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취재/이선필 기자·사진/이정민 기자| 이 남자, 영화가 풍기는 분위기와 매우 닮았다. 거친 파도 위에서 조선족 밀항을 시도하다 절망에 빠지는 전진호의 선원들은 곧 그의 말대로 "치장하지 않고 인간의 진솔함을 보인 인물"이었다.

영화 <해무>에서 유승목이 맡은 경구는 선장 철주(김윤석 분)와 막내 동식(박유천 분)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군대 서열로 치면 상병 정도 되겠다. 철주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는 동시에 간혹 일탈을 하기도 한다. 욕망에 따라 질서와 혼란 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한다.

영화 <박하사탕> 이후 서른 편 가까이 되는 작품에서 짧게 등장해 신스틸러로 얼굴을 알려온 그가 <해무>에서는 하나의 완성된 캐릭터를 맡았다. 그는 "시나리오가 나온 상태는 아니었지만 좋은 작품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심성보 감독에게 시켜달라고 했다"며 "연기 활동 하면서 먼저 제안을 한 건 처음이었는데 그만큼 하고 싶었다"고 캐스팅 당시 소회를 전했다.   

"제일 어려웠던 건 선원들의 우정이 깨질 때 감정"


<살인의 추억>의 연출을 맡았던 봉준호 감독과 각본을 썼던 심성보 감독이 각각 <해무>의 제작자와 연출자로 의기투합했다. <살인의 추억>에서 단역인 기자로 출연했던 유승목은 오랜 인연에 대해 "사실 그땐 심성보 감독을 잘 몰랐는데 이번에 그때 그분이었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감독님과 김윤석 형님 이하 함께 했던 사람들이 모두 식구였다"며 현장의 훈훈함도 전했다.

"'정말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모였구나' 생각했죠. 저도 그 안에서 잘 해야 했어요. 경구라는 인물을 해내기 위해 다큐라는 다큐는 다 봤고요. 별의 별 고기를 다 잡더라고요(웃음). 어촌에서 배를 타지만 나름 멋도 부릴 줄 아는 청년으로 설정했어요. 1990년대 유행하던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준비했는데 담당 실장님이 다 조사를 해놨더라고요. 제가 했던 건 시간 날 때마다 고기잡이배가 들고 나가는 걸 보는 거였어요.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감정을 주고받는지 하나하나 관찰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힘들었던 건 전진호 선원들이 우정을 깨고 점점 폭주하는 장면이었어요. 상상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배우로서 연기로 잡아내기 힘든 부분이거든요. 근데 현장에서 분위기가 저절로 만들어졌어요. 무언가 작정하고 뽑아내려 한 게 아닌데 어떤 배우가 하나를 던지면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서 감정을 증폭시켰죠. 모두가 그렇게 캐릭터에 젖어 들어갔어요."

경구를 '악인이 아닌 일상의 뱃사람'으로 이해한 유승목은 "보통의 뱃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고향은 서울인데 외모적으로 지방색이 강해서 그런지 시골에서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만 신고 다니면 유독 '진짜로 현지인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웃어 보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배우 꿈꿔...꾸준히 연기하는 건 아내 덕"


1990년 연극무대부터 시작해 경력으로 치면 25년이 돼 가지만 유승목은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가 가장 설렌다"고 고백했다. "배우로서 항상 새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건 복"이라면서 "반대로 인물을 잘 소화하지 못하고 깊이 빠지지 못할 때 힘들어 죽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한창 연기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상렬 연출가님이 말씀하셨어요. 연기가 안 된다면 벽에 머리를 박아 깨가면서도 해야 한다고 하셨죠. 그만큼 피하면 안 된다는 소리인데 그 말이 여전히 제 머릿속에 있어요. 그 선생님이 절 인정해준 한 마디였는데 힘들 때마다 그 말씀을 믿고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근데 김윤석 형을 보면 여전히 전 제 역에 완전히 빠지지 못한 거 같아요. 이렇게 또 많이 배워가네요."

유승목은 스스로를 "영화인이라기보다는 '그저 좋은 배우가 되기를 바라며 사는 사람'"이라 정의했다. 1990년 후반부터 2000년 영화계를 고스란히 관통하고 있기에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을 수 있지만, "배우로서 작품을 잘 표현하는 게 먼저"라고 선을 그은 유승목은 "보다 다양한 배급망과 제작자들이 나와서 영화가 다양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그가 이토록 꾸준하게 연기할 수 있는 힘은 가족, 특히 아내였다. 영화계에서 누구보다 가정적인 남자로 소문이 났다고 말하니 "누가 그런 말을 하시냐"며 싫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집에서 두 아이의 눈치 보며 살고 있습니다. 애들이 절 좋은 배우라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손잡고 보러 갔는데 <해무>가 19금이라 이번엔 못 갔네요. 아내에게 항상 고마워요. 작품을 쉬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는 것도 아내 덕이에요. 고등학생 때부터 배우가 하고 싶었고, 연극을 하면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서른 살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습니다. 전공으로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은 어떤 걸 배우는지 알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연기자로 살면서 가다보니 지금까지 흘러왔네요."


<해무>를 두고 "인생의 방향타를 고민하게 하는 작품"으로 해석한 만큼 유승목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뚜렷한 방향성을 세우고 있었다. 영화 속 강인한 캐릭터와 달리 사람 좋은 미소와 유순함을 간직한 그는 인터뷰 말미에 <해무>에 대한 말을 덧붙였다.

"인간이 갖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보면서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명량>의 리더십이 자기 욕심을 버린 데서 나왔다면, <해무>의 선장은 곧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한 리더십일 수 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영화를 보면서 많이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