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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중국 칭다오 이공대학에서 중국 학생들을 가르쳤다. 칭다오라는 지역성, 건축이라는 전문성, 교수와 대학생이라는 계층성, 한국인과 중국인이라는 민족성… 언뜻 보면 좀 특이한 소재이지 싶다. 하지만 이 소재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중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이며 작고 밀도 있는 이야기들이다. 중국의 대국굴기를 대표할 만한 잘난 사람이 아닌, 고만고만한 약력을 가진 한국인 선생과 함께 지지고 볶던 고만고만한 중국 대학생들과 이웃의 울퉁불퉁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 기자말

땀 냄새 풀풀 풍기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중국 유학생.
중고지만 때깔 나는 일본차로 쌩쌩 달리면? 한국 유학생.

빈티 나는 옷을 줄창 입고 있으면? 중국 유학생.
화장하고 파마나 염색을 했으면? 한국 유학생.

미국 유학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캠퍼스를 오고가는 학생들을 언뜻 봐도 과장되긴 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덕에 나도 종종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았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얼굴, 새치가 드문드문 섞인 커트 머리, 꾸깃꾸깃한 티셔츠, 월마트에서 산 100달러짜리 자전거, 내 행색이 그랬다.

그 후 나도 차를 끌고 다니게 되었는데,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유사 중국인'이니 '중국인 같은 한국인'이니 농담을 했다. 나의 소중한 애마를 '똥차'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내가 미국을 떠날 때 그 차를 사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 중국 유학생이었다.

그로부터 8년 후 나는 중국 대륙에서 중국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시작될 무렵, 나는 중국 산동성 칭다오 이공대학교와 한국 광운대학교 합작 프로그램 교수로 선발되었다.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 칭다오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중국을 몰랐다. 관심조차 없었다. 건축 전공자인 내가 줄곧 배우고 만나온 대상은 미국, 유럽, 일본의 건축이었고 문화였다. 간혹 건축잡지에 중국 특집 기사가 나와도 가볍게 지나쳤다.

나는 중국 건축을 껍데기만 남은 유물이거나 값싼 공산품과 '짝퉁'의 이미지쯤으로 여겼다. 이미 중국의 대도시에 들어선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도 개별 건축가의 작품성으로만 보았다. 중국의 현대건축이라는 인식은 하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 내가 알던 중국 학생은 없었다

필자가 근무했던 국제학원(국제대학) 건축학과 건물. 칭다오 이공대학교 캠퍼스에서 가장 역사적인 건물로, 1950년대 유행했던 소련식 건축이다.
 필자가 근무했던 국제학원(국제대학) 건축학과 건물. 칭다오 이공대학교 캠퍼스에서 가장 역사적인 건물로, 1950년대 유행했던 소련식 건축이다.
ⓒ 칭다오 이공대학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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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학생들을 만나기 전, 나는 예전의 아릿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시절의 나를 닮은 중국학생들을 그려보았다. 추억의 명화를 다시 볼 때의 설렘이랄까. 나는 그 기분을 안고 첫 수업 설계실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곳에는 내가 알던 중국 학생은 없었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에 긴 생머리의 여학생, 짤막한 깍두기 머리 모양의 남학생은 예전에 보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들 빈티가 아니라 반짝반짝 윤기가 났다. 잘 먹고 잘 자란 티가 났다. 학생들은 나보다 더 좋은 핸드폰과 노트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모나미 플러스 펜을 한 다스로 사서 쓰는 학생도 있었다.

어느 여학생에게 온 택배 상자 속에는 한글이 깨알 같이 적힌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한국 제품이 가격 대비 품질이 좋고 예뻐서 산다고 했다. 가격 대비? 싸다는 말인가? 중국에서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묘했다. 듣자 하니 어떤 학생은 중국에서 비싸다던 삼성 노트북으로 도면을 그리고, 인터넷으로 상하이 화방에 수입 모형 재료를 주문하고, 완성된 모형은 캐논 DSLR 카메라로 찍는단다. 학비가 많이 드는 5년제 건축학과라서 그런지, 돈 때문에 바들바들 떨 것 같은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리란(李兰)이 생각났다. 리란은 미국에서 나와 같은 건축대학원을 다녔다. 하얼빈에서 온 그녀는 영어든 건축이든 막힘이 없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했고 생활비는 학교 조교를 해서 벌었다. 점심시간이면 리란의 남편이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가지고 설계실에 나타났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리란의 남편은 학생이 아니라 전업주부였다. 그는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 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했다. 중국에서 캠퍼스 커플이었던 두 사람은 원래 같이 유학준비를 했는데 리란만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리란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직할 무렵 남편이 공부를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중국인 유학생을 모두 고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2000년이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한 지도 이미 20년이 넘은 시기였다. 2000년이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이미 1조 달러에 달했고 인구는 13억이 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하위에 속하지만, 고속 경제 성장 덕에 신흥 부자들이 많이 생겼고 계층 분화도 일어났다.

2000~2001년에 유학을 간 중국 학생 8만5천 명 중 70% 이상이 미국으로 갔다. 내가 미국에서 목격한 중국 유학생은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학비와 물가가 싼 텍사스의 주립대학교가 아닌, 뉴욕이나 보스턴의 사립대학으로 간 공산당 고위 간부, 국영기업의 임원, 기업체 사장의 자녀들은 차원이 다른 유학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왜 그렇게 싸구려로 비춰졌을까?

당장 대형마트만 가도 알 수 있었다. 가장 싼 생활용품은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 한국식으로 치면 1000냥 하우스인 원 달러 숍 물건도 죄다 중국산이었다. 한국 제품은 전자 코너에 있었다. 최고급으로 쳐주던 일본 제품에 비하면 가격은 좀 낮았지만 품질이 좋다고 인기가 많았다.

사람들은 마트 매장의 서열에 따라 국가를 인식했다. 일본은 특별한 동양이었고, 한국은 일본보다는 못하지만 이제 제법 사는 나라, 중국은 아직 갈 길이 먼 나라쯤으로 구별을 했다. 그 구별법이 다시 국민의 이미지를 결정했고 사람에 대한 대우도 달랐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사자인 우리가 그것을 잘도 받아들이고 심지어 재생산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자전거와 자동차로 중국 유학생과 한국 유학생을 구분했던 것처럼. 내 머리 속에 저장된 중국인의 이미지가 획일적인 것도 그 탓이었다.

'소황제'로 자란 중국 '바링허우' 세대

2008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8월 8일 저녁 주경기장인 궈자티위창에서 꿈의 고리가 빛나고 있다.
 2008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8월 8일 저녁 주경기장인 궈자티위창에서 꿈의 고리가 빛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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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칭다오 이공대 설계실에서 만난 중국 학생들은 그 획일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나라의 학생이 아니었다. 2000년 1조 달러였던 GDP가 2005년에는 2조 1000억 달러로 경제 규모가 세계 4위였고, 2010년에 이르면 5조 878억 달러로 미국과 더불어 'G2'가 되었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을 해오고 있었다.

첫 날 설계실 문을 열기 전 내 머릿속의 중국은, 자신의 피를 팔아 카메라를 장만했던 장이머우(张艺谋)의 토속적이고 거친 색감의 초창기 영화였다. 설계실 문을 열고나서 내가 목격한 중국은, 세계적인 거장이 된 장이머우가 연출한 스펙터클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었다.

그 개막식을 느긋하게 즐기는 세대가 바로 1980년대에 태어난 '바링허우(八零后)'이다. 내가 가르쳤던 중국 학생들은 1980년대 말에 태어났다. 중국의 신세대 바링허우의 끝자락이다. 바링허우 다음엔 더 자유분방한 1990년대 출생의 '지우링허우(九零后)' 세대가 있다. 하지만 중국 신세대의 대명사는 역시 바링허우이다. 지우링허우는 바링허우를 이어받는 세대이지만 바링허우는 구세대에서 떨어져 나온 세대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4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강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중국인 유학생들이 환호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4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강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중국인 유학생들이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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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링허우가 시작되는 1980년은 중국 현대사를 양분하는 전환기였다. 마오쩌둥 시대에서 덩샤오핑 시대로, 폐쇄적인 계획경제에서 개혁개방으로 바뀌는 기점이었다. 하지만 시작은 초라했다. 그 직전까지 참혹한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정치적인 숙청이 끊이지 않았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면서 농업과 공업 모두 주저앉았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는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을 휩쓸었다. 그렇게 누적된 핍진한 상황에서도 인구는 1979년에 이미 10억이었다.

덩샤오핑은 후진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개방과 산아제한을 동일시했다. 적게 낳아야 양질의 교육이 가능하고 생활수준도 올라간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을 선언했고, 1979년부터 거국적으로 '계획생육정책(计划生育政策, 한 자녀 낳기 정책)'을 실시했다.

바링허우는 개혁개방과 한 자녀 정책의 최초 수혜자였다. 중국은 개혁개방 후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별의별 자영업자가 생겨났다. 누구나 가난했던 사회가 누구든 기회만 잡으면 자수성가할 수 있는 사회로 변했다. 바링허우의 부모 세대는 초고속의 공업화와 산업화 속에서 능력껏 부를 축적했고, 그 열매는 단 한 명의 자녀인 바링허우에게 떨어졌다.

부모와 조부모는 귀하디귀한 바링허우를 소황제(小皇帝)로 떠받들어 키웠다. 손만 내밀면 쉽사리 얻을 수 있었던 소황제는 돈의 구애를 받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개방된 서구 문화에 익숙했다. 바링허우는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가장 덜 받은 세대이고, 소비지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개인주의적이다. 그들은 부모 세대와 다른 정신세계를 가지고 새로운 문화산업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이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문화대혁명 후반기에 태어난 리란과 1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다시 10년 후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중국 건축계에서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할 때이다. 나는 당장 머릿속에서 추억의 명화극장을 지웠다. 빛바랜 사진첩을 나른하게 뒤적일 때가 아니었다. 8년 만의 격세지감,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질 테니까. 이제 그 현장에 서 있는 나는 편견 없는 맨눈으로 맨얼굴의 중국과 중국인이 보고 싶어졌다.


태그:#중국 , #칭다오 , #신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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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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