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구 수성구 두산동 단군성전의 단군 좌상
 대구 수성구 두산동 단군성전의 단군 좌상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오늘은 철기 시대 초기의 모습을 돌이켜 생각해볼 수 있는 유적을 찾아 대구경북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대구 수성구 두산동 산13-7 단군성전, 경주 오릉(경내 알영정 포함)과 나정, 영천 도남동 산7-1 청제비(보물 517호), 상주 공검면 양정리 199-7 공검지(경북도 기념물 121호), 의성 안계면 안계고등학교 담장옆 대제지 유허비와 단북면 벼락지가 바로 오늘의 답사 대상이다. 물론 다 둘러볼 수 없으면 가본 적이 있을 법한 오릉과 나정은 생략하고, 못 중 한 곳과 단군성전을 답사지로 선정하면 좋으리라.

철기 초에 연맹왕국이 성립한 까닭

인류가 처음 발명한 금속은 구리였다. 인류는 구리에 아연과 주석을 섞어 청동 제품을 만들었다. 따라서 세 가지를 두루 갖추어야 만들 수 있는 청동 제품은 대량 생산이 어려웠으므로 지배 계급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구리에 비해 쇠는 많이 나는데다 구입도 쉬웠다. 그 결과 누군가가 철기를 독점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당연히 초기 철기 시대에는 힘이 비슷한 종족들이 무수히 존재했다. 그래서 연맹왕국이 성립되었다. 일방적 정복이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조선, 고구려 등 모두 연맹왕국

단군신화의 곰은 웅녀가 되어 아들 단군을 고조선의 건국 시조로 만든다. 하지만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이는 환웅 세력과 곰을 숭상하는 종족이 연합하여 호랑이를 숭상하는 종족을 배제하고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다.

고구려도 주몽과 소서노 세력의 연합정권 국가였다. 금관가야도 수로와 허황옥 두 세력이 이끄는 나라였다. 한강에서 전남에 이르는 마한 지역에는 종주국인 목지국을 비롯하여 54개나 되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박석김 세 성씨가 돌아가며 왕위를 차지한 것으로 보아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영은 행실이 어질고(有賢行)  내조가 훌륭하여(能內輔) 사람들이 (혁거세와 알영을) 두 사람의 성인(聖人)이라고 불렀다(時人謂之二聖)'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알영의 뛰어난 자질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지만, 신라 초기의 권력이 박혁거세와 알영 두 가문의 분점 상태였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원삼국 시대

무수한 소국들이 고조선 멸망 이후 세워진다. 그 중 기원전 1세기에 이미 왕을 칭한 부여, 그리고 고구려, 옥저, 동예, 백제국, 사로국, 구야국 등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 본격 삼국 시대 이전의 원(原)삼국 시대를 연다. 원삼국 시대는 고조선 멸망 이후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했던 때인 삼국 시대 이전까지를 말한다.


(사진 위) 박혁거세와 알영의 무덤이 함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오릉 (사진 아래, 왼쪽) 박혁거세가 처음 출현한 곳인 나정 (사진 아래, 오른쪽) 알영이 처음 출현한 우물터 알영정, 오릉 경내에 있다.
 (사진 위) 박혁거세와 알영의 무덤이 함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오릉 (사진 아래, 왼쪽) 박혁거세가 처음 출현한 곳인 나정 (사진 아래, 오른쪽) 알영이 처음 출현한 우물터 알영정, 오릉 경내에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넓은 들판마다 저수지 만들고 농사 지어

농경사회의 최대 재산은 농토였다. 전쟁도 농토 확장에 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벼농사를 잘 짓기 위해 자기 영토 내의 넓은 들판과 빼앗은 평야 지대에 많은 저수지를 축조했다.

삼한 때부터 우리나라에는 이미 의성 대제지, 충북 제천 의림지, 경남 밀양 수산제, 전북 김제 벽골제 등이 축조되었다. 연꽃으로 유명한 상주 공검지도 이때 축조되었다. 공검지는 조선 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메워져 지금은 상당 부분이 농토로 변했다. 하지만 연꽃이 피는 여름철에는 특히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여 많은 나그네들이 찾는 명소로 되살아나고 있다.

의성 대제지 또한 거대한 저수지였다. '큰 둑을 가진 못'이라는 대제지 이름 자체가 크기를 말해주는 것만 보아도 그 규모는 상상이 된다. 하지만 일제 시대 이후 자꾸 메워져 농토로 변하다가 인근 산골짜기에 경북 최대의 저수지인 조성지, 개천지 등이 만들어지면서 아주 자취를 잃고 말았다. 다만 그 사실을 기려 경북 최대 평야인 안계평야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안계고등학교의 담장 옆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대제지의 일부로 추정되는 단북 벼락지가 남아 있어 이 못 또한 아름다운 연꽃 풍경을 자랑한다.

원삼국 시대가 끝난 뒤인 536년(법흥왕 23) 신라는 지금의 영천 도남동에 커다란 못을 조성했다. 저수지에는 청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법흥왕은 저수지 축조 공사를 마친 뒤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도 남아 있는 청제비(보물 517호)는 머리에 비각을 얹은 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은 귀한 몸이 되었다.

(왼쪽부터) 영천 청제비, 공검못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공갈못 노래비', 안계평야에 농사지을 물을 공급한 대제지의 일부가 남은 것으로 여겨지는 의성 단북 벼락지
 (왼쪽부터) 영천 청제비, 공검못 입구에 세워져 있는 '공갈못 노래비', 안계평야에 농사지을 물을 공급한 대제지의 일부가 남은 것으로 여겨지는 의성 단북 벼락지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고조선과 진국

고조선 시대, 한반도의 남반부는 기원전 2세기부터 진국(辰國)이 존재했다.

진국 진수(233∼297)의 <삼국지>에 고조선이 멸망하는 기원전 108년 직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동쪽의 진국(東之辰國)으로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거왕에게 한(漢)과 평화롭게 지내자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진국으로 망명을 했다는 뜻이다. 이는 그 무렵 고조선의 남쪽 지역에 진국이라는 정치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진국은 기원전 2세기 후반 무렵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할 만큼 세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진 유민이 대규모로 남하함으로써 진국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의 길을 걸었다.

고조선은 진이 중국과 교류하는 것을 막았고, 그 결과 고조선과 중국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다. 고조선 멸망 이후 마한, 진한, 변한 연맹체가 성립되었다. 그 중 마한이 가장 강성했고, 마한의 종주국인 목지국이 삼한 전체의 정치를 주도했다.

덧붙이는 글 | 방학을 맞아 대구경북의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시대순으로 답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께서는 이어지는 '방학맞이 대구경북 역사여행'을 순서대로 찾아서 읽어보시면 참고가 될 것입니다.



태그:#청제비, #공갈못, #나정, #단군성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