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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거물거물한 초등학교 시절, 내 고향 국회의원은 여당 소속 A의원이었다. 아무리 독재정권 시절이었고, 중대선거구제 때였지만 야성 강한 호남의 한 지역에서 여당의원으로 3선을 했으니 흔치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일개 초등학생이 국회의원을 기억하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들로 산으로 싸돌아다니며 놀기 바쁜 나이에 고리타분한 정치인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러나 A의원은 내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A의원의 선거운동을 돕고 계셨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우리 동네를 포함해 3개 마을이 속해 있는 리 단위의 선거 중간책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불콰해진 얼굴로 집에 들어오셨다. 아랫동네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잔이라도 기울이신 듯했다. 그날 아버지께서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한창 진행중인 선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난데없이 선거 이야기를 꺼내셨다. 'OOO이가 국회의원이 돼야 동네가 발전한다'느니 하면서 나를 앞에 두고 일장 연설을 하셨다.

동네 사람들에게 막걸리 잔이라도 돌려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는 웃옷 안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보이셨다. 만 원짜리 지폐였으니 어린 내 눈에는 적지 않은 돈으로 보였다.

"아버지, 무슨 돈이에요?"
"으응, 이 돈? 네 당숙들에게 막걸리 사 줄 돈이다. 내 돈이 아니야."
"왜 아버지께서 당숙들에게 막걸리를 사요?"

내 말을 듣고 있던 아버지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동네별로 선거 책임자들에게 돈이 얼마씩 돌아갔느니 어쩌니 하면서 한참을 말씀하셨다. 얘기 끝에는 웃으시면서 근동의 세 동네 책임을 맡았다고 하신 것 같다.

"아버지, 근데 돈 받고 선거 도와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어린 생각에도 뭔가 께름칙해 여쭈었다. 아버지께서는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우리 고장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니라. 이 돈은 내 주머니로 가는 돈이 아녀."

우리 아버지의 어설픈 막걸리 선거운동 덕분이었을까. A씨는 그해에 국회의원으로 당선했다.

농군이었던 아버지가 선거운동에 나선 이유

7·30 순천·곡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30일 오후 전남 순천시 새누리당 전남도당 사무실에서 당선이 유력시된 뒤 조충훈 순천시장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활짝 웃고 있다.
▲ 축하받는 이정현 7·30 순천·곡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30일 오후 전남 순천시 새누리당 전남도당 사무실에서 당선이 유력시된 뒤 조충훈 순천시장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활짝 웃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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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평생 농군이셨다.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은 채 우직하게 농사만 지으며 사셨다. 그런 아버지가 이전투구가 난무하고 복마전 같은 선거운동에 끼어들었다. 푼돈이나마 받아가면서까지 말이다. 이유가 뭐였을까. 내가 보기에는 딱 한 가지였다. 동네 발전, 고장 발전을 위해서였다.

어제 치러진 7·30국회의원재·보궐선거 결과에서 최대 이변이 일어났다. 전남 순천·곡성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입'이라는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했다. 호남은 전통적으로(!) 새정치민주연합(새정치연합) 텃밭이다. 새정치연합 깃발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곳이다. 그런 데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했다.

확실히 이변으로 보일 만하다. 그런데 나는 이 후보의 당선을 결코 이변으로 보고 싶지 않다. 순진을 가장한 노회한 정치'꾼'들이 득세하는 새정치연합의 현주소를 고려할 때 이 후보의 당선은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고향이 전남 곡성이라고 한다. 곡성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순천시민들이라고 달랐을까. 이 후보는 제왕적인 스타일의 박 대통령을 대신해 그 '입' 노릇을 충성스럽게 해왔다. 다른 누구보다 박 대통령의 속내를 잘 알아 '복심'이라는 세평까지 얻고 있다. 이 후보의 권세는 그 누가 봐도 막강해 보였다. 애면글면 살아가는 순천·곡성의 대다수 주민들에게 이 후보는 정말 뭔가 '화끈한'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슈퍼맨'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A의원에게 열광했던 아버지의 논리 중에 '힘 있는 여당 후보론'이 있었다. 여당 의원이 지역구에 있어야 예산 따내기도 쉽고 지역 숙원 사업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일 게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국회의원으로 있던 시절에 동네 주변에는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제일 먼저 전기가 들어왔다. 나는 초등학교 1~3학년에 다니던 1976~1978년 사이에만 해도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했다. 아랫동네 앞을 지나는 17번 국도에 시커먼 아스팔트가 깔린 것도 A의원이 현직으로 있었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1980년엔가는 마을 상수도 공사가 마무리되어 집집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나왔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먹고 개골창에서 빨래하던 동네였다. 수돗물이 얼마나 경이로웠겠는가.

그 모든 일을 A의원 단독으로 했을 리 없다. 전기를 들여오고 도로 포장을 하는 일은 정부의 전기·도로정책 추진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의 하나였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우리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당시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힘 있는 여당의원이 있어서 그 모든 게 가능하다고 여겼을 테니 말이다.

'국가 개조'의 지역 버전을 갖고 나타난 이정현

지금이라고 다를까. 뭐니뭐니해도 정치는 민생이다. 철학도 좋고 이념도 중요하다. 대의명분 역시 정치에 꼭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민생만 할까. 이른바 "바보야, 문제는 밥이야"다. '먹고사니즘' 문제를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그 어떤 고상한 정치도 아무 소용이 없다. 철학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은 다 무용지물이 된다. 조금 서글프긴 하다. 하지만 대의명분은 없어도 살지만 '밥'이 없으면 살기 힘들다!

이번 선거과정을 대충 돌아보았다. 확실히 이 후보는 순천·곡성 주민들에게 정녕 '슈퍼맨' 같은 파워를 약속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이 후보의 공약 첫 자리는 '전남 동부권 대 개조'였다. 박 대통령이 단호하게 천명한 '국가 개조'의 지역 버전이다.

그냥 '개조'도 아니고 '대 개조'다. 일개 국회의원이 말이다. 다른 이가 그랬다면 '뻥'으로 치부했을 공약이다. 힘 없는 사람이 하기에는 분명 버거운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입'이자 '복심'이 그랬다. 순천·곡성 지역민들이 내심 얼마나 크게 기대했겠는가. 순천·곡성 지역의 투표율 51%는 그 생생한 증거물이다.

지역 '대 개조'를 위한 하위 공약들도 통이 무척 커 보인다. '대기업 유치 추진'이나 '의대 유치 추진 등 지역현안 적극 해결' 등만도 놀라운데 '호남예산 파격지원 견인'까지 있다. 팍팍한 지역 경제에 한숨 쉬는 대다수 서민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7·30 재보선 순천·곡성 국회의원 선거에 얼마 전까지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와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서갑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출마하면서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전남 순천 동부상설시장 인근에 붙어 있는 선거 포스터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7·30 재보선 순천·곡성 국회의원 선거에 얼마 전까지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와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서갑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출마하면서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전남 순천 동부상설시장 인근에 붙어 있는 선거 포스터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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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보가 홀로 돋보이게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이번 이 후보 당선의 일등공신이 새정치연합과 서갑원 후보라고 본다. 새정치연합의 서 후보 공천은 순천·곡성 주민들에게 그 어떤 감동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지난 경위나 결과야 어찌됐든 서 후보는 정치자금 비리에 연루되어 재판까지 받았다. 구태의연한 정치인 이미지를 숨길 수 없다.

서 후보는 공약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 후보는 자신의 5대 공약 세부안을 각종 수치와 그래프, 일정표 등으로 장식했다. 공약으로 내건 정책의 구체성을 유권자들에게 알림으로써 그 실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공약 및 정책의 요점을 정리해 개조식으로 서술한 점도 돋보였다.

서 후보의 5대 공약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봐도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다가갈 것 같았다. '생태·문화·관광도시 곡성·순천', '안전하고 행복한 곡성·순천'에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줄글로 길게 이어진 세부안도 전혀 눈길을 잡아끌지 못했을 것 같았다. 좋고 옳기만 해 지루하고 추상적인 내용을 장황하게 서술해 놓았기 때문이다.

청년 취업과 일자리 창출에 관한 공약을 비교해 보면 두 후보의 공약 간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후보는 대기업 유치 및 투자 활성화를 위한 장기 로드맵을 항목별로 나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해 놓았다. 반면 서 후보는 어떤 곳인지도 모를 대기업을 막연히, 그것도 '적극' 유치하겠다는 하나마나한 말들만 적어 놓았다. 공약의 구체성이나 실천 의지 모두 알아보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물론 이 후보의 공약 실천 일정표가 말 그대로 충실하거나 구체적인 것은 아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2014~2016'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사실 1년 8개월짜리 '땜방' 국회의원에게 무엇을 얼마나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이 후보가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해도 따지는 일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하튼 잠깐 훑어만 보는 데에는 이 후보의 개조식 서술이 줄글로 길고 장황하게 늘어놓은 서 후보의 공약안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을까.

새정치연합와 진보진영에겐 쇄신의 기회

새정치연합은 급조한 정당이 아니다. 이번 7·30 재·보궐선거를 위한 공천도 필승의 각오와 전술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급조한 임시정당보다 못한 모습을 보였다. '전략'이라는 이름이 멋진 수식어처럼 붙은 공천은 계파별 지분 나눠먹기처럼 비쳐졌다. 막가파식 공천이라는 비난이 무색하지 않았다.

선거 전술도 특별할 게 없었다. 온통 반박근혜와 정권심판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선거는 어디까지나 지역 대표를 뽑는 마당이다. 정권심판을 외치고 싶어도 그것은 뒷자리에 놓여야 한다. 국회의원 공약의 맨 앞자리는 최대한 구체화한 지역 밀착형 정책이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른바 민생, 곧 '밥'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정치는 민생이다. 그러므로 현실이다. 그 현실을 누가,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적군'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다면 '나'나 '우리' 자신이 좀 더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그 현실성을 바탕으로 사람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철학과 이념과 대의명분도 그런 힘과 권력이 있어야 구체화할 수 있지 않겠는가.

11대4. 나는 이번 7·30재보궐선거 결과가 새정치연합를 포함한 야권 전체에 아주 쓴 '보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새누리당 이정현 후보 당선, #순천, 곡성, #새정치민주연합, #서갑원 후보, #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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