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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의 살아 있는 날의 클래식 <어떻게 미치지 않겠니?> 표지
 김갑수의 살아 있는 날의 클래식 <어떻게 미치지 않겠니?> 표지
ⓒ 오픈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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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니 도저히 그대는 설득시킬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겠구나. 그대의 가슴 속에 있는 심장은 강철로 되어있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나로 인해 여러 신들이 노여움을 얻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다."(<일리아스> 중에서)

아킬레우스의 칼에 맞아 죽어가며 헥토르가 한 말이다. 세상에는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설득시킬 수 없는 사람이 더 많다.

그 중에 한 사람이랄까, 김갑수! 이름은 왜 이리 촌스러운지. 하지만 그가 뱉어놓은 언어들의 성찬 속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광기가 묻어있다.

미치다 혹은 미치지 않다

그래서 그랬나. 그가 요즘 써 세상에 내다놓은 책 이름이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오픈하우스 펴냄)이다. 그리고는 '김갑수의 살아있는 날의 클래식'이라고 군더더기를 붙여놓았다. 죽은 듯이 파묻혀 들어야 들을 수 있는 게 클래식 아니던가. 그래서 그랬나 보다. '살아있는 날'이라고 쓴 것이. '죽은 듯 들었지만 살아 있기에 평을 말한다'고 말이다.

가끔 종편에서 본다. 지금과는 아주 안 어울리는 70년대 장발을 하고(가끔은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앉아 세상의 모든 잡담을 다 늘어놓는 사람, 난 그렇게 그를 처음 만났다. 그에 대한 총평은 '입심이 세구나'였다. 참 많이도 아는 사람이긴 했지만, 참 말도 많이 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참 얼굴이 넓적하고 둥근 사람이긴 했지만, 그가 클래식을 듣고 글로 짓고, 말로 평을 하는 사람인지는 몰랐다.

종편에 등장하는 그의 가슴에는 훈장처럼 '문화평론가'라고 적혀있었다. 문화평론가라니 어떤 문화를 평하는가.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궁금해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가 클래식을 듣는 사람이었다. 클래식뿐인가. 팝송도 듣는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에서는 클래식만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말이다. 록 음악을 듣고 평하면 딱 알맞은 품새다. 그의 인상은. 근데 생경스럽게 클래식음악이라니.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시인이다. 참으로 대단한 예능보유자 아닌가. 거기에 입심도 대단하다. 대부분 입심이 세면 글 솜씨는 좀 딸리는 편이어야 하는데 그는 그렇지가 않다. 거기다 음악과 문학을 두루 공유하다니. 김갑수, 그는 그랬다. 굳이 얌전한 단어들을 구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 할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어서 글이 몹시 맛깔스럽다.

헥토르의 말대로 그는 강철 심장을 갖고 있다. 설득하기는커녕 설득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독자를 죽여 놓고 신들의 노여움을 독차지할 것 같은 사람, 이 책에서는 김갑수의 음악에 대한 광기가 묻어난다. 밥을 굶어도 음악CD는 사 모으는 사람, 그래서 기인이란다면 기인이다.

기인반열의 이외수 작가의 <칼>(해냄 펴냄)을 손에서 놓은 지 얼마 안 돼 다시 기인반열의 책을 손에 들어서 그런지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를 읽었지만 난 전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하하. 이젠 괴상한 것들이 통상이 되었다고나 할까. 기괴한 것도 접하면 접할수록 정이 드나 보다.

'자기망실'을 체험하게 한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는 세 묶음으로 엮여있다. '추억의 음악, 일상의 음악'이란 첫 묶음에서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부터 쇤 메르크의 <크리스마스 음악>에 이르기까지, 두 번째 묶음인 '레알 작곡가 뒷담화'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골드 메르크 변주곡>에서부터 쿠르트 바일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묶음 '죽이는 연주가들'에서 로빈스타인과 호르비츠로부터 메레디스 몽크에 이르기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서비스 차원의 부록이 들어있다. 부록에는 '내 인생의 음악'이란 제하에, '정말로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음악', '지난날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 '잘 모르는 음반들', '당대 최고의 목소리'까지 자신만의 톤으로 여러 음악과 연주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엑서더스, 머지않아 만날 몽골은 탈주의 환상을 안겨준다. 강박으로부터의 탈주, 시간의 치차로부터의 탈주, 좁아터진 울타리로부터의 탈주, 카뮈가 말했다. 여행은 자기를 만나는 일이라고.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나라는 환멸, 너라는 절망은 너무 익숙하고 지긋지긋하다. 잠시라도 나를 떠나고 싶다. 바라건대 태곳적 공간에 압도돼 자아망실의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되기를!"(31, 32쪽)

몽골 여행을 앞두고 저자는 그리도 자기를 떠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독자로 하여금 자기망실을 체험하도록 이끈다. 비록 몽고 여행은 아니더라도 기꺼이 생활을 떠나, 곪아질 대로 곪은 현실을 떠나 음악으로 침잠하도록 이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인용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든 희망을 포기할지어다!"

어차피 희망이 없는 현실인데, 포기할 희망이 없는데, 어찌하다 이순신까지 무덤에서 달려 나와 대한민국을 들쑤셔놓는 서글픈 현실인데, 그리로 들어가 봄 직하지 않은가. 음악의 세계로 말이다. 그렇게 저자는 독자를 음악의 지옥으로 이끈다. 대책 없이 끌려 다니다 보면 '아, 음악이 읽히는구나!' 소리 지를 것이다. 그러니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슬픔으로 기뻐하라!

고독하게 살았다. 젊은 날들을. 가난과 친구하며 살았다. 아직 뜨기 전에. 50kg 이하여야 문화인일 수 있다는 지인의 말에 인이 박힌 사람으로 살았다. 저자는 자신 있게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고 말한다. 그의 첫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렇지 않다. 그게 너무 기가 막히도록 밉다. 그래서 저자는 필립 글래스의 <흐느적거리는 나날>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쓴다.

"광화문을 멀리 벗어나 이제는 흐느적거리는 나날을 살지 않는다. 슬픔에 깨물리지 않는다.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생의 함량이 줄어든 탓이다. 슬프다."(48쪽)

인생의 함량이 줄어든 것을 탓하며 슬퍼하는 저자의 심정은 차라리 고혹스런 사치의 절규다. 미치는 게 정상인데 미치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을 꾸려나간다. 잘 풀리지 않는 게 정상인데 세상은 잘 풀린 사람들이 이끌어나간다. 그러면 미친 이들의 세상은 더욱 암울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김갑수는 누구?
시인·문화평론가 타이틀을 달고 글을 쓰고 방송을 하고 강연을 하며 살아간다. 이런 행적이 어떤 이에게는 '백수'로, 또 다른 이에게는 '전방위'로 비친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중학교 때 AFKN 라디오 팝송에, 고등학교 때 음악 감상실 '르네쌍스'의 클래식 선율에 붙들린 이래 일평생을 중고딩 처럼 살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수료하고 웅진출판 창립기에 편집부에 입사하여 편집부장을 끝으로 정규직 생활을 떠났다. 이후 라디오 진행자로 전업하여 거의 모든 방송사를 한 바퀴 돌았다. 이른바 '교양 프로그램'이 멸종해 가는 환경 탓에 근년에는 종편방송 예능프로그램에 진출해 시사, 연예, 건강, 역사 등속을 버무려 말꾼으로 살아간다. 그 말들의 대가는 모조리 음반과 오디오로 바뀐다. 그 덕분에 약 3만여 장의 LP와 CD, 20여 조의 진공관 오디오 기기가 작업실 '줄라이홀'에 쌓이게 됐다.

<실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데뷔하고,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집 <세월의 거지>를 출간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예술에세이 <지구 위의 작업실>, 시사칼럼집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서평집 <나의 레종 데트르>, 대담집 <인문학 콘서트 1-4>, 음악에세이집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와 다수의 공저가 있다.
그래서 그런가. 그는 하르트만의 교향곡 <한탄의 노래>를 이야기한다. 이어 이 시대를 위한 진혼곡들을 열거한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미사전례 음악인 '레퀴엠'이 그것이다.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은 1835년 대형 테러사건의 국민추도식을 위해 작곡되었다.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은 명상과 내면성의 레퀴엠이라고 소개한다.

드보르자크와 베르디의 레퀴엠의 창의적이고 모리스 뒤리플레의 레퀴엠은 뛰어난 레퀴엠으로 추천한다. 이어 1996년 초연된 모차르트의 <레퀴엠 칸티클스>까지 추천한다.

주저 없이 세월호 희생자의 가슴에 상처 입은 모두를 위해 레퀴엠을 듣고 애통하는 마음을 추스르라고 말한다.

정상이 아닌 삶을 영위하는 우리 국민을 향한 그의 처절한 사랑은 그래서 더 슬프다. 그리고 더 많이 기쁘다. 이 혼재된 마음은 무엇일까. 그의 외침으로 글을 끝내기로 한다.

"그러니까 음악이다. 음악은 '지금 이곳'을 떠나고 싶은 사람의 거주지다. 거기에는 갈 수 없는 지난 세기와 모르는 언어가 있고, 국가도 정부도 없다. 자아과잉의 품행제로 몸부림이 아무렇지도 않게 뛰놀 수 있고, 윤리도덕의 족쇄는 개목걸이로도 쓰지 않는다. 그런 어떤 주거지가 음악 안에 있다고 믿는다."(61쪽)

덧붙이는 글 |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김갑수 지음 / 2014. 8. / 오픈하우스 / 1만8000원)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 김갑수의 살아있는 날의 클래식

김갑수 지음, 오픈하우스(2014)


태그:#김갑수, #어떻게 미치지 않겠니?, #클래식,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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