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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동피랑 벽화마을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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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동피랑성애자'인 나는 가족 행사가 있어 통영에 내려가자마자 성지를 순례하듯 동피랑을 찾았다. 그 전날 몰아친 태풍의 잔상이 여전한데도 동피랑 벽화마을엔 관광객들이 비와 함께 들이붓고 있었다. 어느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달동네가 되어버린 동피랑.

하지만 원래는 오랜 세월 동안 통영 토박이들에게도 귀에 익지 않은 '듣보 동네'였다. 나는 적어도 20년간 매일 통영 여행을 했다. 태어나고 뛰놀고 울고 웃고 생각하고 가슴 뜨거워지고 하며 통영 여기저기를 살아 지냈기에 그렇다. 하지만 '동피랑'이란 지명을 들은 건 20살이 한참 지나서였다. 동피랑 입구 바로 옆에 한 때 나의 외가가 있었음에도 그 언덕을 그렇게 부르는 줄 몰랐다.

통영 중앙시장 근처에 고동 같이 생긴 골목길이 하늘을 향해 돋아있는 가난한 동네 동피랑이 있는데 거기에 벽화들이 새로 태어났다는 말을, 어느 명절날 형수님에게 들었다. 동양화가인 형수도 동피랑에 처음 벽화들이 들어서던 2007년에 벽화 한 점을 그 곳에 그렸다.

한 시민단체의 주도로 드리워진 벽화들은 재개발로 인해 쫓겨날 처지에 내몰렸던 주민들의 삶을 보듬었다. 벽화로 마을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이 실험이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자 통영시는 재개발이 아닌 재생으로 정책을 바꾸기로 했다. 동피랑을 벽화마을로 살려두기로 한 것이다.

예술이 삶을 지켜냈다. 그리고 예술의 언덕으로 재림한 동피랑은 통영을 찾는 중생들에게 예술같은 통영항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뷰포인트'라는 은총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삶이 예술같기엔 산동네 동피랑 주민들의 나날은 여전히 가파르고 숨이 차오른다. 동피랑뿐이랴. 우리네 삶은 예술을 탐하지만 생활에 머물 뿐이다. 우리의 삶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동피랑에 처음 벽화들이 그려지던 때 나의 형수가 작업한 벽화
 동피랑에 처음 벽화들이 그려지던 때 나의 형수가 작업한 벽화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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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는 우리의 삶이다

형수의 벽화든, 다른 작품들이든 나의 아버지는 통영에 살면서도 동피랑의 어느 그림도 볼 수 없었다. 2000년 즈음부터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어 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뿌옇게 변해가는 정적 속에 삶을 묻어갔다. 해병대 출신임을 자랑스러워 하시던 강하고 활동적이던 아버지는 시각 장애 때문에 더 이상 대문 밖을 나설 수 없었다. 생활의 감옥 속에서 폐렴, 대장암, 간암이 연달아 강도처럼 달라붙었다. 그런 몸으로 4년 전 아버지는 동피랑 벽화마을이 바로 보이는 병원에 입원했다.

그 즈음엔 더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셨다. 2평 병실의 유리창은 유난히 컸다. 그 너머 멀리 하늘을 향해 돋아난 동피랑에는 사람들의 조류가 언제나 흘렀지만 아버지에겐 단지 한 덩이 적막함이었을 것이다.

담당 의사는 아버지가 치매 초기 증세도 보인다고 일러 주었다. 어린 시절 일찍 당신의 어머니를 여의어 무척 외로웠을 아버지의 지난 시간들을 잊으실 수 있다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단단한 불가능 앞에 아버지는 야위어 갔다. 끝나지 않을 듯한 수형의 시간들이 탄식의 주름을 잡을 기력마저 꺾어 버렸다.

그렇게 생의 썰물을 받아들이던 어느 날, 나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 찰나를 아버지에게서 보았다. 뻘밭 같은 병상의 시간을 10년이나 살아온 아버지는 표정마저 잊어 버렸다. 그렇게 굳어 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갓 태어난 당신의 손자를 안았을 때, 온 얼굴에는 들뜬 물결이 일었다.

좋고도 슬픈 소용돌이가 표정에서 느껴졌다. 바로 그 때였다. 저물녘, 동피랑이 보이는 병실 유리창에 새로운 삶을 보듬은 아버지의 모습이 벽화처럼 박혔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에게 동피랑의 벽화로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재작년, 아버지는 하늘을 향해 돋아 영원한 고요 속에 누웠다. 이젠 벽화들을 보실 수 있을까?

아버지가 투병하던 병원 창 밖으로 동피랑 벽화마을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결국 벽화들을 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투병하던 병원 창 밖으로 동피랑 벽화마을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결국 벽화들을 볼 수 없었다.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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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바다는 여전히 밀물과 썰물이 삶을 적신다. 동피랑에 그림을 그렸던 형수는 넉 달 전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또 하나의 창조적인 예술 작품이 온 몸으로 탄생한 것이다. 둘째 조카는 할아버지의 눈매를 닮았다.

조카의 백일잔치를 마치고 나는 다시 서울로 오는 버스를 탔다. 차창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며, 희극과 비극이 섞여 몰아치는 삶 속에서 우리의 시간들은 그 자체가 예술을 닮아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희극의 영토가 커지려면, 동피랑에 벽화가 들어서듯 내 아버지에게 어린 손주가 안기듯 늘 새로운 아름다움들로 삭막한 대지를 일구어 나가야 할 것이다.

2002년 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 선수가 마지막에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는 골 장면. 축구광이던 아버지가 앞을 못 보시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봤다고 하시던 말이 떠올라 가끔 웃음이 난다. 진심을 다해 보려 한다면 아름다운 순간은 머리 속에 그려지는 것인가 보다.


태그:#통영, #동피랑, #통영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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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혁'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노래 만들고 글을 쓰고 지구를 살리는 중 입니다. 통영에서 나고 서울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얼마 전부터 제주도에서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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