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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산내 학살지... 마땅한 자료실도 없이 당시 학살사진들이 야외에 설치되어있다.
 대전 산내 학살지... 마땅한 자료실도 없이 당시 학살사진들이 야외에 설치되어있다.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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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학살 홀로코스트. 캄보디아 크메르루주가 저지른 대량학살 킬링필드. 우리가 집단학살(제노사이드)를 생각하면 쉽게 떠오르는 대표적인 사건들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건만큼이나 참혹한 집단학살이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아직도 그 학살의 상처로 기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말이지요.

경남 거창,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영동 노근리, 황해도 신천군 그리고 전국적으로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 한국전쟁 당시 숱한 사람들이 집단학살을 당했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학살 희생자 수는 남한만 약 100만 명이 됩니다. 교전 중에 죽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제외하고 학살만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입니다.

저는 SNS에서 웹포스터를 보고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에서 민간인 학살지 기행 '학살-말할 수 없는 역사' 행사를 연다는 걸 알았습니다. 행사 설명을 보고서야 우리나라에서 그런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행사 일정에 유가족들과의 간담회가 있는 것을 보고 직접 현장에 가서 그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9일, 민간인 학살지 1박 2일 기행에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 200여 명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이날 대학생들이 찾아간 곳은 대전 산내와 충북 영동 노근리였습니다.

대전 산내 학살지의 풍경은 생각과는 달리 초라했습니다. 위령비 하나와 유골함 하나, 위령비 뒤쪽으로 올라가면 사무실처럼 차려진 컨테이너 안에 학살 관련 사진 몇 점이 전부였습니다. 도착한 대학생들은 버스에서 내려 위령비 앞에 섰지만 처음에는 이곳이 산내 학살지인지조차 몰랐습니다. 평범한 밭이었고 한적한 시골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학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유가족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당시 학살당한 분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에 저는 '국가가 어떻게 국민을…'이라는 탄식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대전 산내에서 이런 비인간적인 학살이 일어난 것은 그곳에 대전형무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전 형무소에는 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 등으로 잡혀온 정치범들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1800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습니다. 단지 내란·사상범이란 이유로, 나중에 후방을 교란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그렇게 무참히 학살당한 겁니다.

8000여 명 학살... "64년 지나도 밭을 갈면 유골 나와"

대학생들에게 대전 산내 학살지를 설명해주는 유족회 회장
 대학생들에게 대전 산내 학살지를 설명해주는 유족회 회장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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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1800명이었지만 나중에 두 차례의 학살이 더 있었습니다. 예비검속된 대전지역 민간인들과 청주형무소 등 전국 각지에 수감 중인 정치범들이 실려와 산내에서 희생되었습니다. 총 8000여 명입니다. 이것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나온 바 있는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기구한 운명은 죽음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사상범이기에, 학살 이후에도 유가족들은 자신의 가족이 학살당했다고 입도 뻥긋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직도 학살지로 추정되는 곳에 묻혀 있습니다. 위령비가 세워진 곳 근처에는 64년이 지난 지금도 밭갈이를 하면 치아 같은 유골들이 여전히 나옵니다.

대전에 홍수가 심하게 난 어느 날에는 유골들이 냇가로 떠내려 와서 강둑을 막아버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유골들이 나병에 좋다는 미신 때문에 도굴꾼들은 학살지에 있는 유골들을 몰래 내다 팔았습니다. 산내 유족회 김종현 회장은 "죽어서도 개뼈다귀 취급받는 것"이라며 아직도 분에 차서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내 학살지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또는 알아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킬링필드니 유태인 학살이니 하지만 이런 곳이 세상 어딨는가? 64년이 지나도 밭을 갈면 유골이 이만큼씩 나오는데."

김종현 회장은 "우리는 다른 민간인 학살과 달리 형무소에서 벌어진 사상범 학살이기에 빨갱이 중에서도 '상빨갱이' 취급을 받는다"면서 "관이나 학자들에게 찾아가 봐도 외면하기 일쑤"라고 고백했습니다.

학살은 학살인데 이마저도 이념과 사상으로 가르고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이들에게 한 순간도 인간적인 대접을 허용하지 않았다니, 저는 점점 대한민국의 과거가 무서워졌습니다. 그러나 더 슬프고 더 무서운 이야기는 다른 유가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식을 둘이나 낳았는데도 이혼당했어. 연좌제인지 뭔지 나랑 내 새끼들을 빨갱이 자식이라는 거야."

어느 날 갑자기 고아가 되어 떠돌다가 어찌어찌 가정도 꾸리고 단란한 삶을 살아가는데 자식들을 낳고 보니 연좌제가 적용되어 빨갱이 자식이라며 한순간에 이혼당한 이야기, 그냥 원래 고아이려니 하고 살다가 참여정부 시절 과거사 문제 진실규명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부모님이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당한 걸 뒤늦게 알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 과거 재판기록 등을 파헤쳤더니 애초에 형무소 간 것이 억울했다는 이야기 등.

학살 희생자들은 억울하고 죽고, 죽어서도 인간적인 대접을 못 받았는데, 그 기구한 운명이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누군가는 "(학살 희생자들이) 이 사실을 알면 지하에서 한이 더 맺히겠다"라고 읊조렸습니다.

한 풀지 못하고 세상 떠나는 유가족들... '이유만이라도 알려주길'

당시 총알자국이 표시되어 있는 노근리 쌍굴다리
 당시 총알자국이 표시되어 있는 노근리 쌍굴다리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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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과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또 다른 민간인 학살지인 충북 영동 노근리평화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노근리 학살은 한국전쟁 당시 자행된 집단학살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입니다. 확실히 산내 학살지와 달리 큼지막한 영상관과 넓은 공원이 있었고, 나흘간 생지옥이 펼쳐졌던 쌍굴다리에는 아직도 그날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노근리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은 학살 생존자인 정은용씨가 1994년에 낸 책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와 1999년 <AP통신>의 보도 때문이었습니다. 노근리 학살은 우방국이라 생각했던 미군에 의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외신의 탐사보도로 세계적인 여론이 조성되자 그제서야 우리나라 정부는 반세기를 넘게 외면하던 노근리 학살 문제를 진상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2004년에 노근리 특별법이 제정되고 2011년에는 평화공원도 조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정은용씨를 비롯한 노근리 학살 생존자와 유족들의 평생을 걸친 투쟁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평생 동안 노근리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알리고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정은용씨가 바라는 건 '진상규명, 그리고 한국과 미국 정부의 사과'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군들이 '상부의 명령이 있었다'라는 증언을 했는데도, 2001년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사과가 아닌 '유감' 성명만을 발표했을 뿐입니다. 한국 정부는 미국과 관련된 문제에 으레 그렇듯이 더 이상 따져 묻지도 않았지요. 안타깝게도 정은용씨는 저희가 방문하기 불과 며칠 전인 지난 8월 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날의 한을 온전히 풀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한달넘게 단식중인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
 한달넘게 단식중인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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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를 다년 온 뒤 지난 14일, 저는 광화문 광장에서 노숙을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철저한 진상규명'을 외친 지 4개월이 지났습니다.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는 벌써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단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맞춰 매일 300명이 넘는 시민들이 동조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10일이 넘게 단식하는 시민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매일 하는 서명운동, 기자회견, 촛불문화제 등을 준비하고 단식자들을 돕는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학살지 기행에서 만난 유가족들로 자꾸만 겹쳐 보였습니다. 산내 학살지에서 만난 유가족 한 분이 제 손을 꼭 쥐면서 "젊고 똑똑한 대학생들이 제발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하며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꼭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억울한 죽음의 이유는 64년이 지난 지금도 모릅니다. 여전히 국가는 외면하고 있습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꼭 닮았습니다. 진실규명을 위해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에 동참하고, 유가족들이 청와대를 방문하고 도보순례를 하고 호소를 해도, 시청광장에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촛불을 들어도, 자식을 잃은 아빠가 죽을 각오로 곡기를 끊어도 마찬가지로 정부는 모르쇠입니다.

지금 세월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없었던 '기소권·수사권을 가진 진상조사위'가 필요한 것 아닐까요? '기소권·수사권을 가진 진상조사위'를 통해서 대한민국은 이들 앞에 솔직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억울한 죽음의 이유를 알고 싶다'는 민간인 학살 유가족들과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의 공통된 바람이 꼭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김태현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통신원입니다.



태그:#학살지, #한대련, #노근리, #대전 산내,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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