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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씨는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입니다. A씨는 저의 멘티입니다. 사범대학 4학년인 저는 지난 6월부터 A씨와 멘토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3개월이 다 되어갑니다만 실은 일 주일에 한 번, 그것도 두 시간씩만 이야기를 나눴으니 그리 오랜 시간을 본 것은 아닙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얼마 전부터 A씨와 꽤 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A씨가 저에게 닫고 있던 마음을 이제야 조금씩 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A씨가 가지고 있던 고민은 대인관계 문제였습니다. 자신의 발음이 어눌하고 목소리도 작아서 친구들과 의사소통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말을 하면 친구들이 잘 알아듣지 못해서 오래 대화할 수 없었고, 점점 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힘들어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A씨와 상의해서 스스로 문제점이라 생각하고 있는 발음과 목소리를 고쳐나가기로 했습니다. 우선 목소리를 크게 하기 위해서 말할 때 입을 크게 벌리고 목소리 톤을 올려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고 녹음한 것을 직접 들어 보는 방법으로 정확하게 발음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감이었을 겁니다만, 이 작은 방법만으로도 A씨는 꽤 좋아졌습니다. 말할 때 의식적으로 입을 크게 벌리려고 하고 발음도 신경 쓰기 시작하니,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어딘가 어두워 보였던 얼굴도 조금씩 펴지는 듯 싶었습니다.

알파벳도 쓰지 못하는 고등학교 3학년

그러던 중 지난 10일, 상담을 통해 믿지 못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저는 A씨에게 글로 써가며 설명하기 위해서 A씨의 노트를 빌리게 됐습니다. 빈 종이를 찾아 노트를 넘기던 중, 조금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A씨의 영어 단어장
 A씨의 영어 단어장
ⓒ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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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의 영어 단어장을 보게 된 것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외우기에는 지나치게 쉬운 단어들만 보였습니다. 초등학교 4~5학년이 배울 법한 기초적인 단어와 발음이 적혀 있었습니다. 의아한 마음에 질문했습니다.

"A야. 이거 요즘 외우는 단어야?"
"네. 이거 요즘에 외우고 있어요."
"너무 쉬운 단어들 같은데?"
"제가 영어 공부를 거의 안해서..."


믿기 힘든 대답이었습니다. 올드(old), 뉴(new), 헬프(help) 등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를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외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A씨는 며칠 전까지 이 단어들을 들어는 봤지만 정확한 뜻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A씨의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은 알았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혹시 장난을 치는 건가 생각했지만 매사에 조심스러운 A씨는 진지했습니다. 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질문했습니다.

"혹시 영어 알파벳 다 쓸 수 있어?"
"알파벳이요? 써볼게요."


그리고 A씨는 알파벳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ABCDEFGH...ZWVKN... 13글자 그것도 순서조차 틀리게 적고는 더 이상 쓰지 못했습니다. 믿기 힘들었습니다. 분명 내 앞에 앉아 있는 학생은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맞습니다. 불과 10분 전까지 저와 어느 대학교로 수시를 넣을지 이야기를 하던 수험생입니다.

"그러면... 사과를 영어로 써볼래?"
"애플이요? 에이(a)..."


에이(a)에서 더 적지 못합니다. 제가 철자를 하나하나 불러주었습니다.

"에이(a), 피(p), 피(p), 엘(l), 이(e)."
"a, p, p, 엘... 엘을 어떻게 써야 하죠?"


소문자 엘(l)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영어시험을 봤었는지 물으니, 그냥 찍었다고 합니다. 영어점수는 항상 10~15점. 비평준화된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A씨가 자신의 성적을 중하위권이라고 했던 말이 슬프게 떠올랐습니다.

멘토링을 마치고 집에 오는 내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손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알파벳을 다 쓰지 못하는 A씨에게 화난 것이 아니라, 그간 A씨가 '학교'라고 매일 같이 등교한 그곳에 화가 났습니다.

지난 12년간 A씨의 선생님들은 무엇을 했는가

7차 교육과정에 따르면 A씨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어 알파벳 쓰기는 중학교 1학년의 성취기준에 해당합니다. 중학교 때 배웠어야 할 알파벳을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지금도 쩔쩔 매고 있는데, 과연 지난 12년 동안 학교는 무엇을 한 것입니까?

7차 교육과정 영어과 성취기준
 7차 교육과정 영어과 성취기준
ⓒ 교육과정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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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 많은 영어 선생님들은 A씨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무엇을 가르친 것일까요? 12년간 A씨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운 것입니까?

A씨가 정상적인 교육 과정을 따라 영어를 배웠다면, 고등학생 성취 목표인 간단한 기행문을 영어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과거 경험이나 미래의 계획을 영어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A씨에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들 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인 A씨가 알파벳을 다 쓰지 못할 정도라는 사실은 여전히 믿기 힘듭니다. 공부가 학교 역할의 전부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지식은 알려 주어야 합니다. 학교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12년간의 의무교육을 마친 A씨가 요즘 유치원에서도 배운다는 알파벳을 다 쓰지 못한다면, 학교가 제 역할을 다 해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고 공부하지 않은 것은 A씨 개인의 책임이라 말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반은 맞습니다.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고 지도가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학생에게 교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A씨가 소질이 없다면 소질이 생길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고, 공부에 관심이 없다면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입니다. 혼자서 잘 하는 학생보다 그렇지 않은 학생에게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A씨가 게으른 탓이 아닙니다. 공부하지 않는 A씨를 이끌어 주지 않은 것은 명백히 학교의 잘못입니다.

이 문제를 잘못된 교육구조 탓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자사고와 특목고 때문에 일반고는 공동화되었고,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낙오하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괴물 같은 대학입시는 여전히 굳건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목표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의 A씨를 만든 선생님들, 어디 갔나

그러나 이런 기형적 구조가 현실이라 하더라도 교사들의 '무관심'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알파벳조차 쓰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최소한의 노력'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A씨를 거쳐 간 수많은 교사들이 조금의 관심이라도 가졌다면 그가 알파벳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 상황이 가능한 일입니까? 수많은 선생님들이 A씨를 방관한 것이 아니라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나요?

A씨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학업도 힘들다고 합니다. 학교가 A씨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A씨가 이토록 자신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A씨는 학교에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움츠러든 것일까요?

이 문제는 A씨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분명 지금 대한민국의 교실에는 또 다른 A씨들이 있을 것입니다. A씨를 거쳐 간 수많은 교사들과 또 다른 A씨 앞에 서계신 교사분들이 엉망진창인 이 글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마음에서 글을 적습니다. 답해 주십시오. 아이들을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단 한 명의 학생이라도 챙겨 주십시오.

저는 지금 화를 참으며 글을 적고 있습니다. 대체 '선생님'들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태그:#공교육, #자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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