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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는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구조 실패의 원인뿐만 아니라 사건 발생의 원인에 대해서도 이제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반복되는 재난사고 속에서 왜 우리가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게 되었는지 시민들과 함께 공유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과 안전위원회'는 연속칼럼을 통해 '살아남은' 우리의 의무와 우리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중인 단원고 희생자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가 9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중인 단원고 희생자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가 9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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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18일째, 세월호 유가족이 수사권, 기소권이 포함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을 시작한 지 29일째 되는 날이다. 며칠 전, 여야 원내대표는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진상조사위원회에 부여하지 않고 따로 특별검사를 임명해 조사를 진행하도록 하며, 특별검사의 추천도 현행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대로 한다는 내용으로 합의했음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유가족은 물론 각계각층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새정치민주연합은 11일 밤 의원총회를 통해 재협상을 결정했다.

새정치연합측이 재협상을 결정하긴 했지만, 앞서 여야가 합의한 특별법 내용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끊임없이 요구했던, 성역 없는 조사를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 설립과는 거리가 멀다.

세월호 가족들은 8월 9일부터 새정치민주연합 당사 사무실에서 여야 밀실 야합 철회를 촉구하는 항의행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도 1인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참사가 일어난 후 지금까지, 세월호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히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호소하고 활동하며 유래 없는 결과를 얻었다. 수사권, 기소권이 포함된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해 한국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내에 400만 명에 가까운 서명을 받았으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해서라면 검찰의 영역으로만 생각되었던 기소권이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에 주어져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대형 참사의 진상조사를 이끌어내는 힘은 이처럼 유가족들과 시민들로부터 나왔다.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시작이자 제2의, 제3의 세월호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다.

9·11 국가위원회, 테러 발생 14개월 뒤에야 설립

2001년, 3000여 명이 사망한 9·11 테러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9·11 국가위원회의 공식 명칭은 '미국 테러 공격에 대한 국가위원회(The National Commission on Terrorist Attacks Upon the United States)'다. 9·11 국가위원회는 세월호 특별법처럼 미국 공법(Public Law) 107-306에 의해 9·11 테러가 일어난 지 약 14개월 뒤인 2002년 11월 27일에 설립되었다.

조사위원은 여당 추천 5명, 야당 추천 5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으며 위원장은 대통령이, 부위원장은 야당이 임명했다. 위원회는 약 20개월 동안 활동하며 12차례의 청문회 개최, 1200여 명의 관계자 인터뷰, 250만 페이지에 달하는 문서를 분석했으며 그 결과 약 2만 페이지에 달하는 결과 보고서를 2004년 7월에 발표했다.

9·11 국가위원회가 설립되는 데는 유가족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12명의 유가족들로 구성된 '9·11 독립위원회를 위한 가족운영위원회'(Family Steering Committee for the 9/11 Independent Commission)는 사고가 일어난 후부터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 설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들 중 9·11 때 남편을 잃은 4명의 여성들로 구성된 '저지 걸스'(Jersey Girls)는 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유가족들의 활동은 9·11 국가위원회가 설립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청문회에 나온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 선서하지 않고 증언하겠다고 하자 유가족들은 저항의 의미로 모두 청문회장을 나가버렸고, 결국 라이스 보좌관은 증언 전에 선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가족들은 9·11 국가위원회 초기 위원장으로 임명된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전 국무장관을 사퇴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선거 즈음 발표되기로 되어 있던 9·11 국가위원회의 최종 보고서가 2004년 선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최종 결과 보고서 발표 일을 미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또한 유가족들은 언론과 정부가 제대로 공개하지 않은 문서들을 자신들의 웹사이트에 올려 조사 과정에서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2011년 5월 5일(현지시각) 9.11 테러로 붕괴한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를 방문해 헌화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2011년 5월 5일(현지시각) 9.11 테러로 붕괴한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를 방문해 헌화하고 있다.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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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국 세월호 유가족들과 마찬가지로 9·11 유가족들의 활동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참사 이후 목격자들의 기억과 증거가 남아 있을 때 최대한 빨리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지 부시(George W. Bush) 당시 미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조사위원회 구성을 거부하다가, 사건 발생 1년 2개월이 지난 후에야 위원장을 자신이 임명한다는 조건 아래 위원회 구성에 동의했다.

유가족들은 "정치적이며 과격하고 국가 안보를 저해하는 집단"이라는 비판에 시달렸으며 언론과 9·11 참사 진상규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기도 했다. 진상규명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위원회 활동 과정에서 백악관과 의회에서 열리는 회의에 초대받아 참석하기도 했으나 공개되지 않은 그 회의들에서 몇몇 의원들은 유가족들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9·11 유가족이자 저지 걸스의 멤버였던 크리스틴 브릿와이저(Kristine Breitweiser)는 유가족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우리의 활동이 대부분의 시민들처럼 투표소에서 시작하고 끝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정치인들이 독립적인 9·11 국가위원회를 설립해서 테러 공격을 조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공개적으로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9·11 때 남편을 잃은 우리들은 우리의 아이들을 지켜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도 자식이 있다면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걸 알겠지요.

우리에게는 포기하고 싶었던 많고 많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너무 지치고 겁도 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우리는 왜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가 죽었는지 아이들에게 말해줘야 하고 그들이 더 안전한 미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죠."

유가족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9·11 국가위원회의 최종보고서는 유가족들이 제기한 많은 의혹들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9·11 사태의 원인과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열두 차례나 열린 청문회에서 언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최종 보고서에는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9·11 국가위원회가 세월호 진상규명에 시사하는 점들

9·11 국가위원회가 '독립적인' 위원들로 구성되었다는 점, 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위원회라는 점, 12차례나 청문회를 진행했다는 점, 전현직 대통령과 부통령들을 모두 청문회에 불러 성역 없는 조사를 진행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종 보고서가 유명무실했던 이유는 위원회 위원 선정 과정에 유가족들이 참여하지 못했고 위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했으며, 사건이 발생한 지 14개월 후에야 설립되어 이미 행정부가 9·11 국가위원회의 검토 없이 제반조치를 취한 후에 권고가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9·11 국가위원회는 그 활동과 위원 선정에 있어서 독립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수도 없이 받아왔다. 참사가 일어난 지 1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9·11 유가족들은 9·11 국가위원회가 다 밝히지 못한 의혹들에 대해 꾸준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유가족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고 철저한 조사권과 수사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처럼 자명하다. 진상조사위원회가 충분한 권한과 조사기관을 갖지 못하면 위원회의 활동은 요식행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진상규명의 중심에 유가족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반영되지 않을 때 정치적 이익에 묻혀 철저한 진상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의 사례에서도 보고 있다.

지난 4월 16일, 우리는 눈앞에서 304명의 소중한 생명들이 사망하고 실종되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무능한 정부에 절망했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다고, 유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하겠다고, 세월호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안전사회를 만들어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세월호 참사 120여 일이 지난 지금, 여전히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고 책임자는 처벌되지 않았으며 가족들은 곡기를 끊고 국회로, 광화문으로, 길거리로 나서고 있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길은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철저하게 세월호 진상규명을 해나가는 것이다.

9·11 테러로 여동생을 잃고 그 이후 반전평화운동을 계속해오고 있는 테리 록펠러(Terry Rockfeller)씨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메일을 보내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은 그런 비극은, 특히 아이들을 잃은 비극은, 엄청난 분노와 슬픔을 남기지요. 저는 여전히 모든 세월호 가족들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 그들을 지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이러한 참사의 피해자들을, 가족들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시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힘으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반드시 밝혀야 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진상규명 국민참여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세월호, #9.11, #진상규명위원회, #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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