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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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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에 대한 박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를 노조사무실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더니 급기야는 전태일 사진을 노조사무실에서 떼어버리라는 말까지 했다.

그날도 장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와보니까 노조 결성 때부터 벽에 결려 있던 전태일의 사진이 이소선의 눈에 안 보였다. 전태일이라는 노동자 투쟁의 혼을 빼버린 그저 그렇고 그런 노조, 무능, 어용노조를 만들겠다는 심사로 보였다.

이소선은 사무실 벽에 전태일의 사진이 걸려 있을 때는 장사를 하다가도 배가 고파도 희망을 가졌었다.

'친구도 있고, 태일이가 있으니까 언젠가는 노동조합이 잘 되겠지.'

이소선은 어려울 때마다 전태일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하늘도 올려다보면서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 이소선은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전태일의 사진이 없어진 것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악을 썼다.

"어떤 놈이 내 아들 사진 떼었냐?"

그러자 최종인도 흥분해서 함께 소리를 질렀다.

"OO놈 유인규, 이놈의 새끼, 내가 칼 갖고 OO버린다."

최종인은 눈이 뒤집힐 정도로 흥분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인규 동화상가 사장을 통해서 노조사무실에 있는 전태일의 사진을 떼라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박정권 측의 논리는 이랬다. 전태일 사건이 나자 평양에서 전태일 사진을 가지고 대규모 집회를 했으니 전태일의 사진을 노조 사무실에 걸어놓는 것은 결국 빨갱이와 똑같다는 억지 논리였다.

유인규 사장은 사용주 대표로서 단체협약에 체결된 조합비 일괄공제와 전임급료 지급을 해주지 않겠다는 수단으로 압력을 계속 가하고 있었다.

이소선, 지부장에게 박정희 사진 떼라고 요구

최종인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칼을 가지고 날뛰다가 동맥이 끊어져버렸다. 솟아오르는 피를 간신히 수건으로 감고 국립의료원으로 데리고 가서 꿰맸다. 전태일의 사진을 떼어낸 지부장은 그 자리에 박정희 사진을 달아놓았다.

"왜 태일이 사진은 떼고 박정희 사진을 붙이는 거야?"

이소선은 지부장에게 박정희 사진을 떼라고 요구했다.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박정희 사진을 건드릴 생각을 못했다.

"박정희 사진을 단 사람이 직접 나와서 떼 내!"

이소선은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가 직접 박정희 사진을 박살내 버렸다. 나중에는 그 자리에 전태일 사진도, 박정희 사진도 걸리지 못했다.

이소선은 길을 가거나, 장사를 할 때도 답답해서 할 말을 잃고 살았다. '노조 사무실에 태일이 사진이 없다니…'.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졌다. 슬펐다. '태일이가 얼마나 섭섭해 할까.' 이소선은 전태일이 노조사무실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죽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대로 그냥 죽을 수는 없었다.

'살아야지 태일이가 남긴 일들을 하지.'

이소선은 사진 한 장에 얇은 종이를 발라서 구겨지지 않게 그의 가슴에 걸고 다녔다.

'노조사무실에 태일이가 없으니, 이제는 늘 태일이를 내 가슴에 품고 다니자.'

이소선은 장사를 한참 하다가도 태일이 사진을 꺼냈다.

'태일아, 이 에미가 너를 직접 안고 다니기로 했다. 평화시장에서 네 친구들이 노동조합을 잘 하고 있고, 나는 그 애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이렇게 장사를 한다. 네가 그것을 알지? 우리 태일이는 알지?'

이소선은 전태일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손바닥에 얹어놓고 한참이나 얘기를 주고받는다. 사진 속에 담긴 전태일이 그 말을 알아듣는 것만 같다. 빙그레 웃는다. 말은 하지 않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그래, 우리 태일이 알아들었지?'

이소선은 손바닥으로 웃는 태일이의 뺨을 쓰다듬어 주고 다시 옷을 팔기 시작했다.

70년대 초반에 사용된 영정 그림
▲ 전태일 영정 70년대 초반에 사용된 영정 그림
ⓒ 전태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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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과 전태일 친구들은 노조활동 경험이 없었다. 노조운영을 배우기 위해 선출된 지부장과 사무장은 엉뚱한 행동만을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고 은연중에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였다. 얼마 지나자 노골적으로 기관의 요구에 순응하는 태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소선과 전태일 친구들은 이들을 감시하고 쫓아내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는 절박한 사정을 깨닫게 되었다.

구건회 지부장, 여성조합원 성희롱

이들 모두가 불만을 느끼고 있었는데 구건회 지부장이 못된 짓을 하다가 발각됐다. 간부들이 사업장에 활동하러 나가고 지부장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 여성조합원 하나가 사무실을 방문했다. 구건회 지부장은 느닷없이 그 여성조합원한테 종이에 성기를 그려놓고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그때 사업장 순회를 마치고 온 이승철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이승철이 들어서자 구건회는 그 종이를 슬며시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눈치 빠른 이승철이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승철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다가 나중에 쓰레기통을 뒤져 그 종이를 은밀하게 보관해두었다. 날을 잡아서 철퇴를 가하자는 것이었다.

8월 20일쯤이었다. 간부들이 전체 모인 자리에서 이승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지부장 이야기 좀 합시다."

이승철은 구건회에게 말을 건네고 부녀부장 정인숙한테 고개를 돌렸다.

"부녀부장, 창동에 택시 타고 빨리 가서, 책갈피에 접은 종이가 하나 있으니까 그것을 좀 가져오세요."

정인숙한테 말을 마친 이승철이 느긋하게 웃으며 구건회를 바라보았다.

"조합원들한테 요즘 뭐 잘못한 거 없습니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내가 조합원들한테 잘못을 하다니?"

구건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능구렁이처럼 발뺌을 하려 들었다.

"OO놈이 어디서 거짓말을 해!"

이승철이 단번에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빈 병을 깼다.

"정말이야?"

이승철이 빈 병을 구건회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다른 간부들도 구건회의 행동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터라 구건회를 둘러싸고 매섭게 노려보았다.

"정말 그렇다니까."
"좋아, 너 이 새끼. 정인숙 도착하면 두고 보자."

이승철은 이를 갈면서 구건회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정인숙이 도착했다. 이승철은 종이를 받아들고 펴서 구건회한테 보여주었다.

"이새끼, 이래도 거짓말 할 거냐? 여기가 어떤 자린데 네놈들이 조합원을 희롱해. 너 이 새끼 오늘 죽을 줄 알아."

구건회와 옆에 있던 김윤근의 얼굴이 단번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조합 간부들은 이들 둘한테 각서까지 받아냈다. 그들은 그날로 사임했다. 그렇게 해서 지부장은 공석이 되었다. 공석이 된 지부장 직무대리는 최종인이 맡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도 함께 연재 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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