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래된 마을의 옛 담장은 아름답고 향토적 서정이 깊다. 알싸한 맛은 없지만 중독성 있는 농익은 맛이 난다. 마을마다 역사와 문화, 생활방식이 달라 그 맛도 다르다. 세월을 품은 마을담장, 단순한 미 이상의 미학이 있다.

아름답고 향토적 서정이 깊게 밴 우리 오래된 마을담은 마을사람들의 세월을 품었다
▲ 지전마을 토석담 아름답고 향토적 서정이 깊게 밴 우리 오래된 마을담은 마을사람들의 세월을 품었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몇 년 전부터 스러져가는 것이 안타까워, 문화재청은 몇 개 마을담장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고성 학동, 거창 황산, 산청 단계, 성주 한개, 익산 함라, 강진 병영, 담양 삼지천, 부여 반교, 산청 남사, 대구 옻골, 군위 한밤, 완도 상서, 신안 사리, 의령 오운, 정읍 상학, 여수 사도·추도, 영암 죽정, 무주 지전마을 등이다. 반교마을 빼고는 전라도, 경상도 한갓진 곳에 흩어져 있다.

두 아들 중 막내아들을 군에 보낸 아버지로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답답함과 자괴감, 우울과 무력감, 두려움이 나를 옛 마을로 내몰았다. 모나고 못난 부류(部類)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오래된 담장 하나로 치유될까마는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먼저 찾은 마을은 지전(芝田)마을. 무주에 있다. 무주는 어떤 곳인가? 무주의 젖줄 남대천변(南大川邊)을 빼고는 사방팔방 모두 산이다. 산이 깊어 오죽하면 "무주구천동 투표함이 도착해야 선거가 끝나는 거여"라는 촌로의 말과 함께 "이 친구 아직 무주구천동이네"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전라도에서 경작 비율이 가장 낮은 곳이 무주다. 논과 밭이 있다 해도 다른 데 비하면 손바닥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상수리(도토리)와 밤을 저장하여 양식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산이 깊은 만큼 물은 거칠다. 남대천은 비단 강, 금강의 물줄기라 하나 윗물이라 아직 거칠다. 무주사람들은 이런 거친 산과 물을 이겨내고 달래며 거세게 살아왔다.

최북의 메추라기는 무주의 지전마을

인걸은 땅의 기운으로 태어난다 했다. 한평생 거칠고 수수께끼처럼 살다간 영·정조 시대 화가 최북(崔北1712-1786)이 무주사람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주 태생의 근거가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주에 최북기념관을 지어 그를 무주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체구는 작달막하고 술 좋아하여 기행을 일삼은 최북. 빈센트 반 고흐가 스스로 자기 귀를 잘랐듯 최북은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미치광이(狂生)이라는 소릴 듣는 그였다. 무주만큼이나 거친 삶을 살다간 그였다.

거친 삶을 살다간 최북이지만 이 그림만은 최북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드러낸 듯 애틋하고 섬세하고 사랑스럽다(화인열전2, P143에서 촬영)
▲ 최북의 <메추라기와 조>일부 거친 삶을 살다간 최북이지만 이 그림만은 최북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드러낸 듯 애틋하고 섬세하고 사랑스럽다(화인열전2, P143에서 촬영)
ⓒ 역사비평사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그의 두 그림을 보고 나면 얘기는 달라진다. <메추라기와 조> 그리고 <소채도>.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섬세하며 친숙한 그림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최북의 내면을 보는 것 같다.

거친 최북 마음 속에 사랑스럽고 친숙한 메추라기와 채소가 담겼듯, 거친 무주의 한구석에 평온하고 사랑스런 지전마을이 자리 잡았다. 최북의 메추라기와 채소는 무주에게는 지전마을이다. 세차게 흐르는 남대천 상류에 둥지 틀었다. 앞에도 산, 뒤에도 산이다. 민주지산과 백운산으로 둘러싸여 옹색하기로는 옛 마을 중 제일이다.

앞에는 남대천이 흐르고 뒤에는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이다. 개량기와집이 대부분인 평범한 우리의 농촌마을 정경이다
▲ 지전마을 정경 앞에는 남대천이 흐르고 뒤에는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이다. 개량기와집이 대부분인 평범한 우리의 농촌마을 정경이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마을을 이룬 연대는 300여 년 전. 천변에 심어진 느티나무로 어림잡은 것이다. 20여 가구가 남대천을 향해 은행잎 모양으로 퍼져 있는 조그만 산골마을이다. 거의 개량 기와집이고 정통기와집은 재실(齋室)인 지산재(芝山齋) 한 채밖에 없다. 남대천 한편에 용의 맨 끝 꼬리마냥 휘어지다만 돌다리가 있어 겨우 폐쇄의 공포만은 덜었다.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로 용의 맨 끝 꼬리마냥 휘어지다 말았다
▲ 지전마을 돌다리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로 용의 맨 끝 꼬리마냥 휘어지다 말았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고작 700미터 토담길, 무주니까

마을담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하나 길이로는 옛 마을담장 중 맨 꼬맹이. 고작 700미터다. 남들이 1킬로미터 넘는 담장 길이를 자랑하지만 거친 무주를 생각하면 이것만도 대견하다. 인물 좋고 어느 한구석 빠지지 않으나 남들보다 키가 좀 작아 혼기 놓친 아무개 막내딸을 보는 양 딱하다.

담 쌓을 때 실려 왔는지, 바람에 흘러왔는지, 담에 뿌리 내린 씀바귀 같은 들풀은 이 마을사람들, 아니 우리의 질긴 삶처럼 보인다
▲ 담에 뿌린 내린 들풀 담 쌓을 때 실려 왔는지, 바람에 흘러왔는지, 담에 뿌리 내린 씀바귀 같은 들풀은 이 마을사람들, 아니 우리의 질긴 삶처럼 보인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마을담은 흙과 돌로 쌓은 토석담. 산골마을의 전형적인 담이다. 돌 많은 바닷가라면 돌담을 쌓았겠지만 이 마을 태생은 산골, 냇가에서 구한 돌과 산과 들에서 퍼온 황토로 적당히 반죽하여 토석담을 쌓았다.

이 마을 담은 흙과 돌로 쌓은 토석담이다. 집마다 감나무가 많아 향수를 자아낸다
▲ 지전마을 토석담과 감나무 이 마을 담은 흙과 돌로 쌓은 토석담이다. 집마다 감나무가 많아 향수를 자아낸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토담이든 돌담이든 마을에 들어오면 마을담이다. 담과 담이 서로 어깨를 나누어 골목이 되고 골목이 이어져 마을길이 되었다. 홀로된 아주머니의 일손을 도와 경운기로 참깨를 옮겨주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장면은 외지인 눈에는 한 순간이었겠지만 우리가 안 보는 사이 마을사람들의 정은 무한히 쌓여 두터워진다.  

홀로된 분을 위해 분주히 손을 놀리는 마을 분. 외지인의 눈에 비친 정감 있는 짧은 한 장면이지지만 우리가 안 보는 사이 이와 같은 정은 무한히 쌓여 두터워진다
▲ 참깨 옮기는 일손 홀로된 분을 위해 분주히 손을 놀리는 마을 분. 외지인의 눈에 비친 정감 있는 짧은 한 장면이지지만 우리가 안 보는 사이 이와 같은 정은 무한히 쌓여 두터워진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지전마을은 예전에 지초(芝草)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이제 지초는 보이지 않고 집마다 감나무만 무성하다. 감나무는 집안이나 집 근처 밭두렁에 심어 사람과 함께 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감나무를 무척 좋아하였던 이오덕 선생은 감나무는 사람의 숨소리와 말소리를 들어야 맛이 난다 했다. 감나무를 좋아하는 건 어디 선생뿐이겠는가? 시골 태생이라면 누구나 감나무를 좋아하여 감나무와 함께한 어린 시절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막내아들이 어머니가 손자 준다고 남겨놓은 감을 따고 있다. 군에 간 이 아이의 사진을 다시 보니 가슴이 먹먹해 진다(2005년 금산에서 촬영)
▲ 감나무의 추억 막내아들이 어머니가 손자 준다고 남겨놓은 감을 따고 있다. 군에 간 이 아이의 사진을 다시 보니 가슴이 먹먹해 진다(2005년 금산에서 촬영)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맨 꼭대기 감은 까치밥으로, 낮게 열린 감은 '손주밥'으로 남겨놓고 서둘러 딴 땡감은 항아리에 소금 간하여 우려내 미처 오지 못하는 막내아들에게 보내준다던 어머니. 이제 막내아들이 윤기 나는 홍시를 따다가 정성스레 어머니 제사상에 올리게 되었으니 감나무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아린 추억이 되었다.

물가에서 물놀이하는 외지인은 시끌벅적한데 마을 한가운데는 조용하다. 마을 바깥 길에서 들려오는 경운기 기계음마저 사람의 자취로 느껴져 기분 좋게 들린다. 문패마냥 '개조심' 패를 달고 있는 뉘 집 개마저 분위기를 타는지 조용하다.

이런 집 치고 사나운 개가 있는 경우가 드물다. 어느 가게에 ‘CCTV설치되어있음’이라 적힌 허풍 떠는 패 같다
▲ 문패인양 달고 있는 ‘개조심’ 패 이런 집 치고 사나운 개가 있는 경우가 드물다. 어느 가게에 ‘CCTV설치되어있음’이라 적힌 허풍 떠는 패 같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새 단장한 토석담은 윤기나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

적막한 마을을 나마저 떠나려 하니 마음이 어쩐지 짠하다. 허전함은 이 때문만은 아니다. 거름을 너무 많이 주면 참깨가 웃자라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어른들의 얘기가 있다.

새 단장한 담은 대대손손 마을사람들이 조금씩 쌓고 무너지면 또 쌓은 담 같지 않고 한옥타운 집 담처럼 '화장 티'를 벗어나지 못한 데다 너무 정갈한 나머지 정붙이기가 쉽지 않다. 이끼 낀 주인돌이 새로 굴러온 돌과 한데 엉켜 하나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한 듯 보인다.

새 단장한 담은 너무나 깔끔하여 정붙이기 어려운데 그나마 채석장에서 급구한 깨지고 상처 입은 돌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 지전마을 토석담 새 단장한 담은 너무나 깔끔하여 정붙이기 어려운데 그나마 채석장에서 급구한 깨지고 상처 입은 돌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 김정봉

관련사진보기


새 단장 할 때 쓰인 돌이 토종호박 같이 둥글고 몽실몽실한 돌 대신 채석장에서 급구한 찢겨지고 날카로운 상처 입은 돌이 아닌 것만으로도 그나마 다행이다. 여기까지 와서 날카로운 칼날 같은 돌로 다시 한 번 상처를 입었다면 최북처럼 광생(狂生)의 길로 갔을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8월9일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태그:#지전마을, #최북, #무주, #토석담, #남대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