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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떠도는 유(幽)병언이라는 관념

CERCHI PERFETTI, oil on canvas, 80 x 120cm
 CERCHI PERFETTI, oil on canvas, 80 x 120cm
ⓒ Roberto Bernar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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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나 커뮤니티 등에 사진보다 사진같은 그림들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흔히 금손이라 불리는 하이퍼리얼리즘 작가들의 작품이다. 아방가르드한 현대 미술의 테마가 대중과 가장 적극적으로 소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아이러니다.

하이퍼리얼리즘 작가들의 회화에 담겨있는 있는 테제는 현실을 최선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하얗게 빛을 그리고 검게 반사음영을 극대화하여 우리가 보는 현실 이상의 착시를 일으킨다. 2차원 캔버스 속에서 빛에 눈부시고, 반사광과 그림자에 헛 손질까지 하는 등 우리의 체험이 촉각의 단계까지 나아가면 되돌아와 현실은 되레 시시해보인다.

이 연출이라는 미학적 용어가 미술만의 소유물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것을 마케팅이라 부르고 자본주의보다 앞서 차가웠던 시절엔 각종 프로파간다가 그 이름을 대신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콘트라스트 한껏 올라간 맛집 사진, 자극적인 포르노그래피, 깔끔하고 화려한 홈페이지의 페이퍼컴퍼니들을 통해 우리는 허상과 현실이 전복되는 찰나를 경험한다. 어찌보면 하이퍼리얼리즘이란 표현 기법이 아닌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씁쓸한 담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이퍼리얼리즘 속 입체들은 미디어의 위대함에 힘입어 '원본보다 더 원본같은'이 아닌 아예 원본을 필요로 하지 않은 시뮬라크르(복제)의 단계로 나아간다. 더 이상 원본은 필요없다. 가까운 실례라면 유병언이 필요없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종편의 뉴스쇼에게 유병언과 관련된 진실 따윈 필요없는 것이다. 유병언, 그는 귄더안더스가 말한 팬텀의 위치에 정확히 안착한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러나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채널A 화면 갈무리
 채널A 화면 갈무리
ⓒ 채널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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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전 행적은 물론이고 죽어서조차 살아있는 것도 아닌 죽어있는 것도 아닌 유령의 상태에 머무른다. 이제 대한민국에 떠도는 유병언이라는 관념은 그의 시체도 혹은 어딘선가 숨쉬고 있을 육체도 아닌 브라운관 속 이미지와 우리의 머릿속을 통해서만 오롯이 존재한다.

사실 우리가 유병언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2014년 4월 16일 무고하게 죽어간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속죄하고 현재 대한민국의 단면을 정확히 들여다 보기 위해.

우리는 무고한 친구들이 아무 이유없이 죽었다는 명백한 사실로 끊임없이 돌아가야한다. 그러나 뉴스쇼의 보도 아닌 보도의 모습은 시청률은 지키고, 광고주는 만족시키며, 언론이라는 명예는 유지하면서, 끝까지 뉴스이고 싶은. 여기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추측성 어미와 시청자들을 돌아보게 할 맵고 짠 싸구려 키워드가 덕지덕지 붙은 마치 그 꼴이 죽도 밥도 아닌 개죽과 비슷한 형상이다.

시쳇말로 "장난칠 게 따로있지"라는 표현이 있다. 무슨 연예 특종이나 잡은 마냥 그의 화려한 이력과 내연녀와의 연애스토리, 만화의 등장 인물이나 설명하는 듯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프로필을 읊조리는 방송. 채널 10번대의 무거운 위치에서 전파라는 권력을 남용해 유가족은 물론이고 전국민을 대상으로 나태하고 거만한 포맷을 통해 벌이는 가장 젊잖고 지능적인 폭력이다.

유가족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국회의원들이 뭘 얼마나 실행하고 있는지는커녕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약장수같은 이야기만 재방삼방으로 늘어 놓는다. 국산 스마트폰을 몰래 들여 99퍼센트 새것이라고 떠드는 중국의 이상한 폰가게 점원같다.

유병언 팔아먹기 혹은 유병언으로 팔아먹기

지금부터 이루어 지는 모든 일벌백계는 어차피 뒷북이다. 이미 정도(正度)는 없고 남은 것은 자식 잃은 부모님들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 유병언이 무슨 대기업 상표명마냥 가볍게 인식되고 70대 노인이라는 작은 실체와 미디어 너머의 허상 사이에 전복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누군가에게 그리고 결국 모두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전복을 막기위한 방법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지 않고 幽(유)병언이라는 팬텀 혹은 마케팅 용어를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진다.

가슴 미어지고 떠올릴 적 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지만 시작과 마무리는 무고한 친구들이 컴컴한 바다 속에서 바둥거리며 죽어갔다는 사실, 항상 그지점에 이루어져야 한다. 홀리듯 시덥잖은 스캔들에 시선을 줘버릴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환기하며 능동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변태적 반추행위를 쉽게 멈춰서는 안된다. 남겨진 우리에겐 아파하고 수치스러워야할 의무가 있다. 간단히 잊혀져선 안될 이들이다. 이념이나 이슈 따위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4월 16일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이겠지만 그런 TV쇼들의 시청률이 떨어지고 그들의 간판도 하나둘씩 불이 꺼지면 그땐 21세기형 빅브라더가 조용히 쇼프로들의 간판을 내리며 우리를 향해 마치 정의의 심판인냥 토사구팽의 미소를 건넬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 앞서 분명한 점이 있다. 이 쇼는 차라리 현대미술에 가깝다는 것이다.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주제는 물론이고 주연들의 연극성, 속보라는 해프닝의 우발적 요소에 영상 편집이라는 멀티미디어 미학까지 섞여 있으니 그 어떤 예술사조보다 대중적이며 선구적인 형태가 아닐 수 없다. 현 정권의 창조경제는 어쩌면 이미 성공한 셈이다.

세계 어느 국가가 이런 플럭서스 예술에 TV채널까지 할애하며 지원해주겠는가. 유가족의 의견은 단 한줄도 소중하지만 그것을 왜곡하는 쇼프로는 조롱당해 마땅하다. 돌아가신 백남준 선생님께 정말 뭐라도 묻고 싶다. 뭐라도.


태그:#유병언, #세월호, #미디어, #종편, #하이퍼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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