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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제주도 선흘1리에서는 생태적 가치를 담은 마을의 생명 약속을 만드는 주민 토론이 벌어졌다.
 지난 6월 제주도 선흘1리에서는 생태적 가치를 담은 마을의 생명 약속을 만드는 주민 토론이 벌어졌다.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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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철이다. 제주도는 진작부터 육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제주로 삶터를 옮겨 살면서 놀라거나 배우는 일이 적지 않다. 제주에 온 첫 해, 해거름녁에 동일주 버스를 타고 세화에 있는 지인에게 다니러 갈 때도 그랬다. 함덕에서 버스를 타고 왼쪽으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가다보니 버스 안내 방송이 다음 정거장은 만장굴이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여기가 만장굴이구나 하며 창밖을 살피는데, 차에서 내리려고 짐을 챙겨 일어서는 사람들은 여행자가 아니라 학생들, 할망 하르방, 삼춘들이었다.

이 모습에 나는 '아... 그렇지...' 하고 놀라고 말았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여기는 관광지가 되기 훨씬 전, 아니 수백 수천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삶의 터인 것이다. '만장굴'이라는 단어에서 '사람'을 연상해본 적이 없었던 터였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갈 길을 찾아서

지난 6월 28일, 제주도 중산간마을 선흘1리 마을체육관에서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 펼쳐졌다. 귤농사로 한창 바쁜 일손을 잠시 놓고 모인 마을 주민 120여 명이 둥그런 원탁 10개에 둘러앉아 흥겨운 토론을 벌였다.

귀중한 자연유산을 가진 선흘1리가 어떻게 자연을 지키고 마을을 지켜나갈지 생태적 가치를 담은 마을의 규칙을 만들기 위한 자리였다.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선흘곶 동백동산을 건강하게 지키고,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가며,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고, 멸종되어가는 자생식물을 복원해나가자는 주민들의 의지가 모아졌다. 여행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친절하게 안내하자는 제안도 원탁마다 쏟아졌다.

예로부터 주민들이 밥짓고 빨래하고 농사짓는 모든 삶의 젖줄이 되어주었던 습지 선흘곶 동백동산이 2011년 람사르습지로 등재됐다. 그 이후부터 동백동산을 지키고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갈 길을 찾아온 주민들의 노력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모아지고 있었다.

두 번째를 맞는 원탁토론이어서 그런지 주미들은 스스럼없이 의견을 말하고 경청하며 대화했다.
 두 번째를 맞는 원탁토론이어서 그런지 주미들은 스스럼없이 의견을 말하고 경청하며 대화했다.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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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노인들이 원탁 토론을 한다고?

시골 노인들이 모여 어떻게 이런 토론을 하는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토론이 이번 처음이 아니다. 선흘1리 체육관에 처음 둥근 원탁이 차려진 것은 지난 2월 마을 상징 찾기 토론이 그 시작이었다.

과연, 어르신들께서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주실 것인가. 어느 마을이나 그렇듯 이장님이나 반장님이 안건을 가지고 나오면 그것이 좋다, 싫다는 의견을 말하는 데 익숙한데 말이다. 아예 백지에서부터 각자의 생각을 내놓고 그것을 투표해 모아나가는 상향식 토론을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는 노인들이기에 가능할 지 반신반의 할 수밖에 없었다..

토론의 예의와 대화 방법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고 마을 청년들이 원탁마다 들어가 "삼춘 어릴 때 뭐하고 놀았수꽈? 질문을 던지자 봇물이 터졌다. 24개의 후보가 나오고 투표로 여섯 개의 마을 상징이 가려진 것이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는 줄도 모를 신나는 토론이었다.

원탁은 구석진 자리 없이 누구나 평등한 자리다. 어린이도 청년도 장년도 노인도 둥글게 둘러앉아, 모두 말할 수 있도록 작은 원탁으로부터 의견이 길어올려져 이것을 놓고 서로 지지 발표를 하고, 공정히 겨루어 모두가 인정할 결과를 스스로 이끌어내는 것을 주민들은 경험했다. 잘 될까 하는 걱정을 보란 듯이 뒤집으며 마을에 대한 애정과 자발성을 보여준 것이다. 선흘1리는 이런 열린 토론과 공동의 결정이라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공동체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선흘1리는 이런 열린 토론과 공동의 결정이라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공동체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선흘1리는 이런 열린 토론과 공동의 결정이라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공동체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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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에게 드리는 당부

이번 토론 내용에는 여행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마을을 수시로 오가는 여행자들에게 따뜻하게 웃어주는 삼춘들이지만 마음에 품었던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다.

쓰레기를 숲에 버리면 안 된다, 되가져 가라, 숲에서 담배를 피우면 되겠냐, 동식물을 함부로 채취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자연에 대한 예의를 지켜달라는 것과 마을에 진입하는 차량은 좀 천천히 다녀야 한다, 아무 데나 주차해서 불편할 때가 있더라, 함부로 집안을 기웃거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등등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이야기로 모아졌다..

그렇게 원탁별로 토론된 제안들이 발표되고 마을의 생명 약속이 될 후보들이 체육관 한쪽 벽을 가득 메웠다. 투표가 시작된 것이다. 다섯 개씩 투표용 스티커를 받은 삼춘들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항목에 정성껏, 신나게 스티커를 붙이셨다. 그렇게 선흘1리의 생명 약속이 정해졌다.

해가 기울도록 나눈 이야기가 벽에 붙고 주민들의 스티커 투표로 드디어 마을의 생명 약속이 정해졌다.
 해가 기울도록 나눈 이야기가 벽에 붙고 주민들의 스티커 투표로 드디어 마을의 생명 약속이 정해졌다.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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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이게 맞나... 투표 스티커를 붙이는 삼춘의 손끝에 신중함이 묻어난다.
 가만... 이게 맞나... 투표 스티커를 붙이는 삼춘의 손끝에 신중함이 묻어난다.
ⓒ 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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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흘곶 동백동산은 먼물깍을 비롯한 수십개의 습지를 품고 있는, 그 전체가 커다란 습지인 곶자왈숲이다.
 선흘곶 동백동산은 먼물깍을 비롯한 수십개의 습지를 품고 있는, 그 전체가 커다란 습지인 곶자왈숲이다.
ⓒ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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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여름 휴가지는 어디인가요?

며칠 전, 정부에서 명품 생태관광지로 육성할 후보 마을 4곳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흘1리도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이에 포함되었다. 그동안 고즈넉한 생태여행지로, 아는 사람만이 아껴 찾았던 선흘리를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될 것이다. 선흘의 자연과 문화를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고 나눌 수 있게 되겠지만 그만큼 숲에 부담이 가거나 주민들의 삶이 불편해지는 일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관광지 이전에 그곳에 뿌리내리고 대대로 살아온 삶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여행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여줄 것이다. 여행이 그곳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의 자연과 삶을 살리는 소중한 만남이 될 것이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스스로 여행 약속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내가 여행에서 얻고 싶은 것, 그리고 여행지와 사람에게 갖춰야 할 예의를 담아 지켜본다면 뭔가 뿌듯한 휴식이 되지 않을까?

선흘1리 생명 약속(전문)
설촌 이전부터 이 터를 지켜온 선흘곶 동백동산과 그 안에 깃든 자생 식물, 동물 그리고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기고 보전할 것이다. 또 서로 화합하는 따뜻한 마을 공동체를 지키며, 인간과 자연의 행복한 소통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 선흘1리 리민은,
- 선흘곶 동백동산과 마을의 역사, 문화, 생태적 가치를 잘 정리하여 후세에 남기겠습니다.
- 여행자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친절하고 의미 있는 안내를 하겠습니다.
- 마을 경관 개선(돌담정비, 전주 지중화)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갈 것입니다.
- 마을과 동백동산을 방문하는 여행자의 구간, 인원을 규제하여 보전과 활용의 균형을 이루겠습니다.
- 자생식물 야생화를 복원하여 생물다양성 보전에 기여하겠습니다.
- 신축 건물 설계는 주변 경관과 조화롭게 하겠습니다.

더불어 여행자는,
- 쓰레기는 최대한 줄이고 되가져가서 청정한 선흘1리를 지켜 주십시오.
- 숲과 마을 안에서는 금연을 지켜주십시오.
- 동백동산 탐방로를 벗어나 동식물을 해치거나 훼손하는 행동을 삼가해 주십시오.
- 마을 안 통제구역은 주민 사생활 보호를 위해 함부로 기웃거리지 말아주십시오.
- 차량으로 마을에 들어설 때는 속도를 줄이고 지정된 곳에 주차해주십시오.
- 사진을 찍을 때는 미리 의향을 물어주십시오.
- 마을의 전통과 의미가 담겨있는 기념품과 지역 생산물을 활용해 주민 소득에 기여해 주십시오.



태그:#선흘1리, #생태관광, #공정여행, #동백동산, #람사르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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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중산간마을 선흘1리에 살면서 마을출판사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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