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걸출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영화에선 새로운 세계관을 낳은 설정들과 다양한 캐릭터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작품으로 승화된다. 1980년대에서 21세기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현대 영화계는 그를 빼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스필버그는 여러 대작을 남겼다.

 <라이언일병구하기>

<라이언일병구하기> ⓒ 파라마운트픽쳐스

1998년 개봉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특히 그렇다. 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황금 캐스팅과 다름없다.

주연이었던 톰 행크스는 영화 출연 이후 영감을 얻어 2차 세계대전을 그린 10부작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를 제작하기도 했다. 빈 디젤은 이 영화에 출연한 이후 대중의 관심을 얻기 시작해 본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트리플 엑스(2002)>를 흥행 시켰다. 또한 <굿 윌 헌팅(1998)>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당시 신인배우 맷 데이먼의 앳된 모습도 볼 수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은 1944년 6월, 2차 세계대전의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던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막을 올린다. 필사적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이겨내며 싸우던 많은 연합군 병사들이 해안가에서 비명횡사하는 장면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돼있다. 날아오는 총탄과 포격에 사지가 절단되고 순식간에 피를 쏟으며 사망하는 군인들의 모습은 실제 전쟁터를 연상케 한다.

시각적인 충격이 지나가고 나면, 예상하기 힘든 줄거리의 신선함이 뒤를 잇는다. 상륙작전이 벌어지고 난 후, 미국 행정부는 전사자 통보작업을 하던 도중 특이한 상황을 발견한다. 4형제가 모두 전쟁에 참가한 라이언 가(家)의 청년 중 3명이 며칠 간격으로 연이어 전사했음이 밝혀진 것. 이에 미국 국방성은 흔치 않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

바로 치열한 전투 와중에 아직 생존 중인 가문의 막내 제임스 라이언을 찾아서 집으로 무사히 돌려보내도록 지시한 것이다. 명령을 부여받은 밀러 대위(톰 행크스)는 일곱 명의 부대원을 차출해 아군을 떠나 외딴곳으로 향한다. 이 임무의 수행과제는 오직 하나, 최선을 다하여 라이언 일병을 전쟁터로부터 구하는 일이다.

한 명 구하러 여덟 명이 전장으로 뛰어들다

'라이언을 구해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부대원 중 다수는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낸다. 병사와 간부를 포함해서 누구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향하는 곳은 독일군이 우세한 지역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전쟁터 어느 곳이 아니겠냐마는, 언제 적을 만날지 모르는 장소로 발길을 옮기는 일은 분명 유쾌하진 않은 상황이다.

소수의 병력이 투입된 것 못지 않게 더욱 그들을 황당하게 만든 것은 임무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여덟 명이 전장으로 뛰어들어야'한다는 발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은 등장인물 중에서도 많지 않다. 아마 관객 누구라도 그런 처지에 놓인다면 비슷한 태도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가 노출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단 하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더 많은 목숨의 희생마저도 각오하는 자세.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인류애가 아닐까. 사실 때로 누군가를 구하는 일은 더욱 큰 대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익 계산 없이 선의를 위해 무엇이든 바칠 준비가 된 숭고함이야말로 군인의 덕목, 나아가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굵직한 줄거리가 이어지는 중간, 프랑스인 소녀를 구하려고 목숨을 바치는 카파조(빈 디젤)의 모습도 그런 맥락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어 소녀를 품에 안았던 그가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지는 장면은 마찬가지의 이유로 감동을 자아낸다. 그런 용기와 희생정신은 전쟁터가 아닌 현실에도 절실히 필요하지만 오늘날엔 흔히 결핍돼 있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빛나는 또다른 부분은 이러한 장면과 설정들이 단순히 '애국심 고취'나 '군인정신 자극'을 위해서만 소비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등장인물들은 독일군을 몰살시킨 뒤에 크게 환호하다가도, 전리품을 챙기고자 전사자의 소지품을 뒤지다가 '나치 소년단 단검'을 발견하고는 이내 오열한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만난 여자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병사 중 '카파조'는 목숨을 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한 장면.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만난 여자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병사 중 '카파조'는 목숨을 건다. ⓒ 파라마운트 픽쳐스


적에 대한 분노에 이성을 잃은 나머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어린 소년을 죽였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여기(전쟁터)에 있으면 어느샌가 못 알아보게 사람이 변한다네"하고 나직히 흐느끼는 밀러 대위의 목소리도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영화는 전쟁을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그 참상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셈이다.

영화와 대비되는 한국군의 '인권 현실'

물론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내용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이상적인 측면이 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현실의 전장에서 보기 힘든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한다. 기껏 잡은 독일군 포로를 "눈을 감고 천 걸음 걸어가라. 그 뒤 가장 먼저 만난 연합군에 투항하라"고 명령하는 부분처럼. 그리고 애초에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전투병력이 포함된 여덟 명의 희생을 감수하는 미 국방부의 태도도 그렇다. 영화 속 원정대의 대사처럼, 하나하나 놓고 보자면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에이, 비현실적이잖아'하고 웃어넘길 일도 아니다. 오늘날 한국 군대가 드러낸 민낯을 살펴보자. 최근 2005년 28사단에서 벌어졌던 '김일병 총기 난사사건' 이후 9년 만에 두 건의 참사가 벌어졌다. 지난 6월 강원도 22사단에서 병장이 따돌림에 못이겨 총기를 난사하는가 하면, 그 전에는 28사단 의무부대에선 전입 이후 계속된 구타와 가혹행위로 의무병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규모가 큰 사건들만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일 뿐, 실제로는 드러나지 않은 더 많은 사건이 벌어졌으리라 짐작된다. 그동안 개선된 것처럼 보이던 병사들의 생활은 실제로는 영화보다도 처참했다. 만연한 군부대 내의 폭력이 이번 사건으로 다시 드러났을 뿐이다.(관련기사: 매일밤 화장실에서 '그 짓'... 의무병인 나도 '윤일병'이었다)

복종 주입 대신 인간애 가르치는 군대 원한다

국방부 항의서한 전달 나선 유가족들 최근 28사단 병사폭행사망사건으로 군 사망사고 문제 여론이 확산 되고 있는 가운데,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들이 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항의서한 전달을 위해 국방부 정문을 향해 가고 있다.

▲ 국방부 항의서한 전달 나선 유가족들 최근 28사단 병사폭행사망사건으로 군 사망사고 문제 여론이 확산 되고 있는 가운데,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들이 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항의서한 전달을 위해 국방부 정문을 향해 가고 있다. ⓒ 이희훈


실전훈련을 제외하고, 부대 내에서 강연과 영상시청으로 진행하는 정신교육은 대부분 '북한에 대한 증오'만을 거듭 강조한다. 이는 현역뿐만 아니라 예비군훈련마저도 마찬가지다. 병사 간의 기본적 예의, 인권보호를 위해 지켜야 할 규율은 형식적인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는 '서열'로 매겨지는 계급간의 복종의식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며 끊임없이 재주입된다.

한 개인을 갈아끼울 수 있는 소모적 '부품'으로 소비하는 군의 전체적인 발상이 변하지 않는 한 사고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한 번의 사고는 개인의 책임이라 할지라도, 비슷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면 시스템의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병사들의 입대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국가의 부름으로 인한 의무였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제는 '인간미 넘치는 군대'를 위해 한국군이 이 영화를 참고해야 할 때가 아닐까. 비슷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망각과 무관심 속에 또 다른 병사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한국에서도 지속적인 정책 마련과 그 실현으로 '군 인권 구하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인류애 스티븐 스필버그 톰 행크스 전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