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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기차에선 느낄 수 없는 정겨움이 있는 경원선 열차.
 요즘 기차에선 느낄 수 없는 정겨움이 있는 경원선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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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길이 222.7km에 이르는 경원선은 1914년 서울 용산에서 함경남도 원산을 잇기 위해 건설됐다. 하지만 분단 이후에는 용산역~신탄리역(혹은 백마고지역)간 89km만 운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 도심에서 동두천까지 복선전철이 생기면서 동두천역~신탄리역, 백마고지역 구간에서만 옛 향수를 담은 통근열차로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다. 예전엔 비둘기 완행열차가 다녔었는데 요즘은 전철과 기차의 중간쯤 되는 CDC(Commuter Disel Car) 동차가 다닌다.

연천군의 동네 주민들과 인근 부대 군인들이 주로 타는 기차 안의 풍경은 한마디로 푸근하다. 요즘 기차에선 느낄 수 없는 정겨움이 곳곳에 잔뜩 묻어 있다. '덜커덩, 덜커덩' 느리게 움직이는 열차에 몸을 맡기고 앉아 있노라면 절로 심신이 편안해진다. ​아침 6시부터 매 시간마다 운행하는 경원선 열차는 보기 드문 외선 철로임에도 혼잡스럽지 않다.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어하는 나 같은 외지인에게는 기차여행에 안성맞춤이다.

원래 이름은 '웃골', 한국전쟁 후 '신망리'가 된 마을

아담한 신망리 마을과 외선 철로가 이웃처럼 어우러져 있다.
 아담한 신망리 마을과 외선 철로가 이웃처럼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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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 익어가는 논 사이를 시원하게 가르던 경원선 열차는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한 신망리역(新望里驛)에 잠시 멈춘다. 신망리역은 우리가 가슴 한 쪽에 묻어 두었다가 가끔씩 꺼내보면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낡은 흑백사진 같은 간이역이다. 7,80년대 역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하루 승객이 100명도 되지 않는 한적한 곳이다.

역이 자리한 마을 신망리는 6·25 전쟁 전까지만 해도 북한 땅이었다. 신망리의 원래 이름은 '웃골'이었고 일제 강점기 때는 웃골을 한자어로 바꾼 '상리(上里)'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는 바람에 졸지에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에 신망리역 일대(상리)가 남한의 피란민 정착지역으로 지정되면서 피란촌이 형성됐다.

당시 이 동네에 주둔한 미 7사단은 군수물자와 여객을 수송하기 위해 기차역을 만들고 100여 채의 목조 가옥을 지어 피난민들을 입주시켰다. 당시 미 7사단장은 이곳을 전후 새로운 희망이 피어날 곳이라며 '뉴호프타운(New Hope Town)'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를 우리말로 옮긴 '신망리'가 역의 이름이 됐다.

​강원도 철원처럼 본의 아니게 공산주의, 자본주의 두 체제를 경험하게 된 동네다. 굳이 소설이나 영화 속의 장면이 아니어도 서로 대립하는 두 체제 속에서 겪었을 주민들의 고통이 미루어 짐작이 간다. 전쟁의 아픈 역사가 담긴 동네요 기차역이다. ​ ​

책 서가와 제비집이 있는 간이역

대합실 후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조명으로 책을 읽고 있는 승객.
 대합실 후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조명으로 책을 읽고 있는 승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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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의자가 놓여있는 소박한 승강장은 주민들이 쉬어가는 쉼터이기도 하다.
 나무 의자가 놓여있는 소박한 승강장은 주민들이 쉬어가는 쉼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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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신망리역에 내리는 사람은 '이곳이 기차역이 맞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승강장에 세운 천막 밑 그늘 아래서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천막도 기증을 받았는지 동네 교회 이름이 써 있다), 역장은 보이지 않고 아주머니 한 분이 분주하게 표를 확인하고 있다. 사실상 여객의 업무는 막을 내리고 2009년부터 역무원이 없는 무인 간이역이 되면서 생겨난 풍경이다. 승차권을 구입할 땐 먼저 열차를 탄 후 승무원에게 구입하면 된다.

신망리역엔 역장이 없다. 명예 역장이라 짐작되는 동네 아주머니가 역무 일을 혼자 관장한다. 개찰구가 따로 없어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일일이 내리는 사람에게 직접 가서 표를 받는다. 하지만 등산객들 외에는 모두가 한 동네 사람들이라 아주머니 역장님은 표는 대충 받고 사람들과 아는 체, 인사 하느라 더 바쁘다. ​이용객이 많지 않는, 그래서 몇 번만 오르내리다 보면 서로가 구면이 되는, 그러 곳이다.​

간이역사 벽에 바짝 붙어선 책장에 책들이 빽빽하게 차 있어 눈길을 끌었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책상과 낡았지만 잘 정리되어 있는 책들의 모습이 포근하다. 대합실 후문쪽에서는 매미들의 합창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는 햇살을 조명삼아 의자에 앉아 무심히 고른 책을 펼쳐 넘기는 기분이 한없이 여유롭다. 이 아담한 책 서가는 2009년 고추 농사를 하던 무보수 명예역장과 동네 교회 목사 등 마을 주민들의 아이디어와 실천으로 생겨났다고.

대합실 벽 한쪽에 향토시인 이재성시의 자작시가 걸려있다. 서가 책꽂이에는 그의 시집도 한 권 꽂혀 있다.

도농(都農)이 숨쉬는 신망리에서 / 푸른 복음자리 틀었네.
놀이도 절반 일도 절반 / 밤이 어둠 털어내듯
번거로움과 외로움 / 걷어가리니...
꿈은 저만치 / 들꽃은 이만치서
저리도 손짓하는 / 구름사이로
천수(天壽)의 미소 황홀하여라.

신망리역 대합실 천정 한구석에 어엿하게 자리한 제비집
 신망리역 대합실 천정 한구석에 어엿하게 자리한 제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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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려는 승객뿐만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도 의자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간다. 알고 보니 신망리역은 과거 40여 년 이상 주민들을 위한 마을회관 역할을 했단다.

어디선가 향수를 자아내는 제비의 명랑한 지저귐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대합실 후문으로 웬 제비 한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놀라는 순간 더욱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다. 대합실 천장 구석에 제비집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주둥아리를 귀엽게 내밀고 있는 두세 마리의 새끼들이 어미가 시시때때로 가져다주는 모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비의 지저귐도 참 오랜만에 들어 반가웠는데 제비집까지 보게 되다니. 유년시절 집 대청마루천장에 자리한 제비집에서 아침, 저녁으로 제비들을 보았던 내겐 노스탤지어의 풍경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에게 '외딴 역'이 된 덕분에 이런 작고 귀한 집이 생겨날 수 있었지 싶다. 어느 기차역 혹은 간이역에서도 느낄 수 없는 인간미가 신망리역엔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19일에 다녀 왔습니다.



태그:#기차여행, #경원선, #신망리, #신망리역 , #간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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