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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박물관. 북성로 일대가 공구의 명소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답사지
 공구박물관. 북성로 일대가 공구의 명소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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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대구역 개통 이후 북성로는 단숨에 대구 최대의 번화가로 떠오른다. 대구역 건설 위치를 사전에 입수한 일본인들이 그 일대 땅을 진작부터 집중 매입하여 건물을 짓고 상권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결국 북성로는 일본일들에게 돈을 안겨주는 황금의 거위알이 되었다.

해방 이후, 북성로 1km 일대는 점차 공구 골목으로 변해간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폐공구를 수집하여 판매하기 시작한 1947년이 시초였다. 이윽고 온갖 공구와 부속물을 두루 갖춘 거리가 되자 "북성로 상인들이 힘을 합치면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가 되었다. 2012년 이래 공북문 터 오른쪽에서 문을 연 공구박물관은 북성로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순종이 지나간 길의 입구. 바닥에 '진입 금지'가 뚜렷하다. 그러나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이 길을 갔고, 달성공원에서 신사 참배까지 했다.
 순종이 지나간 길의 입구. 바닥에 '진입 금지'가 뚜렷하다. 그러나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이 길을 갔고, 달성공원에서 신사 참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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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문은 대구읍성의 북쪽 성문이다. 따라서 공북문 터 역시 현재 북성로 전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그 공북문 터에 서서 달성공원 쪽으로 바라보면 길이 삼거리로 나눠지는 지점이 보인다. 직진으로 이어지는 넓은 길이 북성로의 연속이고, 오른쪽으로 좁게 난 길은 수창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나아간다.

북성로는 1909년 순종이 지나갔던 길이다. 순종은 이등박문에게 이끌려 달성공원 안에 있는 신사에 참배하러 갔다. 순종은 이 삼거리에서 어느 쪽으로 갔을까? 상식적으로는 넓은 길, 즉 북성로 본길이다.

하지만 순종은 좁은 길로 갔다. '군자대로'라고 했는데 왜 순종은 넓은 길을 놔두고 굳이 좁은 길을 지나갔을까? 그래서 상식이 곧 진실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 성립된다. 당시에는 이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넓게 난 길이 없었다.

삼거리 바닥, 아니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의 바닥에 '진입 금지' 페인트 글씨가 뚜렷하다. 자동차가 교행할 넓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저절로 일방통행 도로가 되었다. 문득 상상력이 발동한다. 순종도 이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다. 황제가 일제에 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더라면 우리가 그리 쉽게 식민지가 되었을까? 순종은 국가의 지도자다운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수창초등학교 담장은 온통 순종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적은 게시물로 빽빽하다.
 수창초등학교 담장은 온통 순종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적은 게시물로 빽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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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박문에게 이끌려 다닌 순종이 대구에만 온 것은 아니다. 평양, 청도, 마산까지 돌아다녔다. 머잖아 조선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놓인다는 사실을 세계 만방에 기정사실화하려 한 이등박문의 정치적 책략에 철저하게 복무한 순종은 전국을 순회하며 허수아비 노릇을 했다. (그래서 수창초등학교 담장에는 '순종 황제, 조선을 걷다'라는 게시물이 붙어 있다. 대구만이 아니라 조선 전체를 순종이 다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이 지나간 이 길은 우리가 기념하고 숭앙할 가치가 전혀 없는 길이다. 평양도 물론 그렇겠지만, 마산, 청도 등이 '순종 어가길'을 기념하기 위해 수십 억 원의 국민 예산을 쓴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어째서 유독 대구사람들만 이토록 이등박문과 순종이 나란히 지나간 길을 기념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서소문 터에서 바라본 망경루 자리(대구은행 건물 앞 네거리)
 서소문 터에서 바라본 망경루 자리(대구은행 건물 앞 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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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어가길을 걸으면 서성로가 나타난다. 작은 네거리이지만 횡단보도가 없다. 왼쪽으로 신호등이 점멸하는 더 큰 네거리가 보인다. 네거리 길 건너편 오른쪽에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건물이 서 있다. 이상화의 큰아버지 이일우가 대륜학교의 모태가 되는 우현서루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현장이다.

대구은행 앞 네거리에서 북성로는 끝이 난다. 이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뻗은 길이 서성로가 된다. 대구읍성의 서쪽 성벽을 헐고 신작로를 내었던 것이다. 당연히 성의 모서리인 이곳에 아무 것도 없었을 리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무엇이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사라졌다. 본래 '서울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의 망경루가 있었는데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파괴한 이후 관풍루와 함께 달성공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도 아주 삭아버렸다. 그래도 관풍루는 본래 모습과 거리가 먼 형태로나마 복원되었지만 망경루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필자는 우현서루 앞에 선 채 "순종이 이등박문과 나란히 신사 참배를 하는 마당에 누가 아직도 임금께 충성을 맹세하며 서울을 바라볼 것인가? 임금이 대구 달성공원에 와서 이등박문과 함께 기생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상황에 북쪽을 바라본들 텅빈 궁궐뿐인데.... " 하는 생각에 젖는다.


태그:#북성로, #순종, #수창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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