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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 민선식 할머니는 카메라 앞에 서면 언제나 쑥스러워 하신다. 이 사진은 도성마을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다.
 한센인 민선식 할머니는 카메라 앞에 서면 언제나 쑥스러워 하신다. 이 사진은 도성마을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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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신풍애양원 도성마을에 사는 민선식 할머니는 21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돌이 된 아이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후 소록도를 거쳐 애양원에서 살았다. 어느덧 88세가 되었다.

한센병은 전염병일까? 유전병일까? 답은 둘 다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한센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했다. 임신을 하면 강제 낙태시켰다. 몰래 자식을 낳으면 자식과 생이별을 시켰다. 세상의 그 어떤 병도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을 순 없다지만 한센병은 그걸 뛰어넘었다. 세상의 편견 때문이다.

여수 신풍애양원을 비롯해 국내 한센인 정착촌은 지금도 84군데 남아있다. 아직도 1만3000여 명의 한센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의 나이는 적게는 70살에서 많게는 90살에 가깝다.

한센인들이 특별한 외출을 했다. 8월 3일까지 여수 진남문예회관에서 사진전 '우리안의 한센인 100년만의 외출'이 열린다. 사진 찍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한센인이 주인공이다. 한센병에 걸린 이들은 손과 얼굴이 오롯이 작품에 담겼다. 한센인들은 전시회장도 직접 찾았다.

한센인, 100년 만의 외출

도성마을이 있는 여수애양원 애양교회 인근. 한센인들의 영혼의 아버지로 불리는 손양원 목사의 기념관이 보인다.
 도성마을이 있는 여수애양원 애양교회 인근. 한센인들의 영혼의 아버지로 불리는 손양원 목사의 기념관이 보인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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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한센병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센병은 1900년 즈음 호남과 경상도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때 의료선교사들이 국내에 처음 들어왔다. 대표적인 이가 포세이돈 선교사다.

국내 최초 한센병 정착촌인 여수 신풍애양원은 역사가 깊다. 올해가 105년째다. 이곳 도성마을은 지금도 150여 명의 한센인이 거주하고 있다. 또 일제강점기 때 한센인 자치공화국으로 경찰과 행정이 따로 분리된 5부장 제도가 존재했다. 그 안에선 화폐도 달랐다. 이유인즉 돈은 돌고 도니까 밖에 있던 사람들이 그 돈을 만지면 한센병이 옮는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한센병은 결핵과 비슷한 균이 침투해 생긴 병이지만 결핵보다 100배 정도 전염성이 약하다. 결핵은 외형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한센병은 말초신경을 자극해 피부조직을 괴사시키는 병이다. 균이 침투하면 신경이 죽어 뜨거운 것을 들어도 감각이 없다.

1944년 항생제가 나와 3개월만 복용하면 완치되지만, 한센인들은 격리 수용되어 한 많은 세월을 살아야 했다.

8월 3일까지 여수 진남문예회관에서 전시 중인 ‘우리안의 한센인 100년 만의 외출’을 준비한 사진작가 박성태씨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는 편견에서 비롯된다"며 "한센인에 대한 편견은 상징적인 사례다, 한센인을 똑같은 이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8월 3일까지 여수 진남문예회관에서 전시 중인 ‘우리안의 한센인 100년 만의 외출’을 준비한 사진작가 박성태씨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는 편견에서 비롯된다"며 "한센인에 대한 편견은 상징적인 사례다, 한센인을 똑같은 이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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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한센인의 일상을 사진에 담은 박성태 작가는 "한센인이란 용어는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는 이들을 "한센인 회복자로 불러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15년 이상 기자생활을 한 그는 "기자로서 이들에게 한 번도 관심을 안 가졌던 점과 신앙인으로서 이들을 외면했던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면서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다, 사진전을 통해 이들을 하나의 이웃으로 불러낸 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생각된다"라고 사진전의 의미를 설명했다.

서울에서 사진전을 보러 온 주부 김민선(51세)씨는 "사진을 배우다 다큐 쪽에 관심을 갖게 돼 이번 행사를 알게 되었다"면서 "이런 병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실제 이런 분을 본 적은 없다, 같은 사람인데 이렇게 차별받고 산다는 것이 참 안타깝"고 말했다.

친척이 한센인이라는 종교문제연구소 신외식 목사는 "한센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다음은 지난 26일 여수진남문예회관에서 박성태 작가와 한 인터뷰다.

"한센인들 마음 여는 과정 가장 힘들어"

‘우리안의 한센인 100년 만의 외출’ 전시회. 한센인 할머니의 눈이 어딘가를 골똘히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보러온 한 여성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우리안의 한센인 100년 만의 외출’ 전시회. 한센인 할머니의 눈이 어딘가를 골똘히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보러온 한 여성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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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한센인 사진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여수애양원은 105년 됐다. 이들이 일반 전시전에 자기 얼굴을 드러내 놓고, 전시회를 보러오는 것 자체가 획기적인 사건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센인을 환자, 위로 대상자, 봉사 대상자로 봐왔다. 이제 그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다. 지금까지 정착촌이나 애양원에 그들을 가둬놓고 사회와 격리시켰다. 사진전을 통해 이들을 하나의 이웃으로 불러낸 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

- 사진전을 통해 한센인들에게 생긴 변화가 있다면?
"이번 사진전은 국내 최초다. 사진전을 통해 자신들의 일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자기들이 더는 숨어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사회에 정식으로 선언하는 건 용기와 결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 관심을 가지지 않던 한센인총연합회에서 사진전 홍보에 나섰다. 지금까지 작가들은 환자로서의 한센인 모습만 들춰내려고 했다. 난 이들의 일상을 그대로 담으려 노력했다."

여수애양원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 한센인들의 모습
 여수애양원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 한센인들의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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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고쳐쓰고 있는 한센인 할아버지와 화장을 하는 한센인 할머니의 모습
 안경을 고쳐쓰고 있는 한센인 할아버지와 화장을 하는 한센인 할머니의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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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계기로 한센인에 관심을 가졌나.

"난 신학을 전공했다. 기자 생활도 15년 이상 했지만 여수에 살면서도 도성마을을 잘 몰랐다. 그곳에서 계란을 생산한다는 것밖에 몰랐다. 그러다 손양원 목사가 중증 나환자의 피고름을 짜주면서 치료했다는 게 과연 가능한지 의문점을 갖고 신풍기념관을 갔다.

거기서 한센인 강수웅 장로님과 폐허가 된 축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기자로서 이들에게 한 번도 관심을 안 가졌고, 신앙인으로 이들을 외면한 게 죄책감이 들었다. 왜 이분들이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가를 고민했다. 사진으로 일반인과 한센인이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사진전 준비에 어느 정도 시간이 들었나.
"본격적으로 1년 정도 사진 작업을 했다. 어떤 힘에 이끌려 사진을 찍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앙인으로 말하면 성령의 힘이 작용한 것 같다. 일반인의 시각으로 말하자면 귀신에 홀린 듯 쏙 빠졌다."

-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이 분들의 마음을 여는 과정이 힘들었다. 신앙이 큰 힘이 되었다. 교회 집사라는 직분이 이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특히 이 분들은 사진 찍는 것을 엄청 싫어한다. 카메라를 대면 기관총을 들이댄 것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전시회 전에 도성마을 애양교회에서 먼저 전시할 사진을 보여주고 동의 과정을 거쳤다. 이들은 자녀가 있어도 자신이 부모라는 걸 밝히지 못하고 산다. '문둥이' 자식이란 편견 때문이다. 자기 사진이 공개되면 자녀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용기를 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도로 위에 한센인과 일반인이 넘을 수 없는 편견의 선이 그어져 있다. 박성태 작가가 한센인에게 유일하게 밥을 팔고 있는 식당 아줌마 김옥희씨와 한센인이 활짝 웃는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도로 위에 한센인과 일반인이 넘을 수 없는 편견의 선이 그어져 있다. 박성태 작가가 한센인에게 유일하게 밥을 팔고 있는 식당 아줌마 김옥희씨와 한센인이 활짝 웃는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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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에 남는 사진이 있다면?
"'한센인은 우리의 이웃이라는 모토'가 바로 이 사진이다. 지금도 한센인이 식당을 가면 대부분 밥을 안 팔려고 한다. 한센인에게 밥을 파는 식당아줌마 김옥희씨가 있다. 이 분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더라. 한센인들이 외출하면 이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이 분을 만나면 환하게 웃는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몸에 소름 끼치는 기분이 들었다. 환자로서의 한센인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한센인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딱 그 장면이 나왔다. 일반인과 한센인이 마주보며 공존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다."

"편견 여전... 똑같은 이웃으로 봐달라"

‘우리안의 한센인 100년 만의 외출’ 전시회는 여수 광무동 진남문예회관에서 7월 18일~8월 3일까지 열린다.
 ‘우리안의 한센인 100년 만의 외출’ 전시회는 여수 광무동 진남문예회관에서 7월 18일~8월 3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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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센병은 전염병이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편견은 여전하다.
"1970년대 공무원들이 한센병은 치료된다고 홍보 캠페인을 했다. 그럼에도 아직 편견이 바뀌지 않았다. 최근 도성마을 행사에서 한센인과 밥 먹는 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초청 인사들이 '예방접종'을 맞고 식사해야 하느냐고 묻더라. 또 얼마 전 한 병원에서 90살 넘은 한센인이 돌아가셨다. 자녀들이 병원장, 교수였는데 딱 네 사람이 빈소에 앉아 있었다. 자식, 손주, 며느리들이었다. 주위에 알리지 못한 거다.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회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센인에 대한 인식전환은 하나의 바로미터다."

- 여수에 한센인이 150여명 있다. 시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도성마을에 한센인 3세대 아동들이 많다. 50명이 넘는다. 아동복지가 심각한 상태다. 한센인 대부분은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문화적인 접촉면에서 소외되어 있다. 고립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까 그분들 의식이 안 변한다."

- 한센인을 위한 일반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1944년 이미 항생제가 나와 3개월만 복용하면 한센병은 완치된다. 지금 시점에서는 병도 아니다. 하지만 한센인에 대한 편견은 무섭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는 편견에서 비롯된다. 한센인에 대한 편견은 상징적인 사례다.

단지 외형적으로 드러난 피부조직의 흉터 때문에 그들은 같은 인간으로서 (당당히) 살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한 번도 그런 편견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았다. 이 사회가 잘못된 생각을 방치한 거다. 한센인을 항상 환자로만 대하는 게 얼마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요소인가. 똑같은 이웃으로 생각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 <전라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한센인, #박성태 작가, #여수애양원, #손양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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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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