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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부터 18일까지 늦은 여름휴가를 떠났다. 목적지는 세 곳. 첫째 날은 진도 팽목항으로 먼저 향했다. '기다림의 버스'를 타기 위해 시청으로 출발했다. 시청과 광화문 일대는 교황 방한과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집회 등으로 인해 시민과 경찰 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여름휴가의 첫 목적지는 팽목항

오후 1시 출발 예정이었던 기다림 버스는 15분 늦게  출발했다. 시청 광장의 소란함을 뒤로 한 채 버스는 진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히고 있는 것일까.

버스 안엔 생각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열 다섯 명 정도다.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교황 방문과 광복절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요즘 방문 인원이 줄었다"고 인솔자가 귀띔해준다. 지난 7월 24일 세월호 참사 100일째 되던 날엔 버스 2대가 진도를 방문했다는 말을 들으니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팽목항 하늘나라 우체통
 팽목항 하늘나라 우체통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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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끝나기 전 진도를 방문하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는 여자 선생님 네 분,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대학생 세 명, 외국 유학을 떠나기 전 진도를 방문하기로 했다는 여학생, 가정주부부터 중년의 부부들까지... 모습도 사는 곳도 모두 달랐지만 버스에 탄 사람들의 마음은 똑같았다. 미안함과 죄책감,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감. 더불어 그들은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자괴감을 트라우마처럼 안고 있었다.

6시간을 달린 버스가 목포를 지나 진도대교에 들어서자 거대한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명량해전의 바다가 보였다. 10여 분을 더 달리자 실종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진도체육관이 나타났다. 형광색 재킷의 자원봉사자들은 이곳이 곧 슬픔의 현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마련해준 저녁으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실종자 가족들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마침 광주에서도 자원봉사를 위해 내려온 사람들이 10여 명 정도 있었다. 인솔자는 사진촬영은 삼가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바닥에 깔린 수많은 이불들이 눈에 들어왔다. 10명의 실종자 가족들만 남아 있는 상황이지만 가족들의 부탁으로 치우지 않고 있다고 했다. 체육관을 덮고 있는 이불마저 걷어진다면 그 기다림이 무척이나 쓸쓸할 것 같았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충격, 언론과 정치인으로부터 수많은 상처를 받은 실종자 가족들은 기다림의 버스 방문자들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만남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방문한 날은 처음으로 실종자 가족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만났는데, 3명의 한의대 학생들이 전공을 살려 실종자 가족들의 어깨와 팔, 다리 등을 주물러줬다. 몇몇 주부들은 손을 잡고 함께 눈물 흘리고 다독였다.

팽목항 바람개비
 팽목항 바람개비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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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들이 많구나." 

그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마음까지 더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일상 속 어디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들을 만날 수 있을까. 모두들 온화한 미소로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할 뿐 단 한 사람도 사진을 찍는 사람은 없었다. 생면부지의 낯설고 불편한 공간이 그토록 따뜻하고 평온하게 느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방문자들은 곧 팽목항으로 향했다. 수많은 노란 리본과 바람개비가 바닷바람에 쉼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세월호는 이곳에서 50분 거리의 바다에 가라앉아 있다고 했다. 긴 묵념 후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의 법률 대리인을 맡은 대한변호사협회 배의철 변호사로부터 세월호 실종자인 다윤이의 어머니가 뇌종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하지만 딸을 찾기 전까지는 수술을 하지 않겠다며 수술을 거부하고 있다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실종자 가족 이영호씨 또한 폐렴을 참다가 악화돼 폐의 3분의 1이나 잘라냈다고 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바닷속에 있는 가족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정직하고 정의로운 세상은 언제쯤 올까

봉하마을 바람개비
 봉하마을 바람개비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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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휴가 둘째날. 상경하는 대신 나는 목포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봉하마을을 가기 위해 진영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포에서 진영까지 또 6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 광주, 보성, 순천을 지나자 전라도 사투리 틈으로 경상도 사투리가 드문드문 끼어들더니 하동에 들어서자 경상도 사투리가 객차 안을 점령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픔으로 자리 잡은 그곳. 나는 왜 이곳을 가야만 했을까. 앞서 이야기했던 사회 시스템이 가한 '트라우마'와 더 좋은 세상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을것이다. 더 정직한 세상, 더 정의로운 세상, 인간적이고 훈훈한 세상.

봉하마을로 가는 셔틀버스 안은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이다. 텅 빈 버스 안만큼 내 마음도 공허했다. 기다림의 버스 안의 그 씁쓸함이 다시 엄습했다. 그것도 잠시,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진도에서 봤던 노란 바람개비의 물결이 다시 방문객을 맞이한다. 반가우면서도 슬프다.

봉하마을 묘역
 봉하마을 묘역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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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주차장의 많은 차들과 사람들이 보였다. "다행이다. 아직도 잊지 않았구나" 안도감이 밀려왔다. 겉모습은 관광지처럼 변했지만 부엉이 바위가 주는 무게감 때문인지 방문객들의 표정에선 가벼움을 찾기 힘들었다.

노 대통령의 묘역에서 방명록을 작성하는 한 남자가 보였는데 무언가를 다짐하듯 한 자 한 자 써내려가는 모습이 진지함을 넘어 비장함이 느껴졌다. 묘역 바닥에 노 대통령을 추모하며 민초들이 남긴 수많은 글귀들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작고 소박한 전시, 가슴을 울리는 큰 감동

박예슬양 전시회 입구에서
 박예슬양 전시회 입구에서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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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엔 어머니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어 휴가 넷째 날, 세월호 희생자인 박예슬양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전시회장을 찾았다. 예슬양의 전시회장은 단출했다. 그 단출함을 '거위의 꿈'이 아늑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전시회장엔 예슬양과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들이 많았다.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지나가고 나서 잠시 후 다른 무리의 여대생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여느 전시회에 비한다면 여러 면에서 소박한 수준이겠지만 작가와 관람객과의 교감은 어느 전시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감동을 전하고 있었다. 예슬양의 작품마다 놓인 꽃다발과 선물물들. 예슬양이 좋아했다는 과자며 그 위에 놓여있는 손글씨의 쪽지... 모두들 예슬양과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그 글들을 읽고 있자니 또 주책없이 눈물이 솟고 가슴이 미어져 왔다. 타인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그 부모님은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를 생각하니 그 깊이를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아파하고 있는데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굴러가고 있었다.

예슬양 자화상
 예슬양 자화상
ⓒ 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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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월호, #팽목항, #노무현, #봉하마을, #박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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