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에서 잠시 잠을 청하던 19살 캄보디아 여성 타 셍 학은 익숙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의 비명소리에 잠에서 깼다. 분명 엄마였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든 그녀는 자신의 키보다 높이 자란 사탕수수밭을 헤집으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거대한 사탕수수 수확용 트랙터 앞에 멈춰 선 순간, 그녀는 도저히 믿기지 않은 잔혹한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날카로운 사탕수수 커터 날에 사탕수수 조각처럼 갈기갈기 잘린 사람의 살덩이가 고작  20kg 짜리 사탕수수 포대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계 틈 사이엔 피가 묻어 있었고,   그 사이로 눈에 익은 스카프 조각이 보였다. 그녀의 44살 된 엄마가 평소 하고 다니던 스카프였다.'

이 이야기는 지난 3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캄퐁 스프지역 한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어났던 실제사건이다. 피해자의 딸이 미국 ABC 방송국과 지난 4월 29일 한 인터뷰 내용을 재구성해 본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해외에 수출되는 대부분의 설탕은 이 나라 농민들의 피로 만들어진 설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캄보디아에서 해외에 수출되는 대부분의 설탕은 이 나라 농민들의 피로 만들어진 설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박정연

관련사진보기


상상만으로도 정말 끔찍한 사고지만, 캄보디아에선 이전에도 여러 차례 비슷한 사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에도 비슷한 사고로 17살 어린 소년이 목숨을 잃었다. 점심 식사 후 사탕수수밭에 들어가 낮잠을 자다가, 사탕수수 수확용 트랙터에 달린 거대한 칼날 속으로 몸이 빨려들어간 것이다.

이 두 희생자들의 공통점은 비슷한 사고로 숨진 사탕수수농장 노동자였다는 사실 말고도 두 가지 더 있다. 첫째는 거대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 어느 특정 재벌에 의해 자신과 가족이 평생 지켜온 농지를 모두 빼앗겼다는 것이고 둘째는 결국 그 재벌이 운영하는 사탕수수 농장 일용노동자로 전락한 가난한 농민이란 사실이다.

건설, 전기공사, 담배 생산, 호텔, 관광...

그 재벌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거대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무지비한 토지수탈의 주범으로 불리는 '리용팟'(Ly yong phat)이란 사람이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 중 한 명인 동시에, 상원의원이기도 하다.

지난 2011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주 프놈펜 미국대사관 기밀문서(2007년도 작성)에 따르면, 그는 태국계 출신이며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임에도 불구하고 태국국경지대인 '꼬콩'의 왕이라 불린다. 문서에서 그는 태국 국경 주변지역은 물론이고, 양국 정치인과 사업가들을 연결하는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진 인물로 묘사됐다. 

그는 현재까지 정부 허용 수준을 넘는 10만헥타르 이상의 땅에 대한 양허권을 갖고 있으며, 무자비한 토지수탈 재벌로 악명 높다. 그는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과정에서 군헌병을 동원하여 농민들이 경작한 곡식과 수목들을 태워버린 적도 많다. 현재 그가 하는 사업은 사탕수수농장 뿐만이 아니다. 건설, 전기공사, 담배 생산, 호텔, 관광, 카지노 리조트, 수입 자동차 판매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손을 뻗치지 않은 사업이 없을 정도다.

재벌들의 강제토지수탈과 무자비한 폭력에 항의하는 농민들의 집회와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는 수도 프놈펜 시내의 모습.
 재벌들의 강제토지수탈과 무자비한 폭력에 항의하는 농민들의 집회와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는 수도 프놈펜 시내의 모습.
ⓒ 박정연

관련사진보기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그의 캄퐁 스프 사탕수수농장의 크기도 무려 8343헥타르나 된다. 그는 꼬콩주 등 다른 지역에도 수십만 헥타르 규모의 어마어마한 사탕수수 경작지를 자신과 부인 등 가족명의로 소유하고 있다.

그가 그동안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농민들을 상대로 저질러온 악행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구글로 대충 검색 해봐도, 그가 연루된 토지논쟁 관련 기사가 줄줄이 나온다. 너무 많아서 다 읽기 어려울 정도로. 개인 소유 소규모 논과 밭 진입로를 마음대로 막아버리는 일은 기본이고 농민들이 살던 가옥들을 불도저로 무작정 밀어버린 적도 많다. 농장에서 기르던 소와 같은 가축이 사탕수수 밭 영내로 들어올 경우, 총으로 쏴 죽이거나, 돌려주는 조건으로 한 마리당 25~50달러씩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가 부패한 정부 관리와 경찰들의 비호 아래 대규모 사탕수수 경작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벼농사를 지으며 살던 농민들이 터무니없이 낮은 보상금을 받고 강제로 쫓겨난 일도 다반사다. 이를 거부하다가 이 재벌이 고용한 무장 사설경비들에게 폭행을 당한 농민들도 부지기수다. 

재벌에 농지 빼앗긴 농가 수만 무려 1500가구

생활방편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일부 농민들은 할 수 없이 자신들을 강제로 쫓아낸 사탕수수 농장의 인부로 취직해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일종의 '소작농'으로 전락한 셈이다. 지금도 하루 2.5달러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농민들이 많다. 인권단체들은 이 사탕수수 농장이 13~15세 남짓한 미성년자들도 인부로 고용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권단체들과 피해 농민단체들의 항의가 거듭되자, 이 재벌이 운영하는 설탕가공회사에 자금을 지원해 온 한 은행은 최근 이 회사에 대한 투자 거래를 중단했다. 이 설탕가공회사측도 이 은행과의 거래를 중단했음을 최근 밝혔다. 그러나 논란의 중심에 선 이 재벌은 현지 언론을 통해 "인권문제를 포함해 환경문제 등 어떠한 일도 합법적으로 했다"고 여전히 항변하고 있다.

현지 인권단체들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2010년부터 그가 운영하는 사탕수수농장으로부터 농지를 빼앗긴 농가 수는 무려 1500가구가 넘었다. 농장에 바로 인접한 그의 아내가 소유한 플랜테이션은 토지수탈을 당한 수백여 명의 농민들에게 단 한 푼도 보상한 적이 없다고 한다. 최대로 보상을 받은 경우도 농가당 우리 돈 50만원 정도 수준. 대체 토지로 받은 땅의 경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면적이 작거나, 농지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황무지라고 농민들은 항변하고 있다.

재벌들의 강제적 토지수탈에 항의하며 진압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다리에 상처를 입은 나이든 한 여성농민의 모습.
 재벌들의 강제적 토지수탈에 항의하며 진압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다리에 상처를 입은 나이든 한 여성농민의 모습.
ⓒ 박정연

관련사진보기


최근 인권단체 리카도(Licahdo)도 이 회사를 겨냥해 "캄보디아 사탕수수 산업의 발전은 강제적인 토지수탈과 거주 농민들을 상대로 한 무자비한 폭력, 인권 착취와 유린, 자연환경 파괴 등이 동반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국제인권단체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주요 수입상인 코카콜라와 펩시도 지난해 캄보디아 현지 사탕수수농장들과 설탕가공회사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벌였다. 특히 코카콜라측은 지난 2월 자체 감사팀을 보내 현장실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두 회사 모두 농민들을 상대로 한 토지수탈에 따른 부당한 문제들에 대해 '무관용 원칙'(Zero Tolerance)을 고수하겠다고 강조했었다. 피해 농민들과 직접 대화를 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도 취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코카콜라와 펩시 두 회사는 피해사례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해선 현재까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토지수탈과 관련된 인권 및 재산 침해 문제에 대해서 일반적인 수준의 우려를 표명했을 뿐이며, 해당 거래처에 대해서도 단순히 경고하는 수준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재벌들의 토지수탈 은밀히 도와주는 정부 관료들

현재 캄보디아에서 생산되는 설탕은 영국 등 유럽국가에 90%이상 팔려 나간다. 캄보디아 상공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유럽에 수출된 캄보디아산 설탕은 무려 6만5000톤에 이른다. 수출이 잘 되는 이유는 가격경쟁력 때문이다. EU는 저개발국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군사무기를 제외한 대다수 수출상품에 대해 무관세를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특혜가 가난한 농민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리용팟과 같은 특정 재벌의 주머니 불리기에 악용되자, 인권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국제 인권관련 NGO들은 EU측에 이 회사의 설탕 수출에 대한 무관세를 중단해달라고 수차례나 요청했다. 인권 단체들은 캄보디아 정부에도 이러한 인권탄압 등에 대한 정식 조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훈센정부는 이에 대해 수년째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고 있다. 한 번도 이 재벌기업이 정부로부터 이와 관련된 감사나 조사를 받은 적이 없으며 현재까지 이 회사의 대유럽 설탕 수출이 제재조치를 받았다는 뉴스는 들려오지 않는다.

사실 캄보디아에서 토지분쟁에 연루된 재벌이 리용팟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수많은 재벌들, 심지어 현직 장관들의 부인을 비롯한 친인척들까지 비슷비슷한 토지분쟁에 연루돼 있다. 군인과 경찰 등 공권력을 악용해 농민들을 내쫓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전국적으로 토지분쟁에 휘말린 농민들이 이미 50만명 수준을 넘어섰다는 최근 인권단체 통계자료도 있다.

지난 5일(현지시각)에도 토지수탈 피해를 입은 크라체 지방 농민들이 프놈펜에서 집단 시위를 벌였다. 농민 수백여 명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토지 문서를 복사해 피켓으로 만들어 든 채 시내 중심가를 가로 질러 훈센총리의 개인사저 앞까지 진출했다. 훈센총리에게 직접 탄원서를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쏘마나린'이라 불리는 50대 여성 시위자는 진압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팔을 다치자 "우리는 멀리 시골에서 왔다, 남편과 함께 수십 년을 살아온 내 땅이다, 그런데 경찰이 쳐들어와서 집기를 부시고 살던 집도 부쉈다, 남편도 말리다 다쳤다"면서 "이제 내가 살 땅은 세상에 없다, 정부가 준 토지문서도 있다고 보여주었지만, 그 회사 책임자는 그것은 무시했다"라고 울부짖었다.

피의 설탕이 들어간 콜라를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

사탕수수 즙을 짜서 만든 음료를 파는 상인의 모습
 사탕수수 즙을 짜서 만든 음료를 파는 상인의 모습
ⓒ 박정연

관련사진보기


캄보디아 야당 여성중진의원 무소쿠도 지난 4월 영자신문 <프놈펜 포스트>에 이와 관련, 영국 무역 대표부 공사에게 보내는 기고문을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무관세 무역과 관련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특정 재벌만 살찌우는 잘못된 무관세 특혜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녀는 편지 마지막 줄에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우리 농민들의 피로 더럽혀진 설탕 무역을 끝낼 필요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잘못된 혜택이 개선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우리가 마시는 콜라 속에도 어쩌면 캄보디아 농민들의 피로 만들어진 설탕이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서글픈 콜라에 담긴 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태그:#캄보디아, #LEE YONG PHAT, #박정연, #캄도디아 사탕수수, #토지수탈 재벌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