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의 생애>는 1938년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희곡이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 말미에서 갈릴레이와, 그의 제자 안드레아의 입을 통해서 두 개의 국가를 이야기한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나라'와 '영웅을 갖지 못한 불행한 나라'가 그것이다.

전자의 '영웅'은 불행의 조건이다. 후자의 '영웅'은 행복의 조건이 된다. 누구 말이 맞을까.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성스러운 영웅(성웅)' 이순신이 등장하는 영화 <명량>의 흥행 돌풍을 보며 떠올리는 질문들이다.

<명량>의 질주가 거세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다. '역대'가 들어가는 기록이 한두 개가 아니다. 지난 16일에는 지난 5년간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던 <아바타>를 제치고 역대 흥행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역대'급 기록의 정점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관객 수 '1500만'이라는 '꿈'의 숫자를 언급한다. 현재 추세가 이어진다면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명량>의 거침없는 질주는 정당한가. 솔직히 못마땅한 구석이 많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명량>은 '국뽕'을 환기한다. '국뽕'은 '국가'와 '히로뽕'이 합쳐진 말이다. 과도한 애국주의를 조롱하는 인터넷 속어다.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은 우리에게 이미 '만고의 적국'이 된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 이순신은 오직 '충'을 말한다. <명량>에서 애국주의를 떠올리는 건 아주 자연스럽다.

일부에서는 <명량>에서 '국뽕' 코드를 분석하는 게 무리라고 말한다. 애국주의 담론보다 이순신 '개인'의 고뇌가 더 비중 있게 그려져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면서 말이다. 고뇌하는 개인으로서의 이순신 이미지는 그 역사가 짧지 않다. 2000년대 초반 소설가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본격적으로 형상화한 이후 널리 퍼졌다. 이순신의 고뇌 코드는 일리가 있다.

오랫동안 '성웅'으로 각인된 이순신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주)빅스톤픽쳐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순신이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성웅'으로서의 이미지 조작 대상이 돼 왔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텍스트에서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이자 불멸의 장군으로 그려졌다. 영화와 드라마·교과서·책 등을 가리지 않았다. 우리에게 이순신은 이미 철저한 국가주의 영웅으로 각인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특히 40~50대 장년층이 <명량>의 흥행을 좌우한다는 점을 설명할 때 적절하다. 국가주의야말로 그들의 10~20대를 지배한 핵심 이데올로기로 보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1970년대와 전두환·노태우의 군부독재로 표상되는 1980년대는 국가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의문이다. 국가주의가 과연 40~50대에만 적용될까. 광화문 광장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이순신 동상을 떠올려 보자. 내가 보기에 동상을 바라보는 모든 세대의 시선은 공평하다. 이순신을 향한 관심의 다과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를 '성웅'이라는 국가주의 영웅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세대별·계층별 차이가 거의 없다. 육중한 갑옷에 긴 칼을 찬 장군 동상에서 달리 또 무엇을 배우겠는가.

'국뽕' 코드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초인적인 영웅을 불러온다. <명량> 돌풍 현상의 이면을 비판적으로 살필 때 가장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명량>의 외재적 의미도 이런 관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지난해 말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변호인>을 통해 이 문제를 잠깐 살펴보자.

'고뇌하는 이순신'은 어디로 갔을까

<변호인>의 주인공은 '송우석' 변호사다. 겉으로는 영웅처럼 보이지만 '국뽕' 코드가 환기하는 영웅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 또한 <명량>의 '이순신'처럼 초인적인 용기를 발휘한다.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공포를 경험한다. 하지만 그가 대적하는 상대는 거대한 국가 권력이다. 그가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우려고 했을 때 기댄 것은 보편적인 정의였다.

'이순신'은 '충'을 디딤돌 삼았다. 그것으로 나라와 백성, 왕을 한 꿰미로 엮었다. 무릇 '충'은 백성을 위한 것이며, 그 백성이 있어야 나라와 임금이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거두려 한 임금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거는 전투에 나섰다. 어찌 고뇌가 없었겠는가.

그렇다. 그의 고뇌의 뿌리에는 분명 '인간적'이고 '사적'인 측면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뇌의 결과는 항상 '공적'인 것으로만 구현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적인 직무를 수행중인 공인이었다. 책임이 막중한 '삼도수군통제사'였다. '개인 이순신'이 고뇌 속에 있었을지언정 현실은 공인으로서의 이순신만을 호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감독이 <명량>에서 그린 이순신은 철저하게 국가주의적인 영웅이었다. 어떤 관객에게는 막강한 적군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을 이순신을 그리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임금의 인간적인 배신감에 고뇌했을 이순신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순신의 그런 모습을 그려내는 일은 감독의 진정한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승리를 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의 부름'을 받은 그의 '영웅적인 행적' 덕분에 마침내 이뤄졌다.

<명량> 속 민초들... 못마땅하다

 영화 <명량> 속 한 장면.

영화 <명량> 속 한 장면. ⓒ (주)빅스톤픽쳐스

이순신 곁에는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된 상황에서도 노를 놓지 않는 격군들처럼 끝까지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정탐꾼 '임준영'(진구 분)처럼 목숨까지 버리며 희생했다. 이순신이 탄 장군 배가 회오리에 휩쓸리고 있을 때 조그만 목선 몇 척에 나눠 타고 와 장군선을 구해내는 이름 없는 백성들은 또 어떤가.

나는 이들 수많은 조력자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 매우 못마땅하다. 노꾼들의 희생과 정탐꾼의 장렬한 최후는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 어떤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불편했다. 이들을 향한 감독의 시선이 이중적인 것처럼 느껴져서다.

'명량해전'은 마침내 승리로 끝난다. 그들은 그 승리를 이끈 수많은 역사적 주체들의 생생한 실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뭔가 찝찝하다. 그들은 감독의 의식 속에서 끝까지 그런 위상을 가졌을까.

그들은 완전한 주체가 아니었다. 전투의 매 순간마다 그들은 철저히 지휘 계통에 따라 행동했다. 판옥선의 모든 장졸은 오로지 이순신의 입에 따라 움직였다. 애오라지 그들은 이순신이라는 주인공을 위한 조연일 뿐이었다. 감독의 머릿속에 주체로서의 위상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물은 이순신을 위한 '장식품'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에 대한 감독의 시선은 '기만적'으로까지 보인다. 피 튀기는 전투가 끝난 뒤, 격군들은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한 걸 후손들이 알랑가"라고 외친다. 이순신은 아들 '회'를 향해 "백성이 천운이었다"라고 말한다. 감독은 분명 백성, 곧 민중의 힘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해안을 따라 피난하던 백성들의 모습을 보라. 그들은 신을 모시듯 이순신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 이순신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모두 엎드려 그에게 절한다.

감독은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과 민초들의 뜨거운 협력을 설계했는지 모른다. 설계도는 뒤틀렸다. 이순신이 부상하고 민초들은 침몰했다. '명량'은 그들 모두의 것이어야 했으나 결국엔 이순신만의 것이 돼버렸다.

마치 '이순신의 명량'인데도 '모두의 명량'으로 보기를 강요하는 꼴이다. 감독의 시선이 '기만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명량>이 '졸작'이라는 혹자의 평가에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그것이 '명작'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말하고 싶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나라

 성역없는 진상조사를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유가족들이 장기 단식농성중인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앞 농성장.

성역없는 진상조사를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유가족들이 장기 단식농성중인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앞 농성장. ⓒ 권우성


세상이 어지럽다. 영웅에 의탁하고 싶어하는 사회 분위기가 뜨거워질 때가 잦다. 현실 속의 개인은 갈수록 무력해진다. 구조와 시스템은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이런 현실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영웅은 그 무기력을 정신적으로 보상해주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영웅에 열광하면서도 정작 세상 일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다. 그 어떤 뛰어난 영웅도 우리 모두를 대신 살아주지 않는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웅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나라'라는 갈릴레이의 말은 그르지 않다. 왜 그런가.

한때 '안철수'를 연호하던 이들이 있었다. 지금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비바 파파'를 외치며 교황 프란치스코에 뜨겁게 환호하는 이들이 많다. 교황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그들에게 끝까지 공감할 수 있을까. 교황이 떠나간 빈자리에는 환호의 함성만이 쓸쓸히 남을 듯하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국가주의의 대표 영웅 이순신이 등장하는 <명량>이 흥행 돌풍을 이어가는 2014년의 대한민국이 딱 그런 형국이다. 그런 점에서 거듭 강조하건대 '영웅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나라'라는 갈릴레이의 말은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

다만 전제가 있다. '불행한 나라'의 이유가 '영웅을 필요로 해서'라는 데에는 다른 해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민주주의 사회는 어떻게 붕괴하는가. 다른 사람은 안중에 두지 않는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서서히 무너져 간다. 그런 무관심 속에서 차별과 대립, 분열과 갈등이 쑥쑥 자라난다.

폐해가 없을 수 없다. 대립과 갈등을 이용해 세력 확대를 꾀하는 정치인과 권력자가 나온다. 그 모든 부조리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지레 체념하는 이들이 생겨난다. 자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영웅이나 강력한 리더가 출현해 그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있을 수 없는데 말이다.

<명량>의 '이순신'은 언젠가 우리 기억 속에서 떠나갈 것이다. 그때쯤 우리는 1500만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본 <명량>을 새삼스럽게 떠올리지 않을까. '그때 왜 그랬지'를 물으면서 말이다. 그래서 미리 묻고 싶다. 대체 우리는 지금 왜 <명량>을 보는가.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명량> 김한민 감독 이순신 국가주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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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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