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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12일 오전 9시 15분]

당시 1만4000여명을 학살한 투얼슬랭 수용소 소장을 지낸  카잉 구엑 에아브는 지난 2010년 크메르루주 특별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 구속수감중이다. 그는 1심에서 35년형을 받았으나, 이에 양측이 모두 항소한 끝에 결국 최종심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 투얼슬랭 대학살 박물관 사진 전시회장을 둘러보는 학생들의 모습 당시 1만4000여명을 학살한 투얼슬랭 수용소 소장을 지낸 카잉 구엑 에아브는 지난 2010년 크메르루주 특별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 구속수감중이다. 그는 1심에서 35년형을 받았으나, 이에 양측이 모두 항소한 끝에 결국 최종심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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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현지시각), 캄보디아 킬링필드 핵심 전범 2명이 종신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주요 외신들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됐다. 현지 방송들도 전 재판과정을 전국에 생중계했다. 무려 35년만의 일이다. 국제인권단체인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이번 재판결과를 가리켜 "정의구현을 향한 중대한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동남아 변방국가 캄보디아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한국의 주요언론들도 이 소식만큼은 앞 다퉈 전했다.

다음날 아침,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한국에서 나온 수십 개의 관련 기사들을 일일이 살펴보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부분 <로이터>를 비롯해 <AP통신> <월스트리트 저널> 등을 인용한 번역기사들 뿐이었다. 내용도 거의 대부분 대동소이했다. 과거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킬링필드의 두 핵심 인물이 35년 만에 단죄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간혹 직접 취재한 것처럼 쓴 기사들도 눈에 띄었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한국 취재진에 의한 쓰인 제대로 된 현장기사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캄보디아 현지에 특파원을 파견한 <연합뉴스>가 낸 관련 기사도 읽어 봤지만, 외신을 번역해 올린 한국 기사들의 수준을 뛰어 넘지 못했다.

크메르루주 전범 재판 결과 보도한 한국 언론들, 아쉽다

일부 기사에선 공통적인 오류도 발견할 수 있었다. 'S-21' 또는 투얼슬랭 수용소로 불리던, 그곳의 감독 책임자 '카잉 구엑 에아브'는 지난 2010년 크메르루주 특별법정 1심에서 35년형을 받았지만, 결국 최종심인 2심 항소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현재 수감생활 중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들은 오래 전 외신 기사를 인용한 듯 그가 35년형을 받은 것처럼 기사에 썼다. 최소 5~6군데가 넘는 언론사들이 똑같은 실수를 범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크메르루주의 최고 지도자 폴 포트와 당시 외무부장관 이엥 사리의 관계를 '처남-매부'로 잘못 전달한 매체도 있었다. 이 신문은 기자가 이메일로 이 부분을 지적하자 다행히 곧바로 내용을 수정했다. 물론, 이런 실수는 종종 일어나는 것이라 대충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웠던 건 상당수 한국 언론들은 '1심 판결'이라는 사실을 전달하지 않아 마치 크메르루주 전범들 최종 확정선고로 종신형을 받은 것처럼 썼다는 점이다. 크메르루주 특별 재판부는 이들 전범들의 범죄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총 5개의 소재판으로 나눠 심리중이다. 이번 '종신형 선고'는 5개 주요 죄목으로 나눠진 전체 소재판 중 첫 번째 재판의 1심 판결 결과일 뿐이었다. 더욱이 피고인들이 이에 불복해 항소하겠다고 한 상황이라,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더욱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또 사건번호 002/02로 명명된 두 번째 소재판이 올해 말쯤 시작될 예정이다.

참고로 국제전범재판은 일반 재판과 달리 2심으로 끝나며, 1심 재판에 대한 항소재판이 언제 열릴지는 불확실하다. 따라서 '역사의 단죄'라고 표현할 만한 타이틀을 내건 기사는 최소한 2심 항소재판에서 최종선고 판결이 난 후에 올라도 늦지 않을 듯싶다. 물론 이들의 형량이 줄어들 가능성은 1%도 안 되지만 말이다.

사실 한국 언론들이 이런 웃지 못 할 행태를 보인 건 이번뿐만이 아니다. 이에 대해 한 언론사 특파원은 9일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로이터> <신화사>와 같은 대형통신사와 비교했을 때, 현지에서 정보를 얻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는 이어 "이 문제는 전 세계 40여개 도시에 파견된 우리 매체 기자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고민이며, 그동안 비슷한 지적과 비난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취재인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불만도 털어놓았다. 그는 "해외지사라고 하지만 특파원이 많지 않아 이를 감당하기는 역부족"이라며 "여러 나라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취재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힘들다"라고 덧붙였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전범들

과거 크메르루주 군 장교 출신이었던 훈센총리도 이번 재판결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유엔이 주도하는 크메르루주 전범 재판에 대해 그는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거나 비협조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다른 전범들에 대한 추가제소에 대해서도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 행사도중 땀을 닦는 캄보디아 훈센 총리 과거 크메르루주 군 장교 출신이었던 훈센총리도 이번 재판결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유엔이 주도하는 크메르루주 전범 재판에 대해 그는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거나 비협조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다른 전범들에 대한 추가제소에 대해서도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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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몇몇 한국 언론들에게 '오보'를 선물한 이번 크메르루주 전범 재판의 정확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유엔의 지원으로 크메르루주 전범들을 단죄하기 위한 재판이 본격 시작된 것은 지난 2006년이다. 하지만 지난 8년 동안 크메르루주 특별법정(ECCC)에 선 크메르루주 지도자들은 고작 5명이었다. 그중 앞서 잠시 언급한 투얼슬랭(일명 S21) 수용소 소장은 사건번호 001호로 명명된 재판에서 반인류적 범죄 협의로 종신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그는 약 1만4000명이 목숨을 잃은 수용소 책임자였지만, 당시 핵심지도부 멤버는 아니었다.

최고 지도부를 주목된 4명 중 한 명인 전직 외무부장관 출신 이엥 사리는 지난해 3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이자 사회부 장관이었던 이엥 티리트는 치매판정을 받아 가석방으로 풀려난 상태다. 그들이 따르던 최고 지도자 폴 포트는 이미 지난 1998년 북서쪽 정글에서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가택연금당한 상태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결국 당초 전범재판에 기소된 4명 중 2명만 남자, 희생자 가족들은 '반쪽짜리 재판'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이제 남은 두 피고인의 이름은 '브라더 넘버2'로 불리던 권력 2인자 누온 체아(88)와 국가주석을 지낸 키우 삼판(83) 뿐이다. 크메르루주 특별법정(ECCC)는 이들을 지난 2011년 재판에 정식기소한 후, '종신형'이라는 1심 선고 판결을 이끌어내기 까지 무려 3년이란 긴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동안 재판 관련비용으로 무려 우리 돈 2000억 원 이상을 쏟아 부은 특별법정은 현재 유엔과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지만, 재정 상태는 매우 취약한 편이다. 재판소 소속 통역 등 행정직원들의 임금이 밀려 집단 파업사태가 발생한 적도 있다. 천문학적인 수준의 재판비용에 비해 실제 재판을 통해 걷어들인 성과가 지지부진해 국제사회의 비판여론도 적지 않다.

29년째 집권하고 있는 훈센 캄보디아 총리도 그동안 유엔이 주도하는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에 여러 차례 강한 불만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미국도 킬링필드의 책임이 있기에 재판 자체가 불공정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전문가들은 훈센 총리의 속내는 좀 다르다고 본다. 익히 알려진 대로 그도 전직 크메르루주 출신이다. 자칫 재판규모가 커지면 현재 캄보디아 정부 고위관료들 중에도 법정에 서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이는 훈센 총리 입장에선 심각한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캄보디아 정부는 재판에 매우 비협조적이었다. 유엔이 지명한 외국인 재판관 2명은 정부의 비협조인 태도와 현지인 출신 재판관과의 갈등 끝에 중도 사임하기도 했다.

반인륜적 범죄 및 집단이주와 관련, 사건번호 002호로 명명된 이번 재판은 금년 말쯤 끝날 예정이다. 그것도 80대 연로한 두 피고인의 건강상태에 달려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직 아니다. 사건번호 002/2로 불리는 또 다른 재판이 이 두 노인을 기다리고 있다. 대량 학살, 강제결혼, 불교승려들에 대한 탄압,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열악한 수용시설 등에 관한 것들이다. 이 재판 역시 법정 공방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들 피고인들은 법정 최후진술에서조차, 지난 1975년~1979년 3년 8개월 동안 자행된 2백만 민간인 학살 등 모든 책임을 전면부인하거나 제3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권력 2인자였던 누온 체아는 모든 학살의 책임을 이웃나라 베트남군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국가주석을 지낸 키우 삼판 역시 당시 자신은 권력의 핵심부가 아니었으며 폴 포트를 위시한 핵심지도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전범들이 단죄를 받길 바라는 희생자 가족들

이번 크메르루주 지도자들의 종신형 판결과 관련하여, 킬링필드 생존자 춤 메이씨는 이들 전범들이 병이 들어 감옥대신 법정에서 죽더라도 그들의 뼈를 감옥에 묻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싶다고  말했다.
▲ 현지 언론과 인터뷰중인 킬링필드 생존자 춤 메이(84)씨 이번 크메르루주 지도자들의 종신형 판결과 관련하여, 킬링필드 생존자 춤 메이씨는 이들 전범들이 병이 들어 감옥대신 법정에서 죽더라도 그들의 뼈를 감옥에 묻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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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루주 특별재판소측도 향후 재판진행일정과 관련하여 고민이 크다. 사건번호 003, 004호로 명명된 또 다른 전범재판과 관련하여, 이 두 피고인 외에 크메르루주 출신 전 지휘관 등 다른 전범들을 법정에 세울 물리적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훈센정부도 이번 재판으로 마무리되길 원하고 있으며 또 다른 전범재판을 준비하거나, 추가 기소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미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당장 법정에 선 피고인들의 건강과 나이도 문제다. 그동안 두 피고인의 건강을 이유로 재판이 미뤄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체력 문제로 재판이 중단된 적도 여러 차례다. 기력이 쇠해 희미해진 과거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법정 진술 내용도 진실을 밝히는 데 큰 걸림돌이다. 둘 다 80대 고령이라 이엥 사리처럼 나이 들어 법정에서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국제사회의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200만 킬링필드 희생자 가족들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역사적인 단죄를 받고 마무리되기를 바라지만, 과연 이들의 소원대로 이뤄질 지는 현재로서는 의문이다.

기사를 대충 정리할 무렵, 킬링필드 희생자 가족중 한명인 춤 메이(84)씨 얼굴이 생각나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크메르루주 희생자협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재작년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적도 있다. 당시 그는 아내와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을 크메르루주군에 의해 잃었다. 이번 재판결과에 대해 소감을 묻자, 그는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누온 체아, 키우삼판)이 법정에서 죽더라도 그들의 뼈를 감옥에 묻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종신형을 받은 것에 대해 더 이상 관심 없다. 나는 매우 지쳤다. 나는 그저 그들이 진심으로 참회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태그:#캄보디아, #누온 체아, #키우 삼판, #크메르루주 특별재판,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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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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