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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에 이름난 기생 황진이는 삼십 년 벽면수행을 하던 지족선사의 지조는 꺾었지만 화담의 지조는 꺾지 못했다,
 송도에 이름난 기생 황진이는 삼십 년 벽면수행을 하던 지족선사의 지조는 꺾었지만 화담의 지조는 꺾지 못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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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생애와 활동, 업적 따위를 적은 기록'을 전기라 하고, '여러 사람의 전기를 차례로 벌여 기록한 책'을 열전이라고 합니다. 전기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게 낱낱이 펼쳐지는 한 사람의 일생이라면 열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건 열전 속 주인공들이 살던 사람들이 얼개를 엮어가듯이 그려내고 있는 시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전기는 한 그루의 나무를 중점으로 해 그려지는 정밀화 같아서 나무 자체나 관련한 이야기들은 아주 세세하게 담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 배경이나 관련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까지를 담아내는 데는 아무래도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열전은 우거진 숲과 너른 내, 기암절벽과 낙락장송까지도 담아내는 산수화처럼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담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비록 한 사람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이해하는 배경이 돼 시대상을 그릴 수 있는 얼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평민 136사람의 이야기로 펼치는 <조선평민열전>

<조선평민열전>(지은이 허경진 / 펴낸곳 알마 출판사/2014년 8월 11일 / 값 2만 2000원)
 <조선평민열전>(지은이 허경진 / 펴낸곳 알마 출판사/2014년 8월 11일 / 값 2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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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평민열전>(지은이 허경진/펴낸곳 알마 출판사)은 조선 시대에 각양각색의 삶을 살던 136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부류별로 뭉툭뭉툭 정리해 엮은 내용입니다.

열전에서 싣고 있는 사람은 시인(40), 화가(8), 서예(4), 의원(10), 역관(9), 천문학자(1), 출판(3), 의협(12), 처사·선비(9), 바둑(5), 충렬(10), 장인(1), 효자(10), 효녀(3), 열부·열녀(7), 기생·공녀가 4명으로 총 136명입니다.

열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김홍도나 장승업과 같은 화가,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기생 황진이처럼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았을지언정 신분상으로는 내세울 게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과 관련한 일화이자 그들이 살아가면서 남긴 흔적들입니다. 

김응립金應立은 영남의 천민이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몰랐지만, 영남에선 신통한 의원으로 이름났다. 그의 의술은 맥을 짚어보지 않고 증세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형태를 보고 얼굴색만 살피고도 그 병의 빌미를 알아냈다. 그가 처방을 내린 약은 흔히 쓰이는 약재가 아니었다.
-<조선평민열전> 226쪽-

왕이나 명성이 자자한 권신들이 살던 삶은 너무나 권위적이고 위선적이어서 쉬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삶은 백성(서민)들의 살아가는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역사적 사실로는 받아들이지만, 살아가는 모습으로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황진이가 끝까지 품지 못한 남자, 화담 서경덕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평민 136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집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일상적인 이야기,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자 운창이 바둑돌을 내려놓았는데 당당하게 완벽한 수를 내놓았다. 포위하는 것은 성채 같고 끊는 것은 창끝 같았으며 세우는 것은 지팡이를 짚은 것 같고 합치는 것은 바느질한 것 같았다. 응하는 것은 쇠북 같고 우뚝 솟은 것은 봉우리 같았으며 덮은 것은 그물 같고 비추는 것은 봉홧불 같았다. 함정에 빠트리는 것은 도끼 구멍에 끼우는 것 같고 변화하는 것은 용 같았으며 모이는 것은 벌 같았다. 김종기는 땀이 흘러 이마를 적셨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조선평민열전> 384쪽

그는 평생 화담 선생의 사람됨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에 가서 한껏 즐긴 다음에야 떠났다. 진이는 늘 "지존선사知足禪師가 삼십 년이나 벽만 바라보고 수행했지만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오직 화담 선생만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말했다.
-<조선평민열전> 495쪽-

위 글은 혼자서 바둑을 터득한 정운창이 정승 김종기와 바둑을 두는 모습과 황진이에 대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조선 화류객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명기 황진이는 비록 농담이긴 하지만 박연폭포와 화담 서경덕 그리고 자신을 '송도 삼절三絶'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조선평민열전>을 통해서 들여다 보는 또 다른 조선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친근한 모습이다.
 <조선평민열전>을 통해서 들여다 보는 또 다른 조선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친근한 모습이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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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 동안 벽면수행하던 스님조차 욕정을 이기지 못해 파계할 만큼 유혹적인 황진이였지만, 화담만큼은 끝까지 지조를 지킨 사람이었음을 알게 함으로 황진이가 사모했던 화담의 진면목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배경이 됩니다.  

실록을 배경으로 한 역사서를 통해서 보는 조선은 이미 지나간 역사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평민의 눈과 평님의 삶을 통해서 되짚어 보는 조선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 모습에서도 찾은 수 있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이며, 밑그림이 돼 어른거리며 이어지는 조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조선평민열전>(지은이 허경진, 펴낸곳 알마 출판사)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조선은 내가 주인공일 수도 있는 조선이며 지금껏 알고 있는 조선과는 또 다른 조선으로 새기게 될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조선평민열전>(지은이 허경진 / 펴낸곳 알마 출판사/2014년 8월 11일 / 값 2만 2000원)



조선평민열전 - 평민의 눈으로 바라본 또다른 조선

허경진 지음, 알마(2014)


태그:#조선평민열전, #허경진, #알마출판사, #서경적,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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