룡시장에서 다방에 가다. 김금호 사무국장이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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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지난 몇년 동안 드라마와 영화, 신문, 잡지 등에 자주 등장한 관계로 그 명성을 알리기 시작하더니, 최근 교동대교가 개통된 후로는 주말이면 3,000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것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원래 교동도의 중심은 이웃한 읍내리였는데 전쟁 직후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실향민들이 집단 이주하게 되면서 이들이 한 두명씩 장사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60년경에 대룡시장이 교동의 중심으로 안착했다.

70년 지붕 풍경
▲ 대룡시장 70년 지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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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쉽게도 교동도와 시장 주변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지붕을 스레이트로 바꾼 것이 마지막 변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곳 가게들은 아직도 도시의 상가들이 샷터를 내리고 문을 닫는 것과 달리 그 옛날 나무 판으로 된 넓은 변지짝으로 문을 열고 닫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와 김금호 사무국장 등은 시장 통을 천천히 걷다가 2층에 작은 다방을 발견하고는 무조건 들어가 보았다.     

낡은 소파에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연탄 난로, 작은TV, 낡은 선풍기에 쉰살은 되어보이는 마담까지, 서울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냉커피를 한잔씩 시켜 마셨다.

다방에서 경재 누님과 차 한잔, 모두 6명 3만원을 물었다
▲ 대룡시장 다방에서 경재 누님과 차 한잔, 모두 6명 3만원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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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침 주머니에 돈이 없어, 밖에 어슬렁거리던 경재 누님을 불러 강제(?)로 한잔 더 마시게 하고서는 한 잔에 5천 원 씩이나 하는 커피 값 전부를 지불하게 했다. 부끄럽지만 당당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미안했지만, 지갑을 들고 오지 않은 죄로 어쩔 수 없는 폭력(?)을 행사하고 만 것이다. 다음에 밥을 한번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방에서 나와 약방과 방앗간, 이발소를 둘러 보았다. 정말 50년 동안 시간이 멈취진 이곳을 둘러 보니, 오랫 동안 가보지 못한 어린 시절 어머님과 같이 다니던 영주의 후생시장 생각이 났다.     

개발이라는 논리보다는 나름 오래된 정취가 좋은 점도 있는 것 같다. 요즘 이곳에는 나름 오래된 정취에 감동한 수많은 외지인들이 방문하여 지역의 농산물을 엄청나게 많이 사간다고 한다. 다리가 생겨서 동네가 시끄러워진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득증대에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가 보다.     

국밥
▲ 점심 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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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우리 일행은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관광객이 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물건을 구매하고자 노력을 하여, 천연염색을 한 손수건이며, 약을 사기도 하고, 떡과 묵 등을 사서 먹기도 했다. 나도 좀 더 두리번거리다가 시장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국밥을 먹고 있는 가운데, 오후시간 동안 교동도를 안내하기로 약속한 감리교 교동교회 구본선 목사님이 오셨다. 지역에서 17년 동안 평균 연령 여든 살이 되시는 어르신 20여명을 상대로 목회를 하고 계시는 분으로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정거장 같은 작은 교회의 목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한국교회 처음 예배당>이라는 책을 쓴 유명 저자이기도 했다.     

구 목사님
▲ 교동교회 구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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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개를 마친 구 목사는 우리와 같이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구 목사님이 일하고 있는 교동교회로 모두들 주마간산으로 살펴보았다. 이어 지난 1933년 두 번째로 세워진 상룡리 달우물의 교동교회로 갔다. 종탑이 갖춰진 교회의 모습으로 건립 당시에는 초가였지만, 1970년대 양철지붕으로 개량을 했다고 한다.  

3번째 교회다
▲ 교동교회 3번째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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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오랫동안 민족운동이 넘쳐났던 강화와 교동도 지역 교회를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억압에 힘겨웠던 교동교회는 1933년 읍내를 벗어나 신자들이 많던 상룡리로 예배당을 이전했다.

두 번 째 교회 건물
▲ 교동교회 두 번 째 교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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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초대교회 건물을 그대로 옮겨 복원한 예배당이 한국기독교유적 가운데 으뜸이라고 거론되고 있는 지금의 예배당이다. 남녀가 유별하도록 들어가는 문이 달리한 특별한 예배당이다.     

종탑
▲ 옛 교동교회 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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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용하고 있는 세번째 교동교회가 건축되기 전까지 60년 정도 사용된 건물로 한 때는 피난민들이 증가하여 이웃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지만, 1979년에는 내부 분열로 교회가 갈리기도 했던 곳이다. 하지만 1991년 갈린 교회가 다시 통합되어 현재의 세번째 예배당을 마련했다.    

이 교회의 초기 신자로는 맹인들을 위한 점자인 '훈맹정음'을 개발한 박두성 선생이 교회 앞에서 살면서 어린 시절 교동교회에 다니다가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타지로 나갔다고 한다.     

교동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에 하나이고, 역사와 건축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문화재 등록을 준비 중에 있는 곳이다.        

이어 다시 버스를 타고는 교동도의 원도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동읍성'의 남문으로 갔다. 성의 둘레가 430m로 작은 읍성인 이곳은 원래 조선 인조 시대에 와서 돌로 성을 쌓았고, 고종 시대에 와서 문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남문의 홍예
▲ 교동읍성 남문의 홍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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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재 문은 하나도 없고, 남문의 경우 누각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으로 무너지고 반원 형태의 홍예문만을 1975년 복원했다고 한다. 성 안쪽에는 동헌이 있고 연산군의 적거지(謫居地) 겸 철종의 잠저 터, 황룡우물, 교동교회 첫터 등이 남아 있다. 아무튼 현재는 10여 채의 집들이 들어와 있을 뿐 과거의 영화는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초라한 폐사지같은 모습이다.      

구한말까지는 읍성 주변에 학교와 예배당 등이 있어 사람도 많았고,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이 있어 군인들도 상당수 거주했지만, 지금은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는 조용한 시골풍경 그대로다.

앞 바다 픙경
▲ 교동읍성 앞 바다 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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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터가 좋은 곳에 자리를 해서 그런지 언덕 위에 올라 바라보는 바다의 풍광은 과히 최고였다. 이곳에 근무하던 통어영 군사들이 매일 바라다 보면서 기상을 높이던 곳일 것이다.    

연산군 귀양지
▲ 교동도 연산군 귀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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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연산군이 마지막 두 달을 살다간 귀양지 아래에 있는 첫 교동교회 앞 우물터로 갔다. 작은 우물은 석재 2단 높이로 그 우물 한가운데로 죽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말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이 1899년 설립된 첫 교동교회터다. 당시 감리교는 교회를 세우면 반드시 학교도 같이 설립 운영했다. 오른쪽에 교회 건물, 왼쪽에 4년제 동화학교가 있었다고 전한다.     


태그:#교동도, #강화군,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대룡시장, #교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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