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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이 없네."

토익 930점, 한자능력검정시험 2급,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 해외어학연수까지. 1년반 동안 꾸준히 취업준비를 하며 스펙을 만든 박아무개(28·여)씨는 면접장에서 좌절했다. 박씨의 이력서에는 경력란이 비어있었다. 박씨는 면접장에서 질문 하나 받지 못했다. 다른 경쟁자들이 자신의 경력을 어필하는 모습만 바라보고 돌아왔다. 결과는 당연히 낙방이었다.

취업준비생들은 스펙은 물론이고 경력사항까지 챙겨야하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며 하소연한다.

"취업준비생에게도 카스트가 있는 것 같아요."

2년 가까이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는 윤아무개(26·여)씨는 "가장 낮은 계급은 스펙도 경력도 없는 준비생, 그 위로는 경력은 없고 스펙만 있는 준비생, 그 위는 스펙과 경력을 갖춘 준비생. 저는 뭐 그저 불가촉천민이죠"라고 말했다. 윤씨는 졸업 후 관련경력이 없이 공백기가 늘어나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경력같은 신입'이 대세

졸업 후 공백기간이 길어질수록 취업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취업준비생들에게 이미 익숙하다. 언론계에 취업한 이아무개(27·여)씨는 1년 전 바라던 회사는 아니었지만 일단 입사해 경력을 쌓으며 신입공채를 노렸다. 현재는 원하던 곳에 합격했다.

이씨는 관련 경력을 합치면 총 15개월 차인 '경력같은 신입'이다. 이씨는 "요새는 공백기간이 길면 면접에서 꼭 물어보고 관련경험이 없으면 투명인간 취급을 받다가 나온다"며 "일하지 않고 준비만 하고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요새는 지원자의 잠재력보다 경력란의 한 줄로 증명하는 분위기니 일하면서 준비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언론계 취업시장에서 '경력같은 신입'을 원하는 현상은 1년정도 지속됐다. 이현택 <중앙일보> 기자가 2013년 <신문과 방송>에 발표한 <언론계 신입기자 채용 동향: 경력 같은 신입 늘고 나이 장벽도 무너져>라는 글은 언론사 채용제도의 변화를 분석했다. 그는 이 글에서 "경력 있는 수습기자들이 많이 생겨나는 현상이 꾸준했다"라며 신입채용으로 뽑는 수습기자 채용에 '경력같은 신입'이 들어오는 것이 추세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경향은 언론계뿐만이 아니다. 기업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가장 많이 고려하는 요소가 '경력사항'이라는 조사결과도 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포트폴리오 SNS 웰던투>는 지난 6일 채용담당자 59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7.8%가 서류전형에서 '경력사항'을 가장 중요시한다고 말한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면접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요소로 '실무능력 경험'이라고 답한 채용담당자가 48.3%로 가장 많았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포트폴리오 SNS 웰던투>는 기업 채용 담당자 59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복수응답)한 결과 57.8%가 서류전형 당락을 좌우하는 요소로 지원자의 경력사항을 꼽았다고 밝혔다.
▲ 잡코리아가 지난 6일 실시한 <입사합격 요소 1위는?> 조사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포트폴리오 SNS 웰던투>는 기업 채용 담당자 59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복수응답)한 결과 57.8%가 서류전형 당락을 좌우하는 요소로 지원자의 경력사항을 꼽았다고 밝혔다.
ⓒ 정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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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생들은 이러한 경향이 취업 시장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낳는다고 하소연한다. 은행권 취업을 1년 반 정도 준비한 이이무개(25, 여)씨는 인턴 시험에서 낙방한 경험을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요새 인턴은 누구나 다 한다고 하는데, 인턴되기도 너무 힘들거든요. 인턴면접에서 경력없다고 차갑게 나오면 정말 힘빠지죠. 경력을 쌓으려고 인턴을 하는 건데 경력 없다고 안시켜주니까요. 그래서 되는 애들은 계속 돼요. 안 되는 애들은 경력 없다고 계속 안 되는 거죠."

출판계에서 2년째 일하고 있는 김아무개(28·여)씨는 경력이 없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 관련 기관에서 운영하는 교육이수프로그램을 이수했다. 이씨는 "출판계는 신입을 정말 조금 뽑아서 관련 기관 교육과정을 이수한 애들 위주로 신입을 뽑는다"라며 "그 과정이 정말 별것도 없는데도 현실은 그렇다"고 말했다. '경력이 곧 스펙'인 취업시장에서는 일단 작은 회사라도 입사했다가 이직하는 것이 아니면 신입채용에 합격하기는 하늘에 별따기다. 김씨는 이어서 말했다.

"출판계는 경력직 인력이 많은 편이기에 임금이 짜죠. 나쁜 회사들은 저임금으로 경력직을 쓰려고 신입으로 뽑기도 해요. 사실 출판계는 경력이 스펙이에요. 그래서 선배들도 '일단 어디든 들어가서 일해라, 그러고 경력 쌓아서 이직해라' 이래요. 그래야 일년이라도 경력이 생기니까요."

최근 시작된 '시간선택제일자리'가 경력단절 취업준비생들을 대거 끌어모으면서 취업준비생들의 취직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나왔다.

금융계에 종사하는 김아무개(27·여)씨는 "요새 시중 은행에서 하루 평균 4~6시간 일할 경력단절여성을 뽑는데, 높은 경력이지만 시간제니까 적은 임금으로 활용할 수 있다"며 "경력직을 적은 금액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 신입채용이 어려워지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예전에는 텔러마케터도 다 신입으로 뽑았는데, 요샌 경력단절로 뽑고 무기계약으로 써버리니까 신입이 들어갈 틈은 없다"며 "경력 없는 애들의 악순환은 계속된다"고 말했다.

'스펙초월'하는 경력 선호, 기업 측에선 "어쩔 수 없어"

취업준비생의 입장에서는 경력없는 악순환이 계속 되지만 신입사원을 뽑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스펙보다 경험을 보는 것이 실무에 투입됐을 때 성과가 좋기때문이다.

대기업인 S그룹에서 2년간 인사팀으로 일했던 이아무개(27·여)씨는 "취업준비생들의 평균선이 워낙에 높아졌기 때문에 스펙과 경험을 두루 갖춘 사람들이 많다"며 "1~2년 경력이 있는 지원자들이 면접에서 할 수 있는 말도 많고 면접관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상인 것같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아무래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쌩초자'는 금방 그만 둘 수도 있기 때문에 경험이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앞서 설문조사를 내놓은 잡코리아 측에서는 최근 취업 트렌드가 '스펙초월'이라며 스펙보다 경력을 선호하는 경향이라고 분석했다.

잡코리아 커뮤니케이션팀 정주희 과장은 이번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스펙초월'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느 기간동안 스펙만 보고 신입사원을 뽑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시기의 신입사원들이 1년 이하로 퇴사하는 경우가 많아 트렌드가 바뀌었다"며 "스펙을 초월하는 경험과 경력위주로 평가하는 경향이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충성도가 높고 오래 일할 사람을 선호하기 때문에 자기소개서에도 관련경험을 쓰라고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정민경 기자는 <오마이뉴스> 20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취업준비생, #경력, #신입, #잡코리아, #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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