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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다시 보는 2013년 한국정치史' 9회~11회에서 살펴보았듯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의 2013년 9월 공세를 거치며 한국사회는 정치적, 사상적 다원성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관련기사 : 사건은 대통령의 위기 조장 발언 열흘 후 터졌다 등)

이런 속에서 이 무렵 박 정권은 부쩍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속뜻은 결국 새누리당 정권만이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역사인식 재편 작업이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검정 통과였다.

새누리당,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통과 전면에 나서다

이석기 의원 내란예비음모 사건 와중이던 2013년 8월 30일, 뉴라이트 인사들이 집필한 <한국사> 교과서(아래 뉴라이트 역사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 심의를 최종 통과했다. 그러나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자마자 역사학계·시민사회·교사 및 학부모단체의 광범한 반발과 검정취소 요구에 직면했다.

특히 9월 10일, 역사학계가 그 내용상의 왜곡 및 편향성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관계 서술에서의 오류가 298건에 달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연이어 뉴라이트 교과서가 인터넷 자료 등을 무단 표절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됐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날부터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은 자당 의원들을 상대로 뉴라이트 교과서 저자들을 연사로 초빙한 '근현대 역사교실'을 시작했다. 이날 이들은 "좌파와의 역사전쟁"을 선포했다. 뉴라이트 교과서 통과를 새누리당 차원에서 뒷받침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비록 역대 정권이 역사 교과서의 내용에 개입하는 등 공공적 역사인식을 조작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적은 있었지만, 이토록 집권 여당이 전면에 나서 노골적으로 '역사전쟁'에 나선 경우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마치 일본의 극우파 정치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좌파와의 역사전쟁'을 선포한 김무성 의원의 아버지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은 일제 식민지시기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고 전쟁동원 친일단체인 조선 임전보국단 간부로서 일본군에게 '위문편지 보내기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뉴라이트 교과서 공세는 새누리당에 의해, 새누리당 정권의 영속을 보장키 위한 정치적 공세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이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연해져갔다. 이러한 권력의 지원을 등에 업은 뉴라이트 교과서 저자들은 역사학계의 지적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존 교과서들이 오히려 친북·친소·친공·반미·반일·반자유주의에 입각돼있다"며 공세를 폈다. 그러나 이들의 공세는 뉴라이트 역사교과서의 내용이 역으로 반북·반소·반공·친미·친일·친자유주의·독재 옹호로 채워져 있음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곧이어 '이승만 미화'로 유명한 유영익 교수가 역사학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공적 역사인식의 수장인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됐다.

"학교자율성 침해"라는 국무총리, 누가 누구한테 할 말?

하지만 정권 차원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뉴라이트 역사교과서가 가치관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관계의 서술에 있어 숱한 오류와 무단 표절 등을 저지른 '수준미달 교과서'라는 사실이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결국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저자의 절반이 필진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줄 것을 요청하는 한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교육부는 한국사 교과서 8종 전체에 대한 수정·보완을 '권고'했다.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를 지키기 위한 깜냥이었다. 자연히 나머지 역사교과서 필진 전원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 의원들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체제 전환 카드를 꺼내들며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 교과서의 국정체제 전환 주장은 유신시대 혹은 현재 북한과 같은 교과서 체제로 회귀하자는 것으로서 파쇼적 발상에 다름 아니었다.

이와 같이 기존 역사교과서에 대한 수정 '권고'가 먹혀들지 않자 11월 29일, 교육부는 7종의 한국사 교과서(뉴라이트 교과서 포함)에 대해 총 41건의 내용 수정을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의 수정 명령 내용 중에는 이미 한국고대사 학계의 통설로 자리 잡은 부분도 있어 이제는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의 반발까지 불러일으켰다.

또한 교육부의 이러한 수정 명령은 일선 학교현장의 교육 일정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교육부의 이 수정 명령으로 인해 학교현장에선 역사교과서 선정 작업을 1주일 안에 졸속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정치화된 교육부'로 인해 애꿎은 교육 현장만이 피해를 입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는 수정 명령을 거쳤음에도 기존의 극우적 서술내용이 오히려 강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때까지 교육부가 취했던 모든 조처가 뉴라이트 교과서를 살리기 위한 잔꾀였음을 웅변했다.

실제 12월 18일, 새누리당 근현대 역사교실 마지막 강연 자리에서 김무성 의원은 뉴라이트 역사교과서가 "출판조차 좌절될 뻔한 것을 우리가 막았다"고 말했다. 이는 뉴라이트 교과서 승인이라는 새누리당의 의도를 실현하는데 기어코 성공했다는 '자축'으로서 한편으로는 뉴라이트와 새누리당 양자 간의 밀착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발언이었다.

허나 자축에 비해 성과는 초라했다. 애초 뉴라이트 교과서 채택 방침을 정했던 20여개 학교 중 전주 상산고를 제외한 모든 학교들이 이를 철회해 정홍원 국무총리가 "압력에 의한 교과서 철회는 학교자율성 침해"라는,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분간하지 못할 말을 뇌까릴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정작 교육 현장과 교과서 집필진에 압력을 행사하고 교육 자율성을 침해한 주체는 박근혜 정부였는데 말이다. 이런 것을 두고 '유체이탈화법'이라 하는가?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교육부는 뉴라이트 교과서 철회로 돌아선 일선 학교에 대해 특별조사를 진행하고, '인사보복'의 방법으로 불이익을 가했다. 또 각종 극우 수구단체들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역사교과서대책 범국민운동 출범대회를 결성해 교학사 교과서 홍보 및 구매운동 계획을 밝혔다.

"어버이 수령"과 다를 바 없는 "아버지 각하"

결과적으로 '역사쿠데타'로 볼 수 있는 역사교과서 공세는 박근혜 정권의 9월 공세 중 실패작의 하나가 되고 말았지만, 이밖에도 새누리당 정권은 극우 수구세력의 장기집권을 담보할 극우 일색화의 이념재편을 위해 일찍부터 권력기관을 동원하고 있었다.

예컨대 국정원은 이명박 정권기인 2010년부터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방안'이라는 비밀 프로그램을 실행했던 바, 이는 말 그대로 젊은층을 겨냥한 사이버 공세전략이었다. 그 구체적 실상은 검찰수사에 대한 국정원의 저항으로 인해 아직 밝혀져 있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젊은층의 의식'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누리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국가보훈처 역시 18대 대선을 앞두고 '이념대결 승리'라는 목표 하에 야당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한 각종 안보교육 등을 추진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안보교육의 대상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직접 밝힌 대로 "특히 2040 국민들"이었다. 이처럼 국정원·국가보훈처 등 각종 국가기관의 사이버 대선개입은 젊은층을 겨냥한 이념재편 공작의 성격도 함께 지니고 있었고, 사회전반을 극우 일색화하여 극우수구세력의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한 의도를 충족키 위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공작들은 역사교과서 공세와 동일한 맥락에 있는 것들이었다. 여기서 이러한 시도가 이명박 정권 시기부터 추진된 점은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한편, 역사'교과서' 공세와는 다른 차원의 역사공세도 전개됐다. 10월 유신, 10·26사건 등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이 깊은 10월이 되자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기 위한 다채로운 풍경들이 펼쳐졌다.

유신체제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아 '새마음운동'등을 이끌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10월 20일 "새마을운동은 우리 현대사를 바꿔놓은 정신혁명"이라 말하며 새마을운동을 현대사의 분수령으로까지 띄었고, 6일 후에 열린 박정희 추모식에서는 북의 '어버이 수령' 호칭을 연상시키는 "아버지 각하"라는 발언까지 나왔다.

이밖에도 유신체제가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출현했다는 둥, 유신시절이 살기 좋았다는 둥의 발언들이 권력 주변부 인사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북을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이 북을 따라하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사실 이러한 현상들은 이미 18대 대선 국면에서도 전개된 바 있었다. 특히 "5·16은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고, 아버지의 유신은 '구국의 결단'이었으며, 인혁당 '학살'은 대법원에서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온 사건이라는 당시 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은 그의 당선 이후 어떤 일들이 빚어질지를 충분히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그들은 왜 자신들의 역사인식 문제가 논란이 되는 지에 대한 감각조차 없었지만, 그것은 '역사논쟁' 차원이 아닌 '후보검증' 차원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박근혜 후보와 그의 측근들이 과연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시대를 대상화(혹은 타자화) 할 수 있는지, 그래서 억압으로 점철된 아버지 시대로부터 차별화하여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을지 궁금해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박근혜 후보와 그 주변을 둘러싼 인사의 뇌리는 여전히 '아버지 각하'에 종속되어 있었고, 그것은 2013년의 역사가 '반동의 한 해'로 얼룩지며 한국민 모두가 불행해지는 근본적 요인이 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참고 문헌
<경향신문>, <노컷뉴스>, <뉴시스>, <미디어오늘>, <연합뉴스>, <오마이뉴스>, <한겨레>, <한국일보>



태그:#뉴라이트 역사교과서, #김무성의 역사교실, #교육부, #아버지 각하,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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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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