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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기타 제조업체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그 뒤로 계속된 투쟁과 농성. 지금도 그들은 인천에 있는 옛 콜트악기 부평공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고자 임재춘씨는 오늘도 그곳을 지키며 굵고 거친 손으로 펜을 꾹꾹 눌러 글을 씁니다. 임재춘씨가 농성장 촛불문화제에서 낭독한 '농성일기'를 연출자 최문선씨의 해설과 함께 독자 여러분들께 전합니다. [편집자말]



정리해고 후 6개월 동안 노조원들은 고용보험 탄 것으로 생활을 했다. 그게 끝나면서 금속노조 투쟁사업장 지원금으로 1년을 살았다. 그것도 부족해서 채권을 발행해서 생활보조를 했다. 그러다가 대전 민주노총에서 사회적기업을 모색하였고, 대전 실업연대의 장류사업이 사회적 일자리에 선정되었다.(2009년 10월) 우리(콜텍 해고자)는 취직 형태로 함께할 수 있었다.

장류 사업을 하려면 산과 들과 바람이 필요해 상표를 '산들바람'으로 정했다. 장을 담그려면 장독대와 식물을 재배할 밭과 집이 필요하여 박만규 조합원이 살고 있던 대전 성북동에서 빈 집과 밭을 구입하였다. 남의 땅에 작물을 심으려다가 주인에게 들켜 꾸중도 들은 적도 있다. 사람의 욕심이란 참….

공장 생활만 하다 보니 시골 일이 서투른 조합원이 많아 손에 물집이 생겨 터지는 조합원도 있었다. 집 수리 후 햇빛 잘 드는 곳에 장독대 놓을 자리를 만들고,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부자재 놓는 창고도 수리하여 제법 장 담그는 장소로 모양을 갖추었다. 그 후 장독대를 구하기 위해 시골에서 이사 나간 집을 다니며 버려진 것을 모으기도 하고 조합원 집에서 가져오고 지역 동지들에게 기증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조합원들과 의견 충돌도 많았고 마음 상한 조합원도 있었다. 농약을 사용하자, 사용하지 말자, 서로 이견이 많았지만 사용하지 말자고 결정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손이 많이 필요해 사람이 고생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람 손으로 하기로 하여 잡초를 뽑았다.
매실 고추장을 담그려면 매실 엑기스(진액)가 필요해 충북 매실 농장에 가서 매실 수확을 해주고 일당으로 매실을 구입하였다.

매실 나무에는 가시가 있어 가시에 찔리기도 하여 사람들은 상처투성이였다. "농사가 이렇게 힘이 들을 줄은 몰랐다"고, "농민들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된다"고 조합원들은 이야기했다. 그해 가을에 고추 수확도 하고 콩 수확도 하여 고추장도 담그고 콩으로 메주도 만들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3년 계약한 사회적 일자리가 1년 계약으로 바뀌었다. 산들바람은 재심사를 받았는데, 선정되지 않았다. 정부가 요구하는 조건에 따라 시설 투자 하기는 너무 힘이 들어 사업자등록증을 반납했다. 사실은 시설 투자할 돈이 없어서 포기하였다. 그후 산들바람은 사회적기업 차원의 지원 없이 콜텍 해고자들의 독자사업이 되었다.

장류 사업은 최하 3년 이상 숙성시켜야 하는데 1년 만에 이명박 정부에 의해 사회적기업에서 잘리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겼다. 사회적기업 지원이 중단되고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생계투쟁을 나가야 했다. (조합원들은) 눈물 같은 돈 월 10만 원을 투쟁기금으로 조합에 입금하였다. 박만규, 최정진, 문희 세 조합원은 성북동에 남아 판매와 고추장, 된장 관리를 계속 해나갔다.

우리 3명(이인근 지회장, 김경봉·임재춘 조합원)은 인천과 서울에서 활동을 하고, 대전의 세 조합원은 농사짓고, 고추장·된장 관리하고 지역 연대도 해야 한다. 인천 농성장에 있는 3명보다 여러모로 더 힘이 든다. 지금 산들바람은 고민에 빠져 있다. 농성하는 6명이 최소 생계비라도 가져가야 하는데 판매하는 장이 얼마 안 남았고, 수익은 많은 편도 아니다. 지금 '산들바람'과 농성자들의 생존이 절박하다.

2014년 7월 29일
콜텍 해고자 임재춘

동고동락하던 치유의 시간... 이제는 기억 속으로

2009년 산들바람을 시작할 때
 2009년 산들바람을 시작할 때
ⓒ 임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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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텍이 '산들바람'을 시작하기 직전인 2009년은 해고 2년차이고, 실업급여며 노조 상급단체의 지원도 끊겨 농성하는 조합원들의 생계가 위태로웠을 때였다. 해고 후 44명이었던 조합원들 중 이 시기에 조합을 나가 농성을 그만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남아 있는 26명의 조합원들은 계룡산 주변을 돌며 쑥을 캐 떡집에 팔기도 하고, 수세미를 떠 팔기도 했다. 그 시기를 문희 조합원은 이렇게 기억한다.

"하루 하루가 점점 삭막해져갔어요. 별거 아닌 일에도 조합원들의 말다툼이 많아졌어요. 날이 선 채 말수도 줄고.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아무 때고 짜증을 부렸어요. 사람이 피폐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 와중에 사회적기업으로 '산들바람'이 선정된 것이다. 문희 조합원은 '산들바람'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칡넝쿨로 가득한 야산을 빌려 사람 손으로 그것을 다 뽑아내고 밭을 꾸릴 때, 몸은 고되었지만 농성자들은 말 그대로 동고동락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 시기는 문희 조합원에겐 치유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산짐승들이 밭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대전지역의 노조가 쓰던 현수막으로 울타리를 치던 날이 문희 조합원 기억에는 너무나 선명하다. 그 울긋불긋한 모습이 마치 당산나무 같고, 무당집 같아 웃기도 많이 웃고, 마냥 신기했다고 한다. 산이 밭이 되고, 그 주변에 형형색색 현수막 조각들이 펄럭일 때, 생산자로 서 있는 자신들을 보진 않았을까. 농성장을 떠나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산들바람'에 대한 사회적기업 지원이 중단되고 다시 한 번 콜텍 해고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최소인원 3명이 대전에 남아 지금까지 그 사업을 유지하고 있지만 치유의 시공간이 되었던 '산들바람'은 지나간 기억이 되고 있다.

고추장, 된장, 장아찌, 매실청, 레몬청. '산들바람'의 제품은 금방 먹어치우는 음식이 아니니 한 번 주문하면 오랫동안 냉장고에 머무는 '자본회전이 느린' 제품이다. 입소문이나 SNS 홍보가 전부이다 보니 판로가 부족해 현재 농성 중인 대전의 3명과 인천의 3명 생계비 마련조차 버겁다.

콜텍의 정리해고 무효소송에 관한 대법원의 판결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일이다(6월 12일 판결). 콜텍의 농성자들은 법원으로부터 판결일을 전달받고 패소를 예측했다. 밥을 먹다 기타를 치다 집회를 가다, '어찌해야 하나, 어찌할까…' 그러던 때였다. 이인근 지회장은 그때 이런 말을 했다.

"지면 정리할 게 많겠지. 성북동(산들바람)도 이제 정리하라고 해야지. 계속 하라고 하기엔 거기 남아 있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일손도 없는데, 이제 그 집도 비워달라고 하는데…. 다 지면, 다 지면 정리할 건 정리하고 그래야지."

결국 콜텍 해고자들은 법으로는 다 졌고, '산들바람'은 올해 장을 담그지 않았다. 숙성 중인 장들도 있고, 그때 그때 담글 수 있는 장아찌들도 있으니 당분간 산들바람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장들이 다 배달돼 나가면 '산들바람'은 사라질 것이다.

수세미든 비누든 고추장이든 된장이든, 무엇이든 만들어서 알리고 모아냈던 콜텍 해고자들에게 산들바람은 언제 불어올까. 오늘 낮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대전 성북동의 조합원들과 통화를 했다. 이제 '산들바람'이 사라지는 것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하냐는 나의 질문에 "그래야겠죠…"라고 답하며, 문희 조합원은 아무래도 울먹이는 것 같았다.

산들바람 최근 모습
 산들바람 최근 모습
ⓒ 임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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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들바람 인터넷 카페 http://cafe.daum.net/sntj1



태그:#콜트콜텍, #정리해고, #위장폐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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