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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①] "암 걸린" 신입사원 알고 보니...
회사원인 이아무개(51)씨는 얼마 전 자신의 아들 뻘 되는 신입사원이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 암 걸릴 거 같아!" 아직 젊은 신입사원이 하는 말에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신입사원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아, 이거 요즘 유행어예요!" 암에 걸릴 것 같을 정도로 업무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라고 한다. 이씨는 주변에서 암 투병으로 힘들어하는 동기들을 봤기에 태연히 '발암'을 입에 올리는 신입사원을 보며 어이 없어 했다.

[사례②] 연애 좀 했다고 "혐오스럽다?"
취업준비생 김씨는 중학생 과외를 하고 있다. 그날따라 가르치던 학생은 평소 좋아하던 아이돌 가수의 열애 소식을 듣고 분해하고 있었다. 웃으며 학생의 수다를 들어주던 도중 김씨는 움찔했다. "팬들을 배신하다니, 진짜 극혐이에요!" "사람한테 혐오스럽다고 하면 어떡해?" 좋게 나무라며 넘어가려 하는데 학생이 한발 더 나갔다. "XX혐!" 해당 가수의 이름에 '혐오'를 합성한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언어 구사에 김씨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암' 'OO충' 등 표현으로 분노 표출... "정서 피폐 우려된다"

네티즌들이 국가대표의 경기력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며 '발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네티즌들이 국가대표의 경기력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며 '발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이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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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스트레스에 대해 '암' '혐오' 등의 표현을 쓰는 등 공격적인 언어 사용이 도드라지고 있다. 자신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언어 사용은 스스로의 정서를 피폐하게 만든다는 지적이다.

회사원 이아무개씨는 신입사원이 "암 걸릴 것 같아요!"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회사원 이아무개씨는 신입사원이 "암 걸릴 것 같아요!"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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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터넷 상에서 유행하는 키워드는 '발암'이다. 암에 걸릴 것 같을 정도로 큰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지난 브라질 월드컵 당시 트위터 상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의 무기력한 경기 내용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하는 데도 사용됐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2시간 자고 발암 축구 보고 바로 출근하네(@co***ward)", "이 정도면 발암 축구를 넘어 암세포도 축구를 보면 죽고 싶을 수 있다(@freefal****)" 등의 표현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한국 대표팀의 경기 내용을 비판했다.

'극혐'은 '극히 혐오스럽다'의 줄임말이다. 포털 검색창에 '혐'을 치면 자동 완성되는 검색어로 '혐홍철' '혐경란' 등이 뜬다. 서바이벌 형식으로 진행되는 예능 프로그램 <더 지니어스> 출연자의 이름에 '혐오'를 합성한 단어다. 누리꾼들은 '아, 오늘 제발 혐홍철 탈락했으면 좋겠다'(ID 박OO) 등 출연자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데 해당 단어를 사용했다. 출연자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모습임에도 사람들은 혐오스럽다는 표현을 쓰며 분노를 표출했다.

누리꾼들은 '쓰레기'를 비하 대상이나 싫어하는 인물 이름 뒤에 합성해 사용하기도 한다. 유명 예능 MC였던 한 연예인이 불법 도박 혐의에 휘말리자 네티즌은 그의 이름에 쓰레기를 붙여 'X레기'라고 불렀다. 해당 표현을 자기 자신에게 사용해 '나레기'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공연을 보고 싶지만 지방에 사는 나레기는 울지요(@Ha***Rui)'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나타내는 데 쓰이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을 '벌레'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자어 '충'을 어미에 붙여 벌레처럼 보잘것없는 처지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직장인들을 '출근충', 토익 공부하는 학생은 '토익충'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인터넷 상에선 해당 표현을 사용한 '백수 vs. 출근충 개념 비교'라는 게시물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해당 게시물은 '출근충 : 밤에 TV 보고 4~5시간 겨우 자고 계속 되는 피로 누적으로 쓰러지고 병원 행'이라고 설명하면서 직장인을 '출근충'이라고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박주화 국립국어원 연구원은 30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표현이 비속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를 두고 잘못됐다고 하기는 힘들다"라면서도 "그렇지만 상황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스스로의 정서를 피폐하게 하고 표현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박 연구원은 또 "은어를 계속 사용하다보면 버릇이 돼 기분이 나쁘지 않더라도 무의식 중에 사용할 수 있으니, 되도록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라고 조언했다.

덧붙이는 글 | 이세정 기자는 <오마이뉴스> 20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극혐, #발암, #혐홍철, #멘탈레기, #언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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