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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정에서 갑곶돈대를 향해 길을 걷는다. 해안에는 끝없이 철책이 서 있고 그 너머 바다에는 배 한 척 다니지 않는다. 바다로 접근하는 것을 완고하게 막는 철책은 강화 동쪽 해안에서 북쪽 해안을 지나기까지 수십 리에 걸쳐 있다.  

7월 하순의 한낮은 뜨겁기가 한량없다. 이런 날에는 그늘이 좋은 숲속 길을 걷는 게 제격이지만 오늘은 일부러 아스팔트길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갑곶돈대 못 미쳐서 있는 '해운사'에 들러볼 심산에서 길을 잡았지만 땡볕이 내리쬐는 길을 걷자니 마치 고행길인 양 힘들다.

호국도량 해운사

해운사는 작은 절이다. 강화대교를 건너 길 오른쪽에 보이는 인삼센타 쪽으로 내려와서 얼마 안 가면 절이 나온다. 그러나 외진 곳이라 그런지 찾는 사람은 드물다. 바다를 따라 해안도로가 시원스레 뻗어있지만 민통선 안동네로 연결이 되는 도로라서 그런지 다니는 차들도 그리 많지 않다.

 '진해사'의 승군들은 성곽 축성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진해사'의 승군들은 성곽 축성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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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마당을 돌아다니던 개도 두어 번 컹컹 짖더니 이내 꼬리를 내리고 잠잠해졌다. 법당에서 혼자 예불을 올리던 스님이 손짓을 하며 불렀다.

조심스럽게 법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좌대 위에 있던 책을 한 권 펼쳐주며 예불을 따라해 보라고 권한다. 가끔씩 전등사를 찾아가기는 하지만 예불을 올려본 적은 없다. 그래도 펼쳐주는 페이지를 눈으로 따라 읽으며 스님이 절을 하면 절을 하고 염불을 하면 속으로 같이 읽었다.

한 시간여 만에 예불이 끝났다. 스님은 이것도 인연인데 점심 공양도 하고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따라가서 점심밥에 차도 한 잔 얻어 마셨다. 공양주 보살님이 안에 들어가더니 책을 한 권 들고 나왔다.

지금은 돌아가신 전 주지 스님이 손수 만든 자료집이라고 했다. 전 주지 스님은 해운사를 역사유적지로 지정받기 위해 애를 쓰셨다고 한다. 그러나 뚜렷한 유물이 출토가 되지 않아 지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해운사는 '진해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에 새로 세운 사찰이다. 진해사는 도성을 방위하기 위한 금위영(禁衛營)이 있던 갑곶진 근처에 있었다. 당시 진해사에는 50명 가량의 승군이 있었는데, 그들은 해안 방어 및 성곽 축성 등을 했다고 한다.

금위영의 대장인 민종도(閔宗道)는 숙종의 윤허를 받아 진해사 빈터에 창고를 짓고 본영의 군수물자와 병조(兵曺)의 은자(銀子) 3만냥, 목면 5백동 등을 보관하여 승군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도록 했다.

그러나 군수물자를 보관하던 창고는 병인양요 때 불 타 없어졌고 그 후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진해사는 화재로 소실되어 빈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60년경에 새로 건물을 짓고 '해운사'라는 이름을 붙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울로 오가던 '갑곶나루'의 모습. '진해루'와 산허리를 따라 '강화외성'이 보입니다.
 서울로 오가던 '갑곶나루'의 모습. '진해루'와 산허리를 따라 '강화외성'이 보입니다.
ⓒ 강화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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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나루와 강화대교

강화도는 '역사의 섬'이란 이름에 걸맞게 어디를 가도 역사적인 사연이 스며있지 않은 곳이 없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절에도 이렇게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비록 나라의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대단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지만 인근에 있던 금위영과 진해루, 그리고 강화 외성과 함께 진해사는 나라를 지킨 호국 도량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발굴 조사를 하면 분명 그때를 증언해 줄 유물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절을 나왔다.

저만치 다리가 둥실 떠있다. 마치 강처럼 보이는 좁은 바다 위에 두 개의 다리가 나란히 서있다. 1970년도에 놓은 구강화대교와 2001년 8월에 개통한 신강화대교다.  

시절이 변해도 교통의 요지는 여전한지 지금의 강화대교는 옛날에 나루터가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강화와 김포를 연결해주는 갑곶나루터가 바로 그곳이다. 강화는 바다 가운데 떠있는 섬이니 배를 타거나 다리를 건너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다. 옛날에는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육지를 오갔고 지금은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로 들어온다. 

옛날에 강화에는 몇 군데의 나루터가 있었다. 그중 갑곶나루는 김포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니 사람의 왕래가 제일 빈번한 곳이었다. 또 초지나루에서는 인천으로 오가기가 편했다. 북쪽에 있는 승천포 나루는 개성으로 갈 때 이용하는 곳이었다. 

갑곶나루와 초지나루가 있던 곳에는 강화대교와 초지대교가 놓여서 그 위로 차들이 질주를 한다. 하지만 개성으로 오가던 승천포 나루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젠가는 그곳에도 다리가 놓여서 옛 이야기를 할 날이 올 것이다.

 해군은 '통제영학당'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을 세워 조상들의 조국수호 정신을 기렸습니다.
 해군은 '통제영학당'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을 세워 조상들의 조국수호 정신을 기렸습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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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나루는 강화로 들어가고 나가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지만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서해 바닷길을 타고 온 배들은 강화해협을 거쳐 한강으로 접어들었다. 말하자면 한양으로 들어가는 목구멍과도 같은 곳이 바로 강화해협이었고 갑곶나루였다. 그래서 해안을 방비하는 돈대들과 보, 진 등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갑곶나루 근처에는 갑곶진과 갑곶돈대 그리고 진해루와 금위영 등이 있어 오가는 배와 사람들을 관리했다.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통제영학당

갑곶나루 근처에는 학교도 있었다. 구강화대교와 신강화대교 뒤에 보이는 야트막한 산 아래 커다란 학당이 있었으니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이 바로 그것이다. 백여 년 전 그곳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가 있었다. 수백 명의 청년들이 나라의 동량이 되고자 꿈꾸며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은 세계 전사에도 길이 남을 큰 승리였다고 한다. 고작 13척의 배로 적함 300여 척을 상대해서 이겼으니 이보다 더 대단한 해전은 역사상에 없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수군은 동아시아에서 최강이었지만 그로부터 300년 뒤 우리 해안을 지킬 해군력은 보잘 것 없었다. 변변한 전함 한 척 없었고 군사 체제 역시 전근대적이었다.

1892년에 고종은 우리 해안을 지킬 해군체제를 근대적으로 개편하는 한편 해군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지금의 해군사관학교격인 '통제영학당'을 세웠다.

1893년 3월에 해군학교 설치령을 반포하고 자금 1천 원을 들여 갑곶나루에 학교건물을 짓고 교육생을 모집했다. 그해 9월에 18세에서 26세 사이의 양반 자제 50명을 교육생으로 뽑고 또 15세 이상 20세 이하의 수병 300여 명을 모집하여 통제영학교의 문을 정식으로 열었다.

 50명의 사관생도와 300명의 수병들이 '통제영학당'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50명의 사관생도와 300명의 수병들이 '통제영학당'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 강화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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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먼저 영어부터 배운 뒤에 군사학과 항해학 등의 기초군사교육을 영국 정부로부터 파견된 군사교관인 콜웰(W. H. Callwell)대위에게 배웠다. 또 조교인 커티스(J. W. Curtis)하사는 포술학을 맡아서 가르쳤다. 

통제영학당은 수업을 위한 본관 구역과 생활공간인 기숙사 구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본관 구역의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사당(敎師堂)은 기와를 얹은 10m 내외의 길쭉한 형태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또 언덕 위에 있었던 기숙사 구역은 다시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갑호 생도의 기숙사이고, 다른 하나는 영어를 가르치던 영경교당(英經敎堂)이었다.

변함없는 산천과 상상력 여행

이처럼 해군사관을 양성하기 위한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시작했지만 청일전쟁에 이긴 일본은 우리나라의 군대가 강성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의 압력과 방해로 인해 이듬해인 1894년 11월에 폐교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후 나라가 망하면서 통제영학당에 대한 기억도 점차 사라져갔고 건물은 허물어지고 빈 터만 남게 되었다.

사진을 통해 본 통제영학당은 당당하고 우뚝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던 생도들과 수병들은 특별한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일년여 만에 깨어지고 말았다. 그 후로 조선은 패망의 길을 걸었고 우리나라의 해안을 방비할 해군력도 더 이상 증강될 수 없었다.

지금 통제영학당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길이가 10미터나 되던 본관 건물도 또 두 동의 기숙사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산천(山川)만이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킬 뿐 그때의 영욕은 세월과 함께 지워져 버렸다. 더구나 나루터가 사라지고 그 위에 다리가 놓이면서 통제영학당이 있던 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후미진 곳이 되어 버렸다.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은 지금 빈 터만 남아있습니다.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은 지금 빈 터만 남아있습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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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학당은 천주교 인천교구의 갑곶성지 정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전에는 강화대교 밑으로 해서도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쪽을 철망으로 막아놓아서 갑곶성지 정문을 통해야만 들어갈 수가 있다.

역사적인 유적지가 어떻게 해서 사유지로 편입이 되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마음 한 편으로 서운한 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인근에는 강화외성을 비롯해서 진해루와 금위영 등의 유적지가 있는데, 흔적을 찾고 복원을 하기에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국방의 염원을 품고 세웠던 통제영학당은 일 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사관후보생들의 대부분은 육군으로 옮겨갔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나서야 진해에 해군사관학교가 생겼으니 우리의 해안은 비로소 우리 힘으로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해군은 우리나라의 바다를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과 해양수호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1999년 6월 강화군청에 통제영학당지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요청했다. 이곳은 2001년 4월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이번 휴가에 갑곶나루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잘 알려진 곳도 좋지만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보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을 것이다. 비록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오히려 그 '없음'이 더 절실하게 가슴에 다가올 것 같다. 역사기행이란 상상을 보태서 떠나는 여행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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