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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부터 6월까지, 혼자 필리핀 팔라완 배낭여행을 했다. 더 '늙기' 전에 떠난 여행이었다. 팔라완의 북부여행은 '바다와 몸', 남부여행은 '바다와 사람들'이었다. 팔라완은 안전하고 아름답고 순수했다. 고되고, 거칠고, 가난하고, 고맙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행을 했다. 두 달 만에 얼굴은 새카맣게 탔고 몸무게는 11kg 빠졌다. 팔라완은 이제 내게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리운 곳이 되었다. - 기자 말

바라쿠다 호수에서 스쿠버다이빙
▲ 코론 바라쿠다 호수에서 스쿠버다이빙
ⓒ 김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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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계속할게. 어제의 감동 스토리 말이야. 그게 끝이 아니라고 했잖아. 바다 얘기는 좀 있다가 하고. 바라쿠다 호수의 스쿠버다이빙, 그 얘기마저 할래. 수심 20여 미터 지점이었나. 알위가 내 앞으로 쭉 빠지더라. 몸을 거꾸로 세우더니 갑자기 머리를 호수 바닥에 박는 거야. 깜짝 놀았지. 그 바람에 호흡이 흐트러졌어. 몸이 휙 뒤집어지는데, 아찔했어. 간신히 정신 차리고... 알고 봤더니, 퍼포먼스! 호수 바닥이 부드러운 화산재로 두껍게 덮여 있잖아.

또, 수심 29m 지점이었어. 호수바닥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WELCOME TO CORON  PALAWAN(웰컴 투 코론 팔라완)'이라는 설치물이 보이고. 코론의 다이버들이 다 같이 고동 껍질을 모아 만든 거래. 거기서 또 알위가 머리를 화산재 속에 박았어. 그 장면, 김 강사가 사진 찍어줬는데... 여기 있다! 자, 봐봐. 내 뒤쪽에 있어서 잘 안 보이나. 아무튼 별난 놀이. 웃으면 호흡기 빠질까 봐, 쿡쿡 참았어.

내 잠수 실력 일취월장...  과연 그런 것일까

산호초 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
▲ 코론 산호초 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
ⓒ 이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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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잠수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 같다고? 그 정도는 아니고, 조금 늘기는 했지. 호수의 푸른 물빛에 취했던 걸 보면. 마치 명상에 빠지듯 말이지. 몸으로 하는 명상. 하지만 다른 다이버들처럼 화산재 속에 손을 집어넣거나 호흡기를 빼고 혀를 내밀어 민물과 바닷물을 맛보며 다니거나... 자유롭게 놀지는 못했어. 여전히 바짝 긴장한 상태였으니까. 아슬아슬, 조마조마.

근처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삐삐~ 삐삐이~ 맑은 소리였다. 여행일지 쓰던 걸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사방 고요했다. 비는 잠시 소강 상태였다. 스콜이 쏟아지는 오전 10시, 마키닛 온천(Maquinit Hot Springs)엔 나 혼자였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 필리핀 청년과 매점 아가씨를 빼고. 모처럼 한적한 곳에 혼자 있게 됐다. 

마키닛 온천
▲ 코론 마키닛 온천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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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숙소에서 소음과 더위에 시달리다 밖으로 나왔을 때, 바다 쪽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기(雨期)도 아닌데 스콜이? 숙소 뒤편 선착장에선 방카에 실려 온 돼지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근처 섬에서 팔려온 돼지들이었다. 잠시 지켜보다가 숙소로 다시 들어갔다. 부리나케 수영복을 챙겨 입었다. 서둘러 갈 곳이 생겼다. 빗속에서 야외온천을 즐길 생각이었다.

트라이시클(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삼륜차)을 잡았다. 기사는 짧은 머리 필리핀 청년이었다. 흥정은 간단했다. 왕복 300페소(한화로 약 7200원). 정해져 있는 가격이었다. 나는 150페소, 편도 값만 계산하겠다고 했다. 돌아올 차편이 없는 곳이라며 기사가 극구 말렸다. 온천욕이 끝날 때까지 한 시간, 두 시간도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다들 그렇게 한다며. 그를 설득하기 위해 내 말이 길어졌다.

"시간 정해 놓고 놀고 싶지 않아요. 시간 확인하랴, 기다리고 있는 당신 신경 쓰랴, 잘 놀 수 없어요. 어떤 거에도 구애받고 싶지 않아요. 이해하겠어요? 있고 싶을 만큼 있다가... 고맙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돌아올 방법이 있겠죠. 걸어와도 좋고. 데려다만 줘요."

결국,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했다. 이 여행은 애초 어디든 내키는 만큼 머물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배낭여행이었다. '나는 유목민, 바람처럼 떠나고 햇살처럼 머문다'라는 리타 골든 겔만처럼.

시내를 벗어나기 전, 기사는 트라이시클을 세워놓고 상점에서 1리터짜리 콜라 한 병을 사왔다. 트라이시클 연료통에 부었다. 알고 보니 주유소가 드문 팔라완에선 경유나 휘발유를 콜라병이나 플라스틱 병에 담아 팔고 있었다. 시내를 빠져나가 동쪽 해안가로 20여 분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미끄러운 빗길이었다.

마키닛 온천은 바닷가 외진 곳에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작은 매점과 조형물들, 야외 테이블과 정자가 몇 채 있고, 바다 쪽으로 온천이 보였다. 초당 85리터 솟구쳐 흐르는 해수온천수. 40여 도의 뜨거운 바닷물. 온천수는 둥글게 만들어 놓은 둑 안에 모였다가 콸콸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물이 깨끗해 바닥에 깔린 자갈이 다 보였다. 한편에 언덕이, 맞은편엔 맹그로브 숲이 둘러쌌다.

마키닛 온천 앞 바다. 방카를 타고 온 사람들이 맹그로브 숲 나무다리를 지나 온천욕을 즐기러 온다.
▲ 코론 마키닛 온천 앞 바다. 방카를 타고 온 사람들이 맹그로브 숲 나무다리를 지나 온천욕을 즐기러 온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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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그로브 숲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바다까지 나무다리가 놓였다. 나뭇가지로 만든 다리 난간이 운치 있다. 방문객들은 대개 해가 질 때 이곳을 찾아온다. 뜨거운 온천을 즐기기엔 사실, 열대의 낮은 너무 덥다. 지금은 스콜이 지나고 있기에 전혀 덥지 않다. 대기는 회색빛이고 바람은 서늘하다.

쏴아~~! 빗발이 다시 굵어졌다. 온천수 수면 위로 빗방울이 난타했다. 파닥파닥 은빛 멸치 떼 같은 파문이 일었다. 나는 여행일지를 덮고 어깨에 두르고 있던 사롱을 벗었다. 비키니 차림의 맨발로 온천에 들어갔다. 몸을 반만 물에 담갔다. 차가운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드득 얼굴과 어깨, 상체를 때리고 따뜻한 온천수가 아랫도리를 휘감았다. 마치 온몸에 '냉정과 열정'이 동시에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온몸의 세포가 열광하듯, 온몸의 감각이 열리듯, 짜릿했다.

몸이 더 '나이' 들기 전에 떠난 배낭여행이었다. 오감이 그나마 멀쩡할 때, 세상과 부딪쳐보자, 느껴보자, 생각했다. 그리고 팔라완의 첫 여행지에서 스쿠버다이빙에 도전했다. 나에겐 바다만 미지의 세계가 아니었다. 내 몸도 미지였다. 몸이라는 그 숙명적인 장소에서 50년 넘게 살았지만, 내 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관심도 없었다. 노화로 망가져 가기 시작하자 그때야 의식하게 된 것이다.

스쿠버다이빙이 그 '몸'을 실감나게 만들었다. 바닷속에서 숨을 들이쉬면 공기가 들어간 만큼 몸이 떠오르고, 숨을 뱉으면 몸이 가라앉았다. 몸이 풍선같다는 게 신기했다. 또 몸속에 공기가 차있는 곳이 폐뿐이 아니었다. 사이너스(simus, 얼굴내부)와 고막 안쪽. 그래서 이퀄라이징은 바닷속으로 하강하면서 수압 때문에 쪼그라드는 그곳에 공기를 불어넣어 압력을 맞추는 것. 70% 이상이 액체로 된 몸이라 수압을 견디며...

하나하나 알아가는 몸은 바다만큼 신비한 영토

스쿠버다이빙
▲ 코론 스쿠버다이빙
ⓒ 이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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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알아가는 몸은 바다만큼 신비한 영토였다. 내 몸의 해부도를 상상 속에서 그려 보기도 했다. 그 해부도를 들여다보다 어느 날 '해와 달은 두 눈이며, 대지와 산은 뼈이고, 강은 혈맥이다'와 같은 우주의 비밀을 나도 깨닫게 될까. 그러다가 어두워지는 해와 달과 부러져나가는 뼈와 메말라가는 강을 보게 되는 걸까.

빗발이 약해졌다. 삐삐~ 삐삐이~ 새가 다시 지저귀었다. 물속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괜히 이쪽에서 저쪽으로 온천을 휘젓고 다녔다. 바닥이 자갈이라 뒤뚱거리며.

나무다리를 건너 필리핀 중년 부부가 나타났다. 노파를 양쪽에서 부축한 두 청년과 아이들이 올라왔다. 방카를 타고 바다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온천에 몸을 담글 때, 나는 나만의 세상인 양 첨벙첨벙 휘젓고 다녔던 거기서 얌전히 나왔다. 소지품을 놓아둔 정자에 가 앉았다. 여행일지를 다시 폈다. 

친절한 스쿠버다이빙 강사 아영 씨와 필리핀 다이버 알위.
▲ 코론 친절한 스쿠버다이빙 강사 아영 씨와 필리핀 다이버 알위.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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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바다 얘기야. 바라쿠다 호수에서 스쿠버다이빙을 마치고 트윈 픽스(Twin Peaks)로 갔어. 코론 섬 앞바다. 코앞이었어. 방카 타고 잠깐 이동하는데, 알위가 갑자기 개인기를 보여주겠다더니 "여보세요! 예, 예, 예... 아니, 아니, 아니..." 한국말로 전화통화를 흉내 내는 거야. 빵 터졌어. 19살 필리핀 다이버 알위. 소년 같아. 잘 생겼어. 노란 염색 머리. 잘 어울려. 한창 멋 부릴 때잖아. 응? 얘기가 샛길로 빠졌나? 

트윈 픽스는 두 개의 작은 바위섬이야. 빙산처럼 바다 위로 솟아있어. 바닷속으로 큰 절벽이 펼쳐져 있고. 거기서 월 다이빙(wall diving)과 리프 다이빙(reef diving)을 해. 수심은 23m 정도. 산호와 열대어들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 그래, 완전 대박! 정신이 홀딱 빠질 만큼. 진귀한 생물체들의 박람회장 같아. 그 이름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어.

역시 바다를 제대로 보려면 다이빙 실력이 받쳐줘야 했던 거야. 나는 최대한 영화 속 슬로우 모션처럼 움직여. 천천히 부드럽게. 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무중력 상태로 날아다니는 것 같아. 그때 알았어. 공기와 물의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이미, 공기의 세계에 속했던 나의 정신이 사라졌다는 걸. 그래, 물 밖 세상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 거야. 오로지 바다 속 생명체들의 움직임에 집중해. 그 찬란함과 고요함에.

영화 <그랑블루>에서 자크가 이런 말을 했어. '물 속 깊이 내려가면 바다는 더 이상 푸른빛이 아니고, 하늘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남은 것은 오직 고요, 고요 속에 머물게 되지.' 라고. 문득, 그가 바닷속으로 사라져 가던 장면이 떠올랐어. 정말 그를 유혹한 바다는 '고요'였을까? 바다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어느새 해가 쨍쨍 났다. 마키닛 온천에서 두 시간 30여 분 머물렀다. 그만, 돌아가야겠다. 온천욕을 즐기고 있던 필리핀 가족도 맹그로브 숲 사이로 사라졌다. 

마키닛 온천에서 코론 시내로 가는 외진 길
▲ 코론 마키닛 온천에서 코론 시내로 가는 외진 길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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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품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온천 입구엔 얼쩡거리는 강아지 한 마리도 없었다. 언덕길을 걸어 도로로 올라섰다. 인적 없는 텅 빈, 외진 길. 나무그늘마저 인색한 황톳길. 서쪽 방향으로 코론 시내까지 5km쯤. 그쯤 걷는 건 내게 문제가 아니었다. 혼자 걷는다고 치안을 걱정할 지역도 아니었다. 문제는 땡볕이었다. 언제 비가 내렸나 싶게, 햇살이 살을 태울 듯 따가웠다. 나는 모자도 쓰고 있지 않았고, 민소매 반바지 차림이었다.

혹시 오토바이라도 지나갈까, 자꾸 뒤돌아보며 걸었다. 히치하이크를 할 생각이었다. 얼마나 걸었나. 나무그늘 밑에 멈춰 섰다. 생수병에 남아 있던 물을 탈탈 털어 마셨다. 그때, 트라이시클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재빨리 도로 안쪽으로 들어서며 손을 번쩍 들었다.

"헬로우~!"


태그:#코론, #스쿠버다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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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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